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업무에 시달려서 여유가 없는데, 어떤 방법으로도 깨우기 어려워 보이는 학생들을 보면 교사도 무기력해지기에 십상이다. 그렇게 학교에 다니다가 졸업한 학생과 얼마 전에 연락돼, 예전 기억을 되살려 본다.
그런 학생들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일까? 송형호 서울 천호중학교 교사의 걸그룹 블로그 운영 학생 이야기는 이미 유명해졌다. 매일 학교에서 무기력하게 자는 학생이 알고 보니 하루 방문객 수천 명, 누적 백만 명이 넘는 팬 블로그 운영자였다는 일화다.
이 정도 재주와 기획력이면 졸업해서 뭐라도 하면서 살 것이다. 다만 그 기획력을 바람직한 곳에 쓰도록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일 것이다. 그런 학생이 ‘불법 성인 사이트’ 운영자가 될지, ‘부가가치와 공익성 높은 사이트’ 관리자가 될지는 교사의 가르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당시 그 학생은 담임교사와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고 자존감을 회복해 이내 블로그 운영을 중단하고 공부해서 전문대 컴퓨터학과 갔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내내 전교 꼴등이었는데 말이다.
우리 교실에도 그런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공부 안 하고 그림만 그리는 아이는 ‘멍청한 아이’가 아니라 ‘그림에 재능이 있는 아이’일 수 있다.
강의식 수업이면 교사가 진도 나가느라 바쁠 텐데, 아이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모둠별로 서로 협동해서 가르쳐주거나 스마트폰을 검색해 답을 찾아가는 방식을 활용해보니 아이들 한 명씩 신경 써줄 여력이 예전보다 늘었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못하는 친구에게 알려주고, 교사는 아이들이 잘하고 있는지 돌아다니면서 격려해준다. 학생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살짝 발판을 마련해준다. 이런 수업이 정착되자, 이전에는 신경 써주지 못하고, 수업 방해하지 말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싶었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필자는 이전에는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들을 깨우지 않았다. 임용시험 합격 전 기간제 교사 시절에 수업 중에 교장이 들어와 자는 학생을 지목해 깨우라고 하는 바람에 그 학생을 혼낸 적이 있다. 알고 보니 부모가 이혼한 후 아버지는 새벽시장 나가시고, 학생은 아침에 못 일어나니까 학교 지각 안 하려고 필사적으로 밤을 새우고 학교에 와서는 잠을 못 이겨 계속 자는 딱한 아이였다. 그 후로 자는 아이들을 함부로 깨우지 않게 됐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교과서도 없이 매일 자는 녀석에게 말을 붙여봤다. 물론 방식은 ‘너 자면 안 돼’라며 이유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래는 당시의 대화를 기록해둔 것이다.
교사 : 친구야, 어제 잘 못 잤어? 학생 : 네. 교사 : 교과서는 어디 있어? 학생 : 옆에 친구가 책 없어졌다고 해서 빌려줬는데요. 저는 어차피 수업 안 들으니까요. 교사 : 뭐하다 늦게 잤어? 학생 : 밤새 그림 그렸어요. 웹툰 연재하거든요. 학교에선 못 그리게 하니까 잠자고, 그릴 시간이 모자라서 밤새도록 그려요. 교사 : 그림 보여줄래? 학생 : 제가 가지고 있던 탭 뺏겨서 못 보여드리는데요. 교사 : 탭은 어쩌다 뺏겼어? 학생 :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그리려고 알람 맞췄는데, 오후 3시에 울린 거예요. 수업 중 알람이 울려서 그 수업 선생 님께 1주일 압수당했어요. 교사 : 아. 정말 아깝네. 시간 잘 맞춰놓지. 타격이 크겠다? 학생 : 집에 가서 그리면 돼요. 교사 : 컴퓨터로 그려? 그럼 샘 휴대폰 빌려줄 테니까 보여줄래? 학생 : 네… 여기요. 교사 : 이건 무슨 그림이야? 학생 : 에반게리온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아스카라는 캐릭터예요. 교사 : 와~! 선생님도 네 나이 때 이거 되게 좋아했었는데, 잘 그리는데? 이거 하면 돈도 받냐? 학생 : 한 장에 3만 원 정도 받아요. 웹툰에 들어갈 그림 그리는 거예요. 교사 : 헐. 대박. 잘 그리는데? (주위 아이들을 둘러보고 자던 학생을 칭찬하며) 여기 얘만큼 재주 가진 학생 있어? (다시 학생과 대화) 그럼 자퇴하고 집에서 편히 그림만 그릴 수도 있을 텐데, 학교는 매일 자면서 무엇 때문에 오는 거야? 학생 : 그래도 졸업장은 필요하다고들 해서요. 교사 : 졸업장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래도 고등학교 교육은 받았다는 걸 말해주는 거 아니야? 그런데 수업 안 듣고 잠만 자는 학생한테 학교에서 졸업장을 줘야 할까? 학생 : 아……. 교사 : 부모님은 네가 이렇게 학교생활 하는 거 인정해 주시니? 대학 갈 생각은 있어? 학생 : 부모님도 인정해 주시고요. 미술 관련된 곳으로 가고 싶긴 한데, 공부를 전혀 안 하니까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교사 : 웹툰에 어울리는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시나리오나 작품과 관련된 배경지식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어야 할 텐데? 