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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그의 죽은 뼈가 살아있는 식민권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3.1운동 100년 미래교육 100년-교육&사람>

③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3.25~ 1930.5.9)

주체적 근대교육 선구자…한국의 이튼 ‘오산학교’ 설립
학교 운영 위해 세간살이 팔고 제집 기왓장 벗겨 깔아
이광수‧신채호 등 교사로 모시고 김소월‧이중섭 등 배출
졸업생 역사가 그대로 민족운동과 사상‧예술의 배경 돼

 

지폐에 실리는 위인 중 왜 근대 이후의 인물은 없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비록 우리 사회의 역사적 흐름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많을 지라도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의 삶이 한 때의 친일 경력으로 오염되거나 혹은 해방 이후의 좌우 이념 대립 탓으로 그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러나 근대의 여러 뭇별들 속에서도 찬연히 그 빛을 잃지 않는 별은 분명 존재한다. 고개를 들어 근대교육의 성좌를 찾아보면 유달리 빛나는 별 하나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다름 아닌 남강 이승훈이다. 필자는 우리 지폐에 실릴 만한 근대 인물로 남강을 추천하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느끼지 않는다.
 

남강은 신민회 운동(이른바 105인사건) 및 3‧1운동 등으로 모두 세 차례의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서도 가장 늦게 출옥한 이후에도 민립대학기성회 운동 등에 헌신했다. 67년의 생애 동안 민족운동에 줄곧 몸담은 그의 삶에서는 낙담과 주저함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민족운동가로서의 남강의 삶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회고와 기록, 연구가 있으니 새삼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잠시 돌이켜보고 싶은 것은 근대교육사의 맥락 속에서 남강의 의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강은 ‘주체적인 근대교육의 선구자’로서 교육의 ‘명예의 전당’에 자리매김 됨이 마땅하다. 근대교육사에 불멸의 이름으로 우뚝 서 있는 ‘오산학교’를 만들었고, 오산에서 가르친 교사를 그가 모았으며 오산이 배출한 기라성들을 바로 그가 길렀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남강은 교육사에 깊고 큰 족적을 남겼다. 
 

 

오산학교는 굳이 외국의 예를 빗대어 말해보자면 ‘한국의 이튼’이라 불러 모자람이 없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위상이 상당히 퇴색해버린 K모 고교가 왕년에 스스로를 ‘한국의 이튼’으로 자부한 때가 있기도 했는데 그 근거로 내세운 것이 S대 입학생 배출 실적이나 3대 고시 합격생 수 정도라는 점에 그치고 있으니 어쩐지 자평이 낯간지러울 수밖에 없다. 영국의 특권적인 퍼블릭스쿨을 왜 우리 사회의 이상적인 학교의 표준으로 봐야 하는가, 그것은 사회 지배계층의 재생산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튼 건물 벽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2000여 명에 달하는 전사자 명단, 그리고 그것이 입증해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야 말로 이튼을 이튼답게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면, 그런 힘을 가진 학교의 존재를 우리 사회에서도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의 이튼’을 따져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도 이튼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학교가 있을까, 있다. 남강의 오산학교다. 오산의 교사 명단을 일견하기만 해도 거기서 춘원 이광수와 고당 조만식, 다석 유영모를 비롯해 단재 신채호, 벽초 홍명희 등의 빛나는 별들을 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산이 길러낸 이들로 김억, 서춘, 김여제, 백인제, 주기철, 한경직, 김홍일, 함석헌, 홍종인, 김기석, 주기용 뿐 아니라 김소월과 이중섭, 백석, 이기백의 이름에까지 시선이 닿게 되면 한 학교 졸업생의 역사가 그대로 근대 이후 한 민족의 운동과 사상과 종교와 예술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체 이 모든 일을 만들어낸 남강 이승훈이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그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교육자이기는 한 것일까. 그는 이렇다 할 교육사상의 저작을 남긴 적도 없고, 그럴 만한 고매한 학문과 식견의 소유자도 아닐뿐더러, 근대 지식인에게 필수 요건처럼 돼 있는 외국 유학은커녕 학교다운 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으며, 명문가에서 자라 유교적 교양을 익힌 선비조차도 아니었다. 1864년 평안도 정주의 찢어지게 가난한 ‘상놈’ 집에서 태어나 곧바로 조실부모하고 열한 살 나이에 남의 상점에 사환으로 들어가 험난한 삶을 시작한 ‘가난하고 무식한’ 이였다. 
 

어릴 적 그의 이름은 인환이었다. 남다른 성실과 정직함으로 주인의 신뢰를 얻으며 굳센 청년으로 자라난 그에게는 상인으로 대성할 비범함이 엿보이기는 했지만 그를 이끌어주는 선생조차 없었다. 다만 그는 고향 정주의 불행한 혁명아 홍경래의 전설을 듣거나 유기그릇 공장에서 비참하게 일하는 일꾼들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상승시키려는 의지를 스스로 키워나갔다.

 

그는 청년일 때 벌써 조선 최고의 장사꾼이 돼 있었다. 자신의 재력으로 공장도 짓고 먼 일가를 모아 집성촌도 만들고 돈으로 수릉참봉 같은 벼슬도 샀으며, 자제들을 양반으로 만들고자 서당도 꾸렸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평안도 정주 땅의 청년 장사꾼 인환의 머릿속은 여전히 양반 세상이었다.
 

