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이 정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매우 충직한 하인이 있 었는데 어느 날 죽음을 앞두고 그 하인을 부른다. 그리고는 자신이 죽으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면서 모든 방을 다 보여주 되 작은 다락방 하나는 절대 열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를 한다. 그리고 이 정승은 죽음을 맞는다. 그가 죽고 난 후 하인은 정승의 유언대로 정승의 외동아들에게 모든 방을 하나하나 열어 보여주는데 그 다락방만은 열지 않고 꼭꼭 숨겨둔다. 그러나 이내 그 사실을 알아챈 정승의 아들은 그 마지막 방을 열어달라고 조르게 되고, 죽음을 불사한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결국 다락방의 문을 열어준다. 문을 열자 놀랍게도 그 방에는 금은보화가 아닌 그림 한 점이 걸려있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너무도 아름다운 아가씨. 달빛이 스며든 아가씨의 그림을 보자 정승의 아들은 그 아름다움에 그만 정신을 잃게 된다. 이후 정신을 차린 아들은 그 아가씨가 바다 건너 섬에 사는 ‘황 정승의 아가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이내 아가씨를 만나러 가기 위해 채비를 한다. 하는 수 없이 하인은 수많은 놋그릇을 모아 놋그릇 장수로 꾸미고, 다른 두 명의 하인과 정승의 아들을 데리고 뱃길에 오른다. 바다로 나간 배에서 하인 중 한 명은 놀랍게도 까마귀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까마귀는 앞으로 황 정승의 아가씨가 이 배에 타게 되면 처음엔 갈매기가 될 것이고, 두 번째는 구렁이의 밥이 될 위험에 처할 것이며, 세 번째는 돌로 변한 후 어린 아들의 ‘죽음의 피’를 묻혀야만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다행히 까마귀의 소리를 알아듣는 하인은 까마귀들이 곧이어 내놓은 각각의 위험을 이겨내는 해결책을 함께 듣게 돼 결국 위험에 처한 이들을 모두 구한다는 이야기다.
결혼을 앞둔 여성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황 정승의 아가씨’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황 정승의 아가씨’는 전통적으로 결혼을 앞둔 여자아이들이 갖게 되는 두려움의 실체들을 보여준다. 처음엔 결혼을 앞두고 걱정과 근심으로 우는 갈매기, 두 번째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보이는 구렁이를 만나는 장면이 그 것이다. 특히 구렁이를 물리치는 장면에서 나오는 ‘입쌀과 좁쌀’은 굳이 분석적 시각이 아니더라도 장차 결혼한 여성이 갖게 될 ‘좋고 나쁜 일’ 또는 여성이 노동에서 만나게 될 여러 상황을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 ‘돌이 되는 아가씨’ 부분 과 아들의 피 부분은 우리 문화 속에서 오랜 기다림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돌’과 자식을 통해 그 기다림을 해소하는 과정을 연상시키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이 이야기는 기존의 전래동화들과는 다르게 단편소설 같은 느낌을 준다. 채록의 과정이 만 만치 않고 구전되는 양상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렇게 길고 긴 이야기, 구전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변질과 변형의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황 정승의 아가씨’의 이야기가 놀랍게도 그림형제의 동화에 거의 ‘똑같은’ 내용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충신 요하네스’라는 제목으로 그림동화에 실려 있는 이 동화는 정말 몇 가지 소재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글의 구조·구성·등장인물 등이 매우 흡사하다.
1812년~1815년을 지나 1819년 총 170편의 동화로 개정판이 나온 그림동화는 사실 일제강점기에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때문에 신데렐라·콩쥐팥쥐처럼 같은 류의 이야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야기 구성과 내용까지 똑같은 이야기가 있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두 편의 동화는 놀라울 만큼 똑같다. 그럼 잠시 ‘충신 요하네스’ 를 비교해 가면서 보자.
옛날 어느 나라의 왕에게는 요하네스라는 충신이 있었다. 왕은 연로하여 죽게 되자 이 충신을 불러 자기의 아들을 맡긴다고 말하며 역시 모든 방을 보여주되 나머지 비밀의 방 하나만은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왕자인 아들은 그 나머지 방을 보여 달라고 하고 그 방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려진 그림을 만나게 된다.
그 아가씨는 ‘황 정승의 아가씨’가 아니라 ‘황금궁전의 공주’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그림을 만난 이 정승의 아들과 ‘충신 요하네스’의 왕자가 처음엔 모두 그림에 넋이 나가 기절을 한다는 것이다(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똑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는 것이 더 놀랍다). 그리고 역시 왕자는 공주를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또한 왕 자 일행은 황금을 좋아하는 공주를 유혹하기 위해 금세공 상인으로 꾸민다. ‘황 정승의 아가씨’에서는 놋그릇 상인으로 꾸며 배를 타고, 여기서는 금세공사가 돼 금으로 만든 그릇과 장신구로 배를 채우고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황금궁전의 공주를 데리고 오는 길에 역시 까마귀들의 소리를 듣고 위기에 처하게 된 왕자와 공주를 모두 세 번의 위험에서 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만 우리나라의 전래동화 ‘황 정승의 아가씨’에서는 아가씨가 직접 돌로 변하는 것인데 반해 여기서는 충신 요하네스가 모두를 위험에서 구하고 난 뒤 돌로 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왕자와 공주가 자기 아이들의 피를 뿌리는 희생을 선택한 덕분에 충신 요하네스를 다시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수수께끼 같은 전혀 다른 문화권의 똑같은 이야기
‘충신 요하네스’에서 왕자가 만나게 되는 위험은 약간 다르다. 첫째는 위험하게 날뛰는 말을 죽여야 하는 것, 두 번째는 유황과 송진으로 만들어진 가짜 결혼예복을 재빨리 불 속에 던져야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무도회 중 쓰러진 공주의 오른쪽 가슴에서 피 세 방울을 빨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기표가 ‘말’이다. 말은 원래 남성성을 상징하는 동물이면서 서양 에서는 죽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동양과 달리 시신을 운구하는 동물이 바로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을 죽인다는 것은 죽음을 걷어낸다는 의미이다. 또한 아직은 온전한 남성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이중적 의미를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남성적인 화합물로 보이는 유황을 불에 태운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어찌 보면 상당히 에로틱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가슴에서 세 방울의 피를 빨아내는’ 장면은 충신에게 부과하는 일종의 마지막 성적인 시험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왕자가 충신 요하네스를 잠시 내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살펴볼 존재는 두 동화에 다 같이 등장해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비밀을 전해주는 ‘까마귀’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에서도 보통 죽음의 새, 두려운 새, 흉조로 불리는 불길한 까마귀가 죽음의 징조를 알리고 있는 장면은 두 동화에서 똑같이 등장해 묘한 기시감(旣視感, Dejavu)을 주고 있다.
그나저나 어떻게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가 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물론 180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에 의해 전달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러기엔 이야기의 구조가 너무 정교하고 완벽한 ‘신이담’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크게 설득력이 없다. 하여 튼 재미있는 동화 세상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방’은 아버지의 유언과 연결되는 방으로 보통 아들들이 ‘깨고 나가야 할 아버지’의 존재와도 연결되는데 이 부분은 다른 동화를 다룰 때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