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풍은 멀어지고 진달래 향기는 초록에 스러진다. 금치산자 같은 사월은 연일 꽃 잔치로 눈을 어지럽히며 뒤돌아보게 한다. 모란꽃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는 사월 열하룻날 오후, 훈풍에 실려 오는 진한 유채향은 황순원의 소나기 속 한 장면인 개울가에서 윤 초시네 증손녀를 기다리는 소년의 두근거림처럼 손을 내민다. 시야를 먼 밭둑 언저리로 옮긴다. 복사꽃의 화려함이 최면을 걸듯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현란한 모습은 며칠 뿐이기에 언제나 붙들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사월 한가운데 섰다. 새로 돋는 나뭇잎마다 반짝이는 연둣빛 햇살은 그리움을 발효시켜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서러운 노래를 부르게 한다. 그래 가지지 못한다면 눈이 짓무르도록 봄을 느끼며, 가슴이 터지도록 봄을 즐기며, 발이 부르트도록 이 봄을 밟아보자. 당장 일 분 후도 어찌 될지 모르고 내일도 내 것이 아닌데 내년 봄을 기약하기에는 너무 멀다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구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삼킨다. 그래서일까 약속을 다 한 벚나무가 꽃비를 내리는 날 나이를 먹지 않는 숨죽인 동심은 방부 처리되지 않은 추억을 꾸역꾸역 밀어 올리며 등을 민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나선다. 산골짜기를 내달려온 봄바람은 빈집 마당을 산새 소리 꽃의 합창으로 점령한 채 적막감을 쓸고 있다.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주황, 파랑, 연하늘 빛의 슬레이트 지붕을 두꺼운 봄으로 칠하고 있다. 핏줄 같은 넝쿨을 보듬은 돌담도 숨을 쉰다. 노화되어 죽은 혈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얽히고설킨 담쟁이 넝쿨은 밑동에서부터 길어 올리는 봄소식을 모세혈관까지 적셔 가냘픈 새잎을 피워 올린다. 생명의 장엄한 숨소리가 살아있음을 경이롭게 한다.
돌돌돌! 겨우내 숨죽인 개울물은 시인이 된다. 햇살 가득 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 봄을 새기며 흐른다. 손발을 담그라고 그다지 차갑지 않다고 속삭인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황톳빛 담채화 들녘을 본다. 삭풍에 푸석거리던 흙도 가슴 단추를 풀어헤쳤다. 통통해져 윤기 자르르한 마늘밭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비단 물결 감동의 극치다. 이 모습을 보여주려고 내한성 작물은 겨우내 숨죽이며 있었나 보다. 이제 들녘은 빈 곳이 아니다. 자운영, 돌미나리, 미나리아재비 등 온갖 초록 생명이 보따리를 풀어 피어오르며 합창을 시작하고 있다. 자연 속 생명의 시계는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음을 알게 한다.
벼 그루터기만 남은 이름 모를 풀이 점령한 빈 논은 염소들의 천국이다. 목줄에 메인 어미 염소는 풀을 뜯으면서도 연방 매에 새끼를 찾지만 그 마음을 아는지 봄 햇살에 흥이 나 제 그림자에 놀라 앞으로 옆으로 뛰고 구르는 천방지축 새끼염소는 봄을 만끽한다.
자그마한 다락 논밭엔 촌부의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앙증맞은 떡잎을 내민 강낭콩이 발돋움하고 있다. 밭 언덕에 지천인 쑥과 쑥부쟁이는 오늘 저녁 밥상에 오를 준비를 한다. 봄은 둠벙에도 한창이다. 무당개구리 한 쌍이 하늘 한 귀퉁이에 구름장을 덥고 고개를 내밀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 생명의 태동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유채밭 사이로 들어선다. 봄바람은 하늘 빈 곳 가장 여린 곳을 헤치고 달려 나와 바람꽃으로 피어나 노란 물결이 된다. 혼자서만 훔치는 두려움일까? 심장은 콩닥거림을 더한다. 마치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마름의 딸 점순이가 소작인의 아들인 나를 보듬고 동백꽃에 파묻히는 기분이다. 숨을 쉴 때마다 진한 향이 어지럼증을 더한다. 서 있는 곳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진한 향기로 위리안치된 유배지다. 이 순간 낙화로 끝내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지라도 노랑 연둣빛 유혹에 물들어 그렇게 살고 싶다. 나만의 노랑 공간에 비취색 하늘과 흰 구름만 미소를 짓고 있다.
사월의 봄 산하는 투명수채화다. 하늘 아래 한 뼘 정도 펼쳐진 야트막한 산은 아래에서부터 번져오는 새순과 산벚나무꽃으로 갓 세수하고 화장한 새색시 같다. ‘구우 구구구~ 꿩 꿔~ㅇ!’ 비둘기 소리 나른함에 묻어나고 앞산 뒷산을 울리는 장끼 소리는 사월의 봄을 더 깊게 한다. 이대로 시간이 정지되어 이 정경을 언제나 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욕심이다. 이 화려한 순간도 이제 끝물이다. 흐드러지게 꽃송이를 매단 벚나무들도 두꺼워지는 봄볕에 아쉬움을 뒤로 한 무리의 바람이 재잘거릴 때마다 꽃비를 내린다.
벚꽃의 낙화! 진달래, 살구꽃, 복사꽃, 유채꽃의 향연도 벚꽃의 추임새가 없었더라면 그 화려함을 더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사한 봄의 초입을 지나 짙은 녹색의 터널로 들어가는 사월의 봄. 이 화려한 군무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싶지만 서투른 글솜씨는 아쉽기만 하다. 봄날 오후, 목련꽃 진지 오래지만 현기증을 일으키는 유채향과 복사꽃 연분홍의 유혹에 선뜻 나선 걸음은 허전함으로 다가온다. 연중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경치, 혼자라서 아쉽고 더 간직하고 싶은 사월의 봄 앞에 속수무책 앓아눕는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사월! 볼 수 있는 눈을 주심에 더욱 감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