그러던 그의 삶은 44세 되던 해인 1907년, 평양 모란봉에서 도산 안창호가 운집한 조선 군중들을 앞두고 펼친 불같은 연설을 듣고 개벽과도 같은 거듭남의 계기를 맞이한다. 연설을 들은 이후 그는 더 이상 장사꾼 인환이 아니었다. 바로 상투를 자르며 그는 양반이 되겠다는 허망한 꿈을 버렸다. 제 일가를 양반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민중이 억압과 침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이름을 승훈으로 바꾸면서 그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남강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지체 없이 고향 마을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만들었던 서당을 폐하고 강명의숙이라는 신식학교를 세웠으며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한 근대 학교로 오산학교를 창시했다. 이 장면은 전근대적인 유교 교육 문화의 토양과 그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출현한 한 인물에 의해 심어진 근대 교육의 씨앗이 자생적으로 발아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마침내 튼실한 나무로 성장해가는 교육사적 전환의 국면에 다름 아니다. 전근대교육에서 근대교육으로의 이행에 있어 일대 사건이라 평가해야 마땅하다.
 

학교를 세웠으나 신지식을 직접 가르칠 식견은 없었던 그는 그가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저보다 똑똑하고 안목 있는 이를 오산의 교사로 모셨으며 학교 운영을 위해 제 전답을 아낌없이 팔아치웠고, 교실을 짓다 기와가 모자라니 제 집의 기왓장을 벗겨다 깔았으며, 선생을 굶기며 혼자 밥 먹을 수 없다 해서 세간살이까지 팔아치웠다.

 

 

겨울날 오산학교의 부실한 변소에 얼어붙은 똥 무더기가 산처럼 솟아올라 일을 볼 수조차 없게 됐는데 누구 하나 치우는 이 없자 손수 도끼를 들고 그것을 까내느라 온 몸이 똥 투성이가 되면서도 즐거워하던 남강의 모습은 오산의 전설이 됐다. 상놈 출신 남강이 했던 일이란 그런 것이었지만 그것이 단지 변소 청소 이야기로 그쳤겠는가. 오산을 거쳐 간 선생과 학생들은 남강의 그러한 행동과 걸음과 눈빛과 음성과 숨결로부터 나라 사랑과 헌신과 사람됨의 길을 배운 것이다.
 

1920년대에 남강은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을 통해 고등교육 운동에 주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사립각종학교로 묶여 있어 학력도 제대로 인정되지 못하고 졸업생의 상급학교 진학이나 외국 유학에서도 적지 않은 불이익을 강요당한 오산학교를 ‘공인된 교육기관’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를 위해 교사진 구성과 교육과정 등에서 당연히 식민당국의 간섭과 통제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남강은 온갖 논란을 무릅쓰면서도 이 일을 스스로 맡아 열심히 추진했다.

 

일견 타협적인 시도로 보이는 이 노력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배 상황이라는 거대한 현실 속에서 남강은 세속적 비난을 두려워 않고 스스로 민족을 위해 그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주저 없이 실천에 옮겼다. 남강다운 실제적 결단력이었다. 그것이 오산의 역사를 만들어낸 힘이다.
 

그런데 남강도 사람이 아니던가. 그에게 과연 인간으로서의 한계는 없었을까? 다음 일화를 보자. 1930년 그의 생전에 제자들이 교정에 동상을 세우려 했을 때 웬일인지 남강은 그것을 허락했다. “칭찬해 주면 나쁠 것 있느냐? 나는 좋더라. 일본 가서 보니 와세대 대학 뜰에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의 동상이 서 있는 게 좋아 보이더라”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이를 듣고는 그를 가장 잘 알고 존경하던 이가 “선생님, 역시 기운이 떨어지셔서 그런 것 아닙니까”라고 서운함을 담아 솔직하게 말하자 남강은 주저 없이 “그래, 자네 말이 다 옳아”라고 선선히 수긍했다 한다. 역시 이 또한 남강의 인간됨일 것이며 그것으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있었다 해야 할 것이다.
 

동상제막식이 있은 지 며칠 후 남강은 갑자기 협심증으로 쓰러졌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 뼈는 표본으로 만들어 학교에서 사랑하는 학생들에게도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 바란다.”
 

1930년 5월 9일의 일이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으며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경성제대 병원으로 옮겨져 살을 빼고 뼈를 표백해 표본으로 만드는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갑자기 총독부는 이 모두를 강권으로 금지시켜 표본 제작을 저지했다. 남강의 죽은 뼈가 살아있는 식민 권력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이다. 그의 백골은 결국 유리항아리에 담겨 다시 정주로 돌아와 오산의 서쪽 산에 묻혔다.

 

비록 남강의 유언은 실현되지 못했고 아직도 그의 유해는 표본으로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백골 대신 그의 정신이 표본으로 남아 후세의 우리들에게 나지막하나 단호한 소리로 말하고 있지 않을까. 왜 또 다른 오산을, 더 많은 오산을, 더 큰 오산을 만들고 키우지 않는 것이냐 라고.  오성철 서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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