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한 30년쯤 돼 보였다, 80년대 대학생들이 갖고 다녔던 검은색 책가방이다. 너무 오래된 탓일까. 손잡이와 가방을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져 노끈으로 질끈 동여맸다. 묵직한 가방 속엔 학생들의 취업 상황 자료부터 전문대학 발전 계획까지 서류뭉치가 가득했다. ‘독종’으로 불렸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그를 “성실함과 실천력을 겸비한 가장 청렴한 공무원”이라며 “백 년에 한 번 나올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직원들은 ‘큰소리 한번 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강의실 복도나 식당에서 마주친 학생들은 ‘총장님~’ 하며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20여 년 취재를 하면서 총장과 학생들이 이처럼 친밀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받고 싶다면 이기우 재능대 총장을 만나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
지난 4월 제 17대 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에 선출됐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아시다시피 현재 우리 전문대학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야구경기로 치면 1점차로 지고 있는 9회 말 투아웃에 주자 2루의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서는 욕심내지 않고 안타 한 개를 쳐주는 선수가 나와야 하는 법이죠. 그래야 동점도 만들고 역전을 노릴 수 있을텐데…. 열심히 해야지요.”
새 전문대법인협의회 회장으로서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학이 살아야 학생도 살고, 국가경제도 살아납니다. 주어진 임기 동안 각 대학의 설립자와 이사장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을 기대하면서 전문대학법인 권익보호와 사학의 자율성 신장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요즘 전문대 인기가 하늘을 치솟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등록금, 짧은 실무중심교육, 그리고 무엇보다 취업대란시대에 보다 빠르게 취업해 평생 일하며 공부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전문대의 장점 아닐까요. 일반대학 학생들이 전문대로 유턴하고 있는 경향(최근 3년간 실제 등록학생 3,638명)이나 일반대학에서 전문대 학과를 카피해서 개설(2004학년도 43개교 80개 학과에서 2015학년 108개교 303개 학과로 증가)하고 있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을 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무엇인가요. “작년부터 시행된 특성화 전문대학 육성사업은 가장 보람찬 쾌거라고 평가합니다. 물론아직 진행 중인 사업이고, 수업연한 다양화 문제 등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지만, 함께 고민하고 모색하면 잘 해결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수업연한 다양화는 아직 국회 계류 중입니다. 처리가 늦어지는 이유가 있나요. “항간에 전문대학의 수업연한 다양화를 놓고‘일반대학이 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합니다. 단언컨대 추호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전문대학에게 주어진 사명에만 충실해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데, 기존 틀을 바꾸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피라미드형 인적 구조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피라미드 꼭대기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역할의 문제이지 가치의 문제는 아닙니다. 수업연한에 대한 오해는 역할과 가치를 헷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피라미드 하부를 튼튼히 받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전문대학은 직업교육으로써 우리 사회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역할에 충실할 것입니다.”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전문대 성공 비결로 ‘기본을 강조한 교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학생들에게 죄짓지 말자.’ 제가 대학에 와서 교수와 직원들에게 당부해 온 말입니다. 학부모들이 뼈 빠지게 일해서 마련해 준 등록금으로 뭔가 배우겠다고 나온 학생들에게 교수는 교수 노릇 제대로 하고, 직원은 직원 노릇 제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교수가 교수 노릇을 제대로 못하면 학생이 배우고 싶은 것을 제대로 배울 수가 없고, 직원이 직원 노릇 제대로 못하면 학생이 행정서비스를 제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총장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총장이 총장 노릇을 제대로 해야 대학이 제대로 경영됩니다. 전문대학도 마찬가지로 제 역할인 직업교육, 실용교육, 직무교육, 현장밀착형교육을 제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기본교육은 바로 이것입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수많은 러브콜이 있었을 텐데 지방의 작은 전문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있으신지요. “제가 교육부 차관 출신이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더라고요. 실제로도 적지 않은 4년제 대학에서 총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자리만 차지하는 ‘에헴 총장’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리의 크고 적음에 연연해하지는 않습니다.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죠. 제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고, 또 제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우리대학의 인지도와 평판은 소위 ‘그만그만한 전문대학’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면이 제 의욕을 자극했는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능학원 박성훈 이사장님과의 인연도 중요했습니다. 부산고 선배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인천재능대학과의 연결을 보다 끈끈하게 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지위가 높고 편한 자리로 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아닌가요. “흔히 어떤 일을 선택할 때, 최선의 선택은 가장 쉬운 일을 택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 경험에 비추어보면 최선의 선택이 가장 가기 어려운 길일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우리는 다만 눈앞의 평안 때문에 그 길을 외면했던 것이지요. 그런 길은 몸은 편하고 쉬울 줄 모르나, 성취의 기쁨은 끝내 맛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남다른 철학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슴에 새겨둔 글귀가 있다면. “저는 진실, 성실, 절실을 의미하는 ‘삼실(三實)’을 마음속에 늘 새겨놓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삼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모든 사람에게 정직하고,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하며, 상대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절실함을 가져야 한다’입니다. 삼실 중 ‘진실’은 정직한 마음과 행동이 기본입니다. ‘성실’은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절실’은 일을 할 때 상대방이 절절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가슴을 울리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잘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을 다섯번이고 여섯 번이고 필요하다면 열 번이라도 찾아가 삼실의 자세로 대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후배 공무원들에 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제가 공무원 초년 시절에는 나태한 행태로 인해 다른 부서로 쫓겨날 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막상 어려운 상황이 되다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주어진 업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후배들에게 일에 재미를 느끼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면 업무 파악이 빠르고 일도 잘되어 조직의 기초도 튼튼해진다는 얘기를 해줍니다. 일을 자신의 가장 큰, 소위 ‘빽’으로 삼아 일로 승부를 건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