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의 방. 누군가 작은 문을 통해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조금 가파른 편이며 들어선 이를 자세히 보니 조금 이상한 느낌의 난쟁이다. 키가 작고 대머리인 이 난쟁이는 빨간 코를 가졌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대머리이면서도 하얀 머리카락이 보인다. 난쟁이는 그녀 앞에서 아주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그녀 앞을 빙빙 돌아다닌다. 그렇게 한참 춤을 추던 난쟁이는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난쟁이는 약간 희끗희끗한 회색 또는 반투명의 옷을 입고 있어 속이 비치는 느낌이다. 진료실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한다. 프로이트의 환자는 꿈 얘기를 하며 자신이 어려서 보았던 동화 ‘룸펠슈틸츠헨’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 꿈속에서도 난쟁이는 오두막 앞에 불을 피우고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느낌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잠깐, 지난번에 다뤘던 ‘룸펠슈틸츠헨’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어느 마을의 방앗간 주인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우연히 왕에게 자신의 딸은 짚으로 금실을 자아낼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왕은 이 말을 믿고 딸을 불러 짚으로 가득찬 방에 가둔다. 그리고는 모두 3일 밤에 걸쳐 금실을 자으라고 명하는데 만약
최근 애니메이션 소재로도 간간이 사용되지만 옛 동화 속에 보면 묘한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름 맞추기다. 특히 난쟁이들이 나오는 유럽의 민담, 그림동화 속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대표 작품이 ‘룸펠슈틸츠헨’이다. 작품 내용은 대강 이렇다. 옛날 어느 마을에 방앗간 주인이 있었는데 주인에게 딸이 한 명 있었다. 방앗간 주인은 우연히 왕과 얘기를 나누다 으스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딸이 짚을 자아 금실을 만들 수 있다고 자랑했다. 마침 왕은 유난히 황금을 좋아했던 터라 당장 딸을 데려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딸이 도착하자 짚이 가득 찬 방으로 들여 보냈다. 이어 아침까지 모든 짚을 금으로 만들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딸은 어이없는 아버지의 너스레에 위기에 처하게 되고 눈물로 밤을 새우게 된다. 그때 웬 난쟁이가 들어와 “왜 그리 슬피 우냐”라며 질문한다. 딸은 짚으로 금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를 털어놓는다. 난쟁이는 “자신이 짚을 금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데 그 후 자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 딸은 “내가 가진 목걸이를 주겠다”라고 말했고 난쟁이는 모든 짚을 자아 금으로 만들어 놓는다. 왕은 금으로 가득한 방을 보고 이튿날도 똑
신화 속에는 가끔 근엄하고 멋진 ‘신’과는 다른, 재미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장난을 치고, 신과 인간계를 오가고, 수시로 모습을 바꾸고…. 때로는 선한 역할을 하다 갑자기 죄의식 없이 나쁜 짓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을 우리는 ‘트릭스터(Trickster)’라고 부른다. 쉬운 말로 ‘트릭을 쓰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트릭은 꼼수 또는 묘수, 때로는 장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트릭스터의 대표적 인물, 헤르메스 누가 있을까? 일단 그리스로마 신화의 헤르메스를 보자. 제우스와 요정 사이에서 태어난 이 장난꾸러기는 발에는 날개가 달린 신발을 신고, 여러 마리의 뱀이 꼬인 형상의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게다가 지하 세계의 왕인 하데스가 선물한 ‘순간적으로 모습을 감춰주는’ 모자까지 있다. 결국 있으면서 없는 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자, 있다가 또 없어지는 자 등 ‘트릭스터’의 이미지에 딱 맞는 인물로 묘사된다. 헤르메스와 어울리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복형인 태양의 신 아폴론의 소들을 훔쳐서 구워 먹은 이야기다. 형 몰래 소를 몰아내야 했던 꾀 많은 헤르메스는 소 발자국을 숨기기 위해 소들의 발에 갈대빗자루를 매단다. 그 덕에 소
옛날에 이 정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매우 충직한 하인이 있 었는데 어느 날 죽음을 앞두고 그 하인을 부른다. 그리고는 자신이 죽으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면서 모든 방을 다 보여주 되 작은 다락방 하나는 절대 열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를 한다. 그리고 이 정승은 죽음을 맞는다. 그가 죽고 난 후 하인은 정승의 유언대로 정승의 외동아들에게 모든 방을 하나하나 열어 보여주는데 그 다락방만은 열지 않고 꼭꼭 숨겨둔다. 그러나 이내 그 사실을 알아챈 정승의 아들은 그 마지막 방을 열어달라고 조르게 되고, 죽음을 불사한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결국 다락방의 문을 열어준다. 문을 열자 놀랍게도 그 방에는 금은보화가 아닌 그림 한 점이 걸려있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너무도 아름다운 아가씨. 달빛이 스며든 아가씨의 그림을 보자 정승의 아들은 그 아름다움에 그만 정신을 잃게 된다. 이후 정신을 차린 아들은 그 아가씨가 바다 건너 섬에 사는 ‘황 정승의 아가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이내 아가씨를 만나러 가기 위해 채비를 한다. 하는 수 없이 하인은 수많은 놋그릇을 모아 놋그릇 장수로 꾸미고, 다른 두 명의 하인과 정승의 아들을 데리고
