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의도가 좋은 행정지침이라도 현장에서는 탁상행정일 수 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공문처리로 화장실도 못간 채 끙끙거리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3월의 교사들도 재잘재잘 흥에 겨운 아이들처럼 활기찼으면 좋겠다. 각종 공문으로 시들어져 버린 교육현장을 살릴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학교 담장 너머로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기나긴 겨울의 통로를 지나 찾아온 봄바람만큼이나 설렌다. 방학 동안 겨울잠을 자는 회색 곰처럼 고요하던 학교는 개학과 함께 알록달록한 물결로 살아 숨 쉰다. 하지만 교육 담당 기자로써 접하는 교육현실은 회색빛에 가깝다. 15년 기자 생활의 절반 정도를 교육 분야에서 보냈지만, 신나고 즐거운 기사를 쓴 기억은 많지 않다.
봄바람도 어찌 못하는 회색빛 교육현실 교육부에서 발표하는 자료는 대부분 ‘OO정책 개선안’, ‘△△제도 내실화 방안’, ‘XX 사고에 대한 종합대책’, ‘◇◇에 대한 실태조사 계획’ 등으로 채워져 있다. 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비판이 크다보니 늘 뭔가 뜯어고치고 단속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까르르 웃으며 등교한 아이들이 들어간 곳이 이렇게 암담한 교실이란 말인가’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지경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보면 어찌됐던 뭔가를 개선하고 내실화한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교육 분야를 담당하는 기자의 시각에서 보면 ‘과연 저 많은 일들이 현장으로 쏟아져 내려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앞선다. ‘9시 등교’를 보자. 관에서는 자율 사항이라고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는 구조다. 지난해 11월 서울시교육청이 일선 학교에 보낸 ‘9시 등교와 관련한 학교의 의사 결정 추진 안내’ 공문을 보면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교육감의 뜻을 충분히 설명하라’는 지침이 들어 있다. 이 공문을 받아드는 순간부터 교사들은 교육감 의지를 전달하랴, 학생과 학부모 대상으로 조사하랴, 조사 결과 및 추진 경과 보고하랴 가뜩이나 바쁜 학기말이 더욱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교복 값을 낮춘다’는 취지로 교육부가 추진하는 ‘교복 학교주관구매제’ 역시 부담이다. 교복업체 선정 과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대형 교복업체들의 판촉전쟁 사이에 낀 학교는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강요죄, 업무방해죄 등을 운운하며 ‘학교를 고발하겠다’며 협박까지 하는 업체들도 있다고 한다.
쏟아지는 공문처리, 시들어버리는 3월의 활기 올해도 굵직굵직한 교육 현장의 변화가 예정돼 있다. 교육부는 올 상반기 교원평가제도 개선안을 만들고, 하반기에는 학교성과급제도를 바꾸겠다고 예고했다. 교원업무경감 차원에서 가정통신문 확인용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 도입되고, 학교와 학부모 간의 SNS 활동도 활성화된다. 올 7월 시행될 인성교육진흥법에 맞춰 교육내용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중학교들은 자유학기제를 더욱 확대해서 운영해야 한다. 교육부 지침 뿐만 아니라 각 시ㆍ도교육청이 새롭게 추진하는 정책도 많고 각종 학교 평가도 예정돼 있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내려 보내는 행정 지침이라 할지라도 일선 현장에 내려오면 탁상행정이 되는 경우도 있다. 교육부, 교육청을 비롯한 각 관공서에서는 무심코 공문 하나를 내려 보낼 뿐이지만 학교에는 매일 수 십 통 씩 처리해야 할 공문이 쌓인다. 크고 작은 일이 모두 공문으로 쏟아지니 이를 처리하느라 정작 아이들을 가르칠 시간이 부족해지는 상황도 벌어진다. 새 학기를 맞이하며 올해는 부디 이런 문제들이 개선되길 기대해본다. 학교를 가득 채운 3월의 활기가 교육 외의 업무부담과 공문처리로 시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프로필 _ 김희균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2000년부터 사회부, 국제부, 산업부를 거쳐 현재는 교육부를 담당하면서 동아일보 정책사회부 차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