학생 : 그래서 시나리오도 따로 공부하고 있어요. 교사 : 다른 시간에도 다 자? 미술 시간에도 자니? 학생 : 미술 시간에는 안자고 그래도 좀 그려요. 교사 : 학교에 힘들게 와서 7교시 내내 자면 학교 오기 참 힘들겠다. 그래도 졸업장을 받았다는 건 뭐라도 배웠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학생 : 네. 교사 : (문학 교과서를 펼치며) 이런 그림들도 그려볼 수 있겠어? 나중에 그림으로 돈 벌고 먹고 살려면 이런 것들도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선생님이 교재 만들려고 하는데 거기 그림도 그려줄 수 있겠어? 그러면 생활기록부에 도 좋게 써주고 대학이나 취직할 때도 유리할 텐데? 학생 : (미소와 함께) 네. 그러면 좋죠. 교사 : 시나리오 따로 배울 것 없이 선생님 시간에 수업 들으면 이게 시나리오 배우는 건데. OO이랑 가장 연관성 높 은 과목이 미술 다음에 문학인 것 같은데? 학생 : 네. 교사 : 게다가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작품과 관련된 배경지식이 많아야 할 텐데. 예를 들면 역사 만화 그리려면 역사 를 알아야 하고. 고등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지식만 가르쳐 주는 거거든. 이 정도 기본은 배웠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게 졸업장이고. 선생님 얘기 알겠어? OO이가 좋은 재주를 가졌는 데,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서 아까워서 그래. 선생님 얘기가 조금 들을 만했니? 학생 : 네. 정말 감사합니다. 교사 : 수업시간에 너무 피곤하면 엎드려 있어도 되는데, 그래도 귀는 열고 있었으면 좋겠다. 알았지? 학생 : 네. |
담임교사에게 물어보니 부모가 모두 노래방 경영을 하고 있어 밤늦게 집에 들어오고, 외동아들이라 거의 집에서 외톨이로 그림만 그리는 학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생 심성이 착하고 그림을 좋아해서 비행의 길로 가진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보니 이 학생이 어떻게 커가나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물어봐 주며 신경을 쓰게 됐다.
이런 일이 있었던 이후 학습 내용을 전체 학생들과 정리할 때 보니 매일 자던 이 학생이 끝까지 깨어서 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 내용은 전기 양식을 빌려 돈을 의인화해서 교훈을 주는 고려 시대 작품인 ‘공방전’이었다. 이 친구는 이후로도 깨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교술 문학(敎述文學)의 특징 수업 하면서 이 학생이 의식되니까 괜히 예를 들 때도 ‘그림, 화가, 만화’ 관련 예들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수업 끝나고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물어봤다.
“교훈을 주려는데 직접 가르쳐주면 재미가 없고 효과가 떨어지니까 가전(假傳)이라는 방식을 썼어요. 흥미나 재미랑 교훈성을 동시에 갖춰야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비교적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는 대답을 했다. 부담을 느낄까 봐 다른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얘기하다가 이 학생 근처까지 와서 보니, 학습활동 1번을 아주 그럴듯하게 잘 써놨다. “와! 정확히 찾아냈는데? 2번은 □□와 관련해서 본문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일단 밑줄 쳐보고 그거 정리해서 써보면 된다”고 하고 한 바퀴 돌고 다시 와보니 학습활동 2번까지 풀고 있었다.
수업 끝나고 나가기 전에 또 뭐가 기억 나냐고 물어보니 기가 막힌 대답을 했다.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작가의 인간성이 좋아야 해요. 작가의 인간성이 좋아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나쁜 생각을 가진 작가가 그린 그림은 안 좋아요.”
학습목표가 ‘작가의 가치관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신기한 경험이라 주위 교사들과 나눠봤다. 필자와의 일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는 없으나, 이후로 이 학생은 지각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1년 후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학생은 위탁교육생으로 직업전문학교에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림을 원 없이 그릴 수 있게 됐다. 그 후 수도권의 예술대학에 진학했으며 학업과 애니메이션 회사 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학생 덕에 다들 어떻게든 자기 밥벌이는 하게 마련이니, 좋은 인성을 갖도록 격려와 따뜻한 관심으로 씨앗을 뿌려 놓으면, 어느새 잘 성장해 있으리라 믿게 됐다.
이 학생 덕에 다들 어떻게든 자기 밥벌이는 하게 마련이니, 좋은 인성을 갖도록 격려와 따뜻한 관심으로 씨앗을 뿌려 놓으면, 어느새 잘 성장해 있으리라 믿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