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0년 전만 해도 K팝이란 말은 없었다. 그냥 가요, 혹은 한국대중음악이었다. 작곡가 주영훈이 제작한 댄스그룹 이름이 ‘K팝’이었을 정도다. 그땐 아무도 가요가 ‘외국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 고정관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깨뜨린 사람은 보아다. 이전에도 2인조 그룹 클론이 대만 등에서 한류(韓流)를 일으킨 사례가 있었지만, 보아는 새로운 성공사례를 개척했다. 통상 해외진출이란 건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 난 뒤 그걸 기반으로 한다는 게 통념이었다. 보아는 국내에서 데뷔(2000년)를 하긴 했지만, 일본에서 먼저 인기를 얻었다. 2002년 무렵 보아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역수출’ 됐다. 이것은 한국에서 준비한 가수가 해외시장, 그것도 일본처럼 커다란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비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비는 보아와 함께 한국 가수의 ‘기준’을 올려놓은 인물이다. 비는 ‘한국인은 격렬한 춤과 라이브를 동시에 소화할 수 없을 것’이라는 통념을 깼다. 비 이후부터 소위 ‘아이돌’ 가수도 춤과 노래를 동시에 완벽하게 소화해야 한다는 기준을 요구받았다.
스스로 진화해온 K팝
다음은 동방신기다. 2004년 데뷔해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이듬해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한 번 ‘신인가수’로 데뷔했다. 가수 자체의 역량이 워낙 뛰어난 데다 일본시장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면서 동방신기부터는 한국 가수가 오리콘 차트 정도를 점령하는 건 더 이상 ‘사건’이 아니게 됐다. 문제는 이들이 선배 가수인 H.O.T가 해체하는 원인이 됐던 ‘소속사와의 분쟁’을 답습했다는 점이다. 5인조 동방신기는 2010년 무렵 두 개의 팀(동방신기, JYJ)으로 분할됐다. 이 무렵부터 ‘7년 징크스’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통상 가수와 소속사의 계약기간이 7년으로 설정되는데, 이 7년을 넘기는 인기가수를 찾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빅뱅은 이 징크스를 깨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2006년 데뷔한 빅뱅은 2011년 기존의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와 멤버 전원이 재계약했다. 빅뱅의 사례는 어떤 인기가수가 하나의 소속사와 오래 일할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재계약 이후의 빅뱅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어마어마한 팬덤을 구축했다. 그러면서 엄청난 횟수의 공연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한국 대중들은 국내 기획사에서 ‘상품’으로 기획된 5인조 팀이 세계적인 ‘셀러브리티’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현시점 가장 진화된 형태의 K팝 가수는 물론 방탄소년단(BTS)이다. 뛰어난 춤과 노래, 자작곡 능력, 소속사와의 끈끈한 관계 등 지금까지의 성공사례가 모두 담겨 있다. 그 결과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가수가 한국어로 부른 앨범을 내놓을 때마다 ‘빌보드 1위’를 기록해도 천지가 개벽하지 않고 세상은 멀쩡히 굴러가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새롭고도 어려운 문제
K팝은 이렇게 스스로의 문제를 그때그때 고쳐가면서 천천히 진화해왔다. 문제점이 도출되면 그걸 보완한 팀이 다음으로 나타나는 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새롭고도 어려운 문제가 놓여 있다.
최근 마약 사태로 연예계를 은퇴한 박유천(동방신기/JYJ), 성 접대 논란으로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승리(빅뱅)는 모두 ‘성공한 K팝 스타’ 출신이다. 연예인을 꿈꾸는 모두가 그들처럼 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고, 흘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그들을 부러워할 따름이었다.
박유천과 승리 사태가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사랑해준 대중을 상대로 수많은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유천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됐을 기자회견까지 자처하며 마약을 하지 않았다고 웅변했지만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 스스로 퇴로를 막았다. 이들의 영혼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는 아직도 전부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리 역량이 뛰어나고 큰 성공을 거둔 가수라 하더라도 그들의 인격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은 K팝 시장 전체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인성’이야말로 연예인의 새로운 자질이 돼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건 마치 대한민국의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비슷하다. 경제성장이 가장 중요하며 그 밖의 다른 문제는 나중에 해결해도 된다는 과거의 사고방식은 21세기의 가치관과 격한 충돌을 빚고 있다. 이와 똑같은 문제가 문화산업에서도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승리가 연예계를 은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놓은 노래 ‘셋 셀 테니’의 가사를 보면 ‘어차피 동물이란 생각을 해’라는 구절이 있다. 이 가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묻는다. 이대로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