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우리 반 학생 수는 달랑 네 명, 모두 여자 어린이였다. 시내 학교에서 5년을 근무하고 시골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난 줄어든 학생 수 때문에 깜짝 놀랐다. 5년 전만 해도 우리 반 학생 수가 20명을 넘었는데…. 난 4년 전에 가르쳤던 네 명의 여자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꽃무늬 옷 + “여자들은 나이가 들어가면 꽃무늬 옷을 좋아하게 되어 있어. 여자들이 꽃무늬 옷을 자주 입으면 그건 할머니가 되어간다는 뜻이야.” 문경이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른 내가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휴~, 다행이다.’ 난 검은색 벨벳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과 가슴 사이쯤엔 같은 색상의 천으로 만든 장미가 몇 송이 붙어있다. 꽃무늬 옷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난 안도하면서 웃는다. 아직까지 내겐 꽃무늬 옷이 거의 없는 편이라서 또 다행이다. 난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이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 가족을 그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신입생들의 학교 초 적응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3월 말쯤. 그 날의 학습문제는 가족을 그려 그 가족에게 자기가 주고 싶은 선물을 그리는 내용이다.
우리 여자들은 아이, 어른을 가릴 것 없이 대부분 참견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진이가 그리는 그림을 흘낏 보던 문경이가 참견했다. “늬네 식구가 왜 다섯 명이야?” “우리 고모도 우리랑 사니까 가족이야. 같이 살면 가족이라고 선생님이 그랬어.” “누가 늬네 고모인데?” “여기.” “늬네 고모한테 왜 꽃무늬 옷을 그려놨는데?” “우리 고모는 꽃무늬 옷을 좋아해.” “이상하다? 늬네 고모는 아직 젊은데…. 여자들은 나이가 들면 꽃무늬 옷을 좋아하게 되어 있어. 여자들이 꽃무늬 옷을 자주 입으면 그건 할머니가 되어간다는 뜻이야.” 그날, 아이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면서 나는 앞으로도 꽃무늬 옷은 절대로 사지 않을거라며 또 웃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지금, 내가 산 옷엔 꽃무늬 옷이 포함되기 시작한다. 물론 반추상적인 꽃무늬이긴 하지만, 나도 이제 늙어 가나 보다.
한부모 가정 + 가족놀이 역할극을 하면서 난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남자 아이가 없어서 어떻게 하나. 여자 아이 한 명이 아빠가 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역할을 정할 때 조언을 했다. “이건 역할극이니까 여자라고 해도 남자 역할 한다면 특별할 거예요. 아빠 역할하고 싶은 사람?”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예진이가 말했다. “선생님, 꼭 아빠가 있어야 되는 건 아니에요. 성희는 엄마가 없고, 2학년 경민이 언니네는 아빠 없어요. 우린 아빠가 없는 한부모 가정 할래요.” 예진이의 말을 듣는 순간, 난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아빠 역할을 맡겠다는 아이가 없다면 아빠가 멀리 해외에서 돈을 벌고 있는 상황을 연출하려고 했는데, 아이의 말에 뒷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해졌다. 역할극을 하기 전에 우리는 여러 형태의 가족에 대해 배웠다. 엄마, 아빠가 다 있는 가정,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가정, 엄마나 아빠만 있는 한부모 가정, 그리고 조손가정과 복지원의 가족까지 배웠는데, 정작 가르쳤던 내가 이러다니…. 난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아이들이 역할을 나누기 시작했다. 엄마와 세 자매. 자기들끼리 무언가 속닥거린 다음에 역할극이 시작되었다. 두 아이가 전화를 건다. “엄마, 우리 이제 막 공항에 도착했어. 보고 싶었어요. 우리 아기도 잘 있지요?” “그래, 우리 딸들, 여행 잘 했니? 어서 오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놨단다.” 아이들의 역할극을 보면서 난 어? 공항?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웃는다. 짐작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기껏해야 얘들아, 일어나라, 빨리 세수하고 아침 먹자.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전개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엄마, 비행기에서 연아 언니를 만났어요. 연아 언니도 미국에서 대회를 마치고 오나 봐요. 연아 언니를 우리 집에 초대해도 될까요?” “뭐라구? 그 유명한 김연아씨를 만났다구? 우리 집에 온다면 영광이지! 어서 모셔오너라.” 상황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로 전개되어 나간다. 김연아 선수를 초대한 집. 물론 연아씨는 투명인간이다. 그럼에도 연아 선수에게 반찬을 권하고, 엄마의 솜씨자랑을 하고, 아기가 연아 선수를 귀찮게 하지 못하게 하고…. 김연아 선수의 경기 이야기며, 연아 선수에게 아빠가 안 계셔도 자기 가족들이 얼마나 화목하고, 사랑하고, 즐겁게 살아가는지 자랑도 하고…. 엄마가 고생 많이 하신다고 위로도 하고…. 김연아 선수를 배웅하고, 큰언니 역할을 맡은 예진이가 아기 역할을 맡은 성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말을 들으면서 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나도 큰아들이 이학년 때 남편을 여의고 홀로 두 아들을 키웠기 때문이다. “예쁜 내 동생, 성희야. 너도 이다음에 연아 언니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빠 없이 우리 세 딸 키우는 엄마를 기쁘게 해 주자. 응?” 둘째 딸 역할을 맡은 문경이도 한 마디 한다. “엄마, 고맙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생하시고, 미국 여행도 보내주시고요.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 은혜 꼭 갚을게요.” 난 이렇게 ‘건전하고 건강한’ 의식을 가진 아이들이 자라나는 세상이 미덥고 감격스러웠다. 우리 아이들은 ‘한부모 가정’이 슬프거나 부끄럽고 외로운 음지의 가정이 아니라,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하고 따뜻한 가정이라는 인식을 내게 심어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의 가족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숙하고, 감동적인 역할극을 즉석에서 해낸 아이들이 예쁘고 고마워서 난 그저 목젖이 아렸다.
김은아 현재 밀양 상동초등학교 교사. 부산교육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경남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이영도 시조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교단일기 <내 사랑, 들꽃 같은 아이들 : 함께 가는 길>과 수필집 <거미 여인의 노래 : 매직 하우스>가 있으며 34년 동안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