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도 힐링(healing), 저기서도 힐링을 외친다. 하지만 정작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너와 나’를 비교하는 ‘말 한마디’일지도 모르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은 인간의 자연성을 발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 본연의 모습보다 스펙을 더 중시하는 지금, 교육만큼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자연(自然)이란 ‘스스로(自) 그러함(然)’을 의미한다. ‘저절로 그러함’에 어긋나면 그 본성을 잃게 된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본성에 인위적인 행위를 가했을 때, 물은 우리에게 반격을 가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의 자연성을 해치게 되면 반란을 일으킨다. ‘비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편견과 같은 인위적인 관념들을 제거하고 아이들을 바라봐야 한다. 잘못된 인식과 편견은 아이들이 갖고 있는 순수한 자연성을 훼손할 수 있다. 피그말리온과 낙인이론은 그 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개념의 옷’을 입혀 학습자를 그릇된 인식으로 바라보는 잘못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epoche). 그래야만 아이들의 올바른 인성 함양에 힘쓸 수 있다.
자연성을 해치는 순간, 반란이 시작된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사상가 엘렌 케이(Ellen Key)는 “주지주의 교육은 정신적 살인이다. 교육의 비결은 교육하지 않는 데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이들의 자연성에 어긋나는 교육은 인성을 해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노자는 인성 회복을 위한 이상적인 삶으로서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상선약수(上善若水)를 강조했다. 무위자연이란 순수한 자연에 인위적인 가식과 위선의 행위를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다. 상선약수란 가장 으뜸이 되는 선(善)은 물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물은 무위자연적 삶의 모범적 형태이다. 따라서 모든 인위적인 교육은 거부되어야 한다. 합리적 마음계발보다는 스펙을 중시하는 현 사회를 거부하는 몸짓은 장자의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자의 사상, 엄친아·엄친딸을 거부한다 오리 다리와 학 다리는 그 길이가 서로 다르다. 아무리 학 다리 일부를 잘라서 오리 다리에 붙인들 오리와 학이 같아지지 않는다. 장자에게 있어 도(道)란 이것과 저것의 절대 대립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도의 경지에서 보면 ‘너와 나’가 없다. 너와 나를 따지는 순간부터 차별이 생기게 된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의 개성은 모두 다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에 맞춘 똑같은 교육, 한 줄 세우기식의 상대평가에 의한 교육은 개성을 말살시키고 그로 인해 인성은 황폐해져 간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상 세계의 분쟁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 ‘지적 귀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경쟁을 부추기고, 세상의 한 면만을 바라보고 자기 것이 절대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기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동굴에서 벗어나(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어느 것이 더 옳다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장자의 제물(齊物)은 홀리스틱(Holistic) 사유이다. 나와 너의 대립(諍:쟁)을 해소(和:화)하는 것이 홀리스틱인 것이다. 홀리스틱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배려(caring)이다. 서로가 돌봐주는 교육적 행위를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장자는 이상적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좌망(坐忘)과 심제(心制),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제시한다. 좌망(坐忘)과 심제(心制)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일체의 비교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상황을 마음속에서 깨끗이 비워 버려라. 그러면 마음의 동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고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는 동안 마음의 상태는 깨지게 된다. 그러면 병이 든다. 우리 사회는 병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여기서도 힐링(healing), 저기서도 힐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말 한마디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