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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습관에 속고, 고집에 울고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메러디스(Meredith,1828~1909)는 ‘마흔 살이 지나면 남자는 자기의

습관과 결혼해 버린다’고 했다. 마흔 살은 나쁜 습관을 스스로 정당화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나이다. 이렇게 되면 습관은 고집과 결합해 좀처럼 허물기 어려운 철옹성을 쌓는다. 일찍이 장자(莊

子)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지 않다고 우기는 것을 고집이라 했다. 그뿐인가, 고집은 늘 무언가를

미워하는 마음과 붙어 다닌다.


1.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에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astner, 1899~1974)가 있다. 그는 <걸리버 여행기>, <돈키호테> 등의 고전 명작을 현대 시각으로 다시 집필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전 소설가로서, 안데르센 상 등 수많은 상을 받은 작가다.
그가 전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해 겨울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들 몇몇끼리 여행을 했습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에른스트’
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행 일정이 빽빽하고 먼 길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피곤했습니다. 그 날
우리는 밤 열차로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나도 밤늦게 찻간에서 피곤해 쿠션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 에른스트는 내 앞좌석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조용히 에른스
트의 숨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잠이 든 에른스트는 점차 깊이 수면에 빠져드는 듯했습니다.
그가 잠들고 한참 지났을 때였습니다. 에른스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조끼 주머니를 뒤졌습니
다. 그리고 약통을 꺼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일 날 뻔했어. 하마터면 수면제를 먹지 않고
잘 뻔했군!” 그는 부지런히 약을 먹고 다시 잠드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좀 코믹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습관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을
아찔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서양 속담에 ‘습관은 제2의 천성(天性)’이라는 말이 있다. 타
고난 본성만큼 그 힘이 크다는 뜻이라 하겠다. 비슷한 말을 몽테뉴(Montaigne, Michel
Eyquem de 1533~1592)가 그의 명저 <수상록(隨想錄)>에서 언급한다. “습관은 제2의
자연이다. 제1의 자연에 비해서 결코 약한 것은 아니다.” 같은 책에서 몽테뉴는 습관의 힘
을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 “습관이 하지 않는 일이나 하지 못할 일은 없다.” 습관을 마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power)처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습관은 적어도 한 개
인의 내부에서는 그런 힘을 가지고 사람을 조종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래도
가치중립적인 진술이다. 습관이 그저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니까.
습관이란 말 그 자체는 좋고 나쁨을 담고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이
‘습관’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는 긍정적인 맥락보다는 부정적인 맥락이 더 강하게 개입하는
듯하다. “습관을 버려라”, “습관을 고쳐라” 등의 말을 더 많이 듣기 때문이다. 설령 ‘좋은
습관’을 이야기할 때도 반드시 ‘나쁜 습관’을 고치라는 이야기 끝에 따라 나오는 것을 항용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몽테뉴도 <수상록>에서 습관 이야기를 꺼낼 때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습관이란 것은 참으로 음흉한 선생이다. 그것은 천천히 우리들의 내부에 그 힘
(권력, power)을 심는다.” 나쁜 습관을 ‘음흉한 선생’으로 비유한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
겠지만,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해 마침내 그렇게 길들이는 어떤 존재를 ‘선생’으로 상정한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 같다. 달리 생각하면 ‘습관’과도 같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
는 존재가 ‘선생’이라는 인식이 그즈음부터 있었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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