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선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역구도에서 ‘세대구도’로 대결 양상이 변했다는 점을 꼽는다. 대한민국의 2030 다수가 보수우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대한민국의 6070 다수가 진보좌파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생각하면 정신이 암담해진다. 차라리 지역구도가 낫지 않았나 싶을 정도의 골치 아픈 갈등이 본격적으로 그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이 논쟁이 유독 골치 아픈 이유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사회구조와 관련이 있다. 구세대와 신세대는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도저히 따로 떨어져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안 보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식세대가 부모세대를 놓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수는 물질적인 측면에 기인한다. 이제 어느덧 일반명사가 돼버린 ‘금수저 논쟁’을 보면 부모세대의 경제적 능력이 자식세대의 ‘등급’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연재에서 여러 차례 말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역동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부모세대의 경제수준이 자식세대로 대물림되는 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리트머스 시험지
수저가 시원치 않다고 자기 부모를 바꿔버리고 싶은 자식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수저 논쟁 안에는 ‘부모 덕 봐서 조금 더 여유롭게 사는 인생도 괜찮았을 것 같은’ 선망의 심리가 아주 조금은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복잡다단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충돌하는 대표적인 계기 중 하나가 결혼이다. 부모의 도움을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 앞에서 모두가 한 번씩은 시험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건네는 물병을 받아들어야 할 것인가? 그 안에 담긴 것이 바닷물인 건 아닐까?
결혼 준비의 가장 큰 오르막으로 손꼽히는 ‘집’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대도시에 살 요량으로 신접살림 꾸미는데 오롯이 자기 힘으로 집을 살 수 있는 결혼적령기 남녀는 현시점에선 없다고 봐도 좋다. 이 시점에서 부모에게 얼마나 도움을 받을 것인가의 질문 앞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은 부모세대가 자식세대에게 가진 심리 혹은 미련과 엮이면서 복잡해진다. 부모세대가 자식세대를 놓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수는 정신적인 측면에 기인한다. 부모세대 상당수는 아직 자식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지금까지 자식들이 자신에게 의지해 왔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자신이 자식들에게 더 많이 의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조금 무리해서라도 자식들이 조금 더 좋은 출발을 하길 원한다. 그래서 곤경에 처해있는 자식세대의 결혼 문제에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깊이 관여한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이름으로.
그들이 건넨 물병 안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집 문제를 위시해 결혼 과정의 부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상황이 펼쳐졌을 때의 대가는 명확하다. 부모에게 물질적으로 의존했던 만큼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부모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해드릴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부모가 집을 해준 뒤 ‘그 집에 자유롭게 들어갈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 자식세대가 어떻게 쉽사리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집이라는 개인적 영역의 방어막이 뚫리는 순간 둘만의 결혼을 지킬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집이 아닌 다른 모든 소재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대가 없는 지원은 없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여전히 자식들이 자신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어엿한 어른이고 결혼까지 했건만 아직도 ‘내 자식’이라는 정체성에서 머물러줬으면 하는 미련이야말로 부모들이 무리해서라도 자식들의 결혼을 지원하는 이유 아닐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남녀 주인공이 모두 비극적으로 죽는 결말로 끝나지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이 드라마가 10대 소년·소녀들의 치기 어린 사랑을 들뜬 마음으로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조차도 예쁜 느낌이 들지 처연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21세기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로미오와 줄리엣’은 온전한 한 편의 비극이 된다. 도저히 부모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두 남녀가 뜻한 바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고 전 세대의 그림자 속에서 죽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이동의 자유가 있고 자기들의 결혼비용을 온전히 댈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굳이 죽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제각각 ‘부모의 자식’으로밖에 살아본 적이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부모 없는 결혼은 그저 일탈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21세기 한국 남녀들의 자화상이다. 누구 하나 ‘귀한 집 공주, 귀한 집 왕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가 각각 로미오고 줄리엣인 세상이다. 이들이 부모세대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를 미워하는 모습까지도 젊은 세대들은 닮아 있다. 결혼 문제로 여기저기서 갈등이 터져 나오는 이 상황이 종식될 때까지만이라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셰익스피어의 ‘5대 비극’으로 편입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면서도 감정처리에는 서투른, 이 전대미문의 세대 갈등은 이제 방금 그 서막이 올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