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1970년대 후반, 옛날 일이다. 교직에 있던 나는 어떤 계기에 교육방송국 PD 공채에 지원했다. 어렵게 합격을 하였다. 교장선생님께 사직서를 들고 갔다. 세 시간 훈계를 들었다. 선생의 길을 가기로 한 청년 교사가 교직 버리기를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데에 실망하셨던 것이다. 내가 변명 삼아 말씀드렸다. “교육방송도 사람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순간, 아차! 했다. 이 변명 때문에 다시 한 시간 더 꾸중을 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인격으로 만나 직접 가르치는 일이 선생의 길이다. 그깟 기계와 영상으로 불특정 다수를 간접으로 만나는 일은 진정한 선생의 길과는 근본이 다르다. 그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이 말씀이 아팠다. 훗날 내가 가르치는 자리로 되돌아오기까지 이 말씀이 나를 견인한 면이 많다.
글자 뜻 그대로만 보면, ‘선생(先生)’의 반대는 ‘학생’이 아니라, ‘후생(後生)’이다. ‘선생(先生)’은 먼저 난 사람이라는 뜻이니, 그 반대는 후에 난 사람 즉, ‘후생(後生)’이 맞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태어났으므로 선생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없다. 내면의 성숙으로나 외적인 자격으로나 선생의 선생다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선생(先生)의 ‘생(生)’을 단순히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보지 않고, 상당한 수준의 지각(知覺) 즉, 깨달음을 얻은 경지로 본 사람은 공자인 듯하다. 공자의 시대로부터 인의(仁義)와 예지(禮知)를 인간 발달의 중요한 내용, 요즘 식으로 말하면 생애 발달의 성취기준으로 삼은 데서, ‘선생의 개념’도 발전된 것이었으리라. 즉, 이를 가르칠 수 있는 지각에 도달한 사람을 선생으로 모시고 받들었던 문화가 생겨났으리라.
오늘날 이런 고전적 가치를 고스란히 지닌 선생을 찾기란 어렵다. 그런 걸 고수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평균적 선생관은 고전적이지도 않고, 특별히 포스트모던하지도 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조해 보자. “한국인의 선생관은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 변천되어왔다. 학문의 전수과정에서 형성되는, 교육제도적 측면의 선생이 있는가 하면, 덕망·학식을 갖추어 한 시대의 사표가 될만한 인물을 존칭하는 사회문화적인 측면의 선생이 있다. 전자의 경우, 수많은 인물이 해당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선생의 참모습은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다.”
02
신년 초 페이스북에 P 선생님의 글 하나가 올라왔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내 강의를 수강했던, 세 아이의 엄마이다. 제자라기에는 너무 짧은 인연이지만, 토론과 발표 수업에서 참 진지했던 그녀의 기억이 있다. P 선생님의 글은 다음과 같다.
올해는 학교를 옮깁니다. 저는 다자녀 점수에다, 6학년도 3년을 해서 어지간한 곳은 희망하는 대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집 앞에 있는 학교로 와서, 둘째와 셋째의 손을 잡고 학교에 다니면 참 좋겠습니다. 큰애가 졸업하고 나면 둘째가 3학년부터는 혼자 다니게 되는데, 그리고 막내는 유치원 마친 후, 1·2학년을 다니게 되는데, 그 시간 동안이라도 제가 손잡고 등굣길을 간다면 도란도란 얼마나 정겨울까요. 출산 후 7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맡긴 막내는 엄마 손 잡고 팔짝팔짝 뛰며 얼마나 좋아할까요.
그런데 제 마음 한켠에는 또 다른 아이들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가르친 다문화가정 아이로부터, 3년 전부터 가르치고 있는 탈북가정 아이들까지. 저마다 사연이 많았지요. 저 말고 누구라도 그 아이를 가르칠 수 있었겠지만, 그 아이를 제가 만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번에 학교를 옮기면서, 한 번 더 그 아이들에게 다가간다면,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겁니다. 그런 아이들 가운데는 애타도록 힘겨운 상황도 있어서, 겁이 나는데도요.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제 결정을 받아들여 주길 기도했는데, 막상 남편이 제 뜻대로 하라고 하니, 이제는 제 맘 제 뜻 결정이 쉽지 않네요. 믿음의 걸음 가시는 분들께 부끄러운 글이지만, 제게는 자못 어려운 고민이네요.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빠졌다. 나야말로 가끔 기도를 드리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내 유익을 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P 선생님의 글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이기적 감정으로 결정해 놓고 애써 이성의 논리로 정당화하려 하는 나의 모습들이 여러 곳에서 떠올랐다.
많은 댓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녀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안하는 글들이었다. 주로 선생님들이었다. 고민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 대단하며, 감화를 준다고 했다. 강박감 느끼지 말고 자유롭게 결정하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딱히 어느 쪽으로 하라고 판정해 주는 이는 없었다. 고뇌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보름 후, 페이스북에 P 선생님의 글이 다시 올라왔다.
학교 결정 문제를 함께 고민해주신 분들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원래 근무지라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대로 다니는 것인데도, 아이들과 함께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렵던지요.
집 앞 학교를 희망했다가, 지금 새 근무지 내신서를 바꾸어 제출합니다. 탈북학생들이 많은 학교로 가게 됩니다. 제 내면과 앞으로의 제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쉬움도 걱정도 없진 않지만, 그곳에서 복이 되고 꽃을 피울 수 있길 응원해 주세요.
그녀의 조용하고도 외로운 결정이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도 매양 편하지만은 않았을까. 주변의 걱정에 현실적 두려움이 다가왔을까. 그녀는 자신을 다시 한번 다잡아 추스르며 믿음의 끈을 다잡는다. 며칠 뒤 그녀의 글이 다시 올라왔다.
힘든 학교로 가기로 했다. 들리는 말들은 그 학교가 정말로 힘들다는 것이다. 사명으로 택하라 말씀해주신 분들도(아니, 그렇게 말씀하진 않으셨다. 그분들은 그리 말씀하실 것을 알기에, 그 내밀한 복화술을 나 혼자 들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힘들 거라 하신다. 돌아보면 나는 어쨌든 쉬운 길보다는 좀 더 배우는 길로 가고 싶었다. 열심히 해도 잘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열심히 할 거니까, 잘하고도 싶다. 주님! 제 마음 아시지요. 기도합니다.
03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에 나온다. 나보다 뒤에 난 사람[後生]이지만 두려워할 만하다. 공자의 말씀이다. ‘뒤에 난 사람[後生]’이 ‘앞서 난 사람[先生]’을 넘어설 수 있음을 뜻한다. 선생을 능가하는 제자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P 선생님의 실천 윤리를 따라가기 어렵다. 후생가외(後生可畏)가 내 마음 안에서 맴돌고 간다.
P 선생님의 글에 댓글을 달기가 쉽지 않다. 나의 실천이 빈약하므로 내 육성을 댓글로 올릴 수가 없다. 그러기가 미안했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 <만약 내가(If I can)>로 댓글을 달았다. 이 시가 그런 나의 부끄러움을 간신히 가리어 주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출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누군가의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울새 한 마리,
둥지로 되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onto
his nest,
I shall not live in v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