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먹은 척 현관 앞에 놓고 나갈까?’ 한국을 떠나는 날 운동화 끈을 묶으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또 냅다 버리고 싶은 준비물, 가이드북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첫 대륙인 중남미 편만 챙겨 넣었다. 들으면 알만한 도시들로만 구성되었고 내용 중에 반은 눈곱만큼도 매력적이지 않은 사진들이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드북 이 손에 쥐어져 있으면 녀석에게 의지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들 다 가는 곳에 나만 못 가 본다면 뒤처지고 손해 보는 심정이랄까? 한마디로 가이드북 노예로의 전락이다.
중남미를 여행하며 지나간 곳의 페이지들을 조금씩 찢다 보니 어느새 책은 너덜 너덜해져 있었다. 에콰도르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날 마침내 그놈의 계륵같은 가이드북으로부터 해방! 물론 처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봐야 할지, 어디서 자야 할지 막막했지만 이내 세상의 길은 한국어 가이드북만이 알려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동안 손에 쥔 책이 밝혀 주는 길이 너무나 확고해서 수천수만이나 되는 샛길들을 그냥 지나쳤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대신 유럽 여행에선 틈만 나면 구글을 이용해 정보를 검색했다. 현재의 내 위치와 주변 마을을 중심으로 검색된 사진과 영문 블로그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눈이 번쩍 뜨이는 멋진 사진을 보면 본격적인 위치 추적에 들어갔다. 장소를 알아내는 데는 구글의 ‘이미지로 직접 검색하기’기능이 아주 유용했다. 때론 마을의 인포 메이션 센터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래도 알 수 없을 땐 레스토랑이나 기념품 가게, 심지어 지나가는 주민을 붙잡고 캡처한 사진을 보여주며 그곳을 아는지 묻고 또 물었다. 사방팔방을 헤맨 끝에 사진 속 풍경을 직접 마주했을 때에 느낄 수 있는 그 환희와 자부심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누구나 간 한 길, 그리고 가지 않은 수천의 길
가이드북을 버리고 구글 및 현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위주로 방식을 바꾸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책 저 책에서 이미 한 번씩 다 소개해서 식상하기만 한 ‘나만 알고 싶은 여행지’가 아니라 아직까지 정말 알려지지 않은 곳, 그래서 앞으로도 나만 알고 싶은 숨겨진 여행지들 말이다. 스코틀랜드의 ‘기닝고 성(girnigoe castle)’이 그 랬다. 인터넷으로 보게 된 한 장의 사진에 매료되어 어렵사리 찾은 곳이다. 소리 나는대로 표기하긴 했지만 한국어로 된 정식명칭이 없으니 옳게 쓴 건지 잘 모르겠다. 스코틀랜드 거의 최북단에 위치한 윅 (Wick)이라는 마을의 외곽에 있는 관광지, 아니 이정표 하나 제대로 서 있지 않았던 것 같으니 그냥 폐허가 된 옛 성터 정도 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한참을 헤매다 이쯤인가 싶어 멈춘 곳은 아찔한 해안 낭떠러지 위였다. 차에서 내려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대항하며 끝으로 걸어가자 사진에서 보았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직선으로 가도 되는 길을 굳이 삐뚤빼뚤 돌아가는 이유를 찾은 순간이다. 남들 다 가는 곳에 나만 못 가 봤다는 아쉬움보다 남들 못 와 본 곳에 나만 왔노라는 희열이야말로 자유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무한한 상상력으로 500여 년 전 역사와 마주하는 곳
스코틀랜드 특유의 녹색 잔디로 뒤덮인 절벽 위엔 우리밖에 없었다. 매표소도 없고, 관리인도 없었다. 다만 폐허가 된 성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일러스트 안내판이 하나 서 있을 따름이었다. 평소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그 안내판이 어찌나 반갑고 기특하던지···. 얼핏 보면 수백 수천 년의 거센 바람과 파도에 의해 절묘하게 깎인 기암절벽 같은데 그게 500여 년 전에 세워진 성벽이라 했다. 성곽의 반 이상이 무너져 있었지만 성문을 지키고 선 군사들, 헐레벌떡 손수레를 끌고 달려가는 상인,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식사 중인 귀족 등 성 안의 분주한 사람들의 환영이 선명하게 눈앞에 비쳤다. 환영은 곧 활기찬 웅성거림을 동반하였고 주위를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내 다리를 스쳐 지나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게 다 입구에서 보았던 아기자기한 일러스트 안내판의 힘이지 싶은 생각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무미건조한 소개글이나 하품나는 역사적 사실로만 빼곡히 열거된 형식적인 안내판이 아닌 방문객의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위트 넘치는 안내판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터 자체가 그리 넓은 건 아니었지만 무너져 가는 옛 성을 둘러싼 절벽과 바다를 포함한 주변 경관이 가히 일색이었다. 낯설고도 이국적인 풍경에 빠져 두어 시간이 넘게 성 주위를 맴도는 동안 만난 훼방꾼이라고는 똥 싸는 갈매기와 거센 바람이 전부였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제외하고는 주변이 너무나 조용해서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스러운 유적을 내가 방금 최초로 찾아낸 기분마저 들었다. 이 귀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펜스도, 아슬아슬한 벼랑 끝 다 무너져 가는 현장인데 안전 요원 한 명도 없는 셀프 여행지였지만, 가이드 북엔 없어 나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라 오히려 더 좋았다.
세 단어로 알아보는 스코틀랜드 1. 킬드(kilt) 스코틀랜드에서는 치마입은 남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킬트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으로 무릎길이 정도의 치마와 상의로 이루어져 있다. 타탄이라 불리는 체크무늬 천으로 만들고 주로 세로 방향으로 주름이 잡혀 있다.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이지만 그 역사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16세기경부터 현재의 킬트 모양이 갖추어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킬트 속에는 속옷을 안 입는다는 것! 2. 하기스(haggis) 스코틀랜드에서는 하기스를 먹어 보자. 하기스는 양이나 송아지의 위에 동물 내장을 다지고 갖은 양념과 오트밀을 섞어 익힌 음식으로 스코틀랜드의 전통 음식이다. 하기스는 14세기, 사냥 이후 쉽게 상하는 동물의 내장을 가급적 빨리 조리하여 먹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맛은 순대와 비슷하다. 3. 기닝고 성 가는 길 기닝고 성은 스코틀랜드의 북쪽 끝에 있는 윅 지역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윅 지역으로 가는 직항편은 아직 없다. 에든버러 공항에서 렌터카를 타고 북쪽으로 5시간 정도 이동하거나 에든버러 공항에서 오크니 아일랜드로 1시간여 비행 후 페리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도달할 수 있다. 인천에서 에든버러까지는 런던을 경유(12시간 소요) 하며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는 항공편으로 1시간여가 소요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