다섯 살의 아이가 아침부터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아이가 읽어달라는 책은 라푼젤. 그날따라 몸이 아픈 할머니는 모로 돌아누워 “그려 나중에 하자”, “그만 하면 됐다” 얘기하는데 아이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이혼 후 집을 나간 어 머니와 돈 벌러 집을 떠난 아버지.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쯤 집을 찾아 아이를 잠시 보고 다시 떠나기를 반복하고, 늙은 몸으로 그나마 아이를 돌보던 할머니는 요즘 들어 자꾸 몸 이 아프다며 드러눕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오늘도 라푼젤을 읽어달라고 조르고 또 조른다. 그리고 그 책은 어제도 여러 번 읽어주었던 바로 그 책이다. 왜 이 아이는 같은 동화책을 계속 읽어달라고 조를까? 왜 이 아이는 같은 동화책을 계속 읽어달라고 조르고 있을까? 왜 할머니가 아플 때는 더 절박하게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걸까? 어느 아동 분석사례에서 나온 이 이야기는 동화가 아이들에게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아이들이 동화 속에서 어떤 환상을 보고 싶어 하는지, 어떤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후에 분석결과를 통해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공포가 전형적인 ‘유기공포’이며,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너
아이들은 왜 그렇게 동물 이야기를 좋아할까? 옛이야기, 전래동화에는 왜 그렇게 동물 이야기가 많이 등장할까? 우선 동물은 사람이 아니면서 살아있는 존재다. 사람처럼 생명을 가졌고 움직이고 때로는 감정과 정서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물은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 받아들이는 감수성의 정도가 다른데 어릴수록 정서적 동일시의 폭이 더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동화 속 동물의 등장에 아이들이 진짜 환호하며 반짝이는 두 눈으로 몰입할 수 있는 진짜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물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 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지만 결코 사람일 수 없다. 즉, 언제든 적당한 거리 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이들이 동화 속 동물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특히 동화에 깊이 빠지는 나이 때의 아이들이 가지는 심리적 불안감, 죄책감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동물이라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본격적인 오이디푸스기에 들어가는 3세부터의 아이들이 드디어 동화의 재미를 알게 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때로는 엄마를 죽이고 싶다거나 아빠를 사라지게 했으면 하는 무의식적 욕망을 품게 된다. 물론 그것은 입 밖으로
전래동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옛이야기 속에는 늘 동물이 나온다. 아예 ‘우화’의 형식으로 동물 자체가 주인공이 돼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야기도 있지만, 전설·민담·전래동화 등 옛이야기에는 교훈과 미담의 동물이 아니라 매우 상징적으로 동물들이 배치 되고 있어 사람의 심리가 동물들에게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살필 수 있는 좋은 모티브가 된다. 동물에게 투영된 ‘낯섦’과 ‘공포’의 심리 일반적으로 동양의 전래동화에는 호랑이와 여우 등이 많이 나오고, 서양의 경우엔 늑대와 개 등이 많이 나온다. 물론 소나 새, 물고기 등의 등장도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보통 서양의 경우는 암소가 많이 나오고, 새 역시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조금 더 자주 확인된다. 그러나 물고기는 우리나라의 ‘잉어공주’, ‘용궁공주’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서양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확인되는 듯하다. 사실 전래동화 등 옛이야기 속의 여러 소재들, 이야깃거리들은 동양과 서양을 일괄적으로 묶어 분석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 이유는 비교 문화적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역사가 다르고 문화적 풍토가 다르고 실제 자연환경에서도 분명한 다름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분석의 잣대로 전래동화 전체를 바라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인에 의한 동화집은 심의린이 편찬한 ‘조선동화대집’이다. 오래도록 채록한 구전 민담과 설화 중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를 묶어 1926년 처음 출간했다. 심의린의 ‘조선동화대집’에는 이전에 나온 조선총독부의 ‘조선동화집’에는 없었던 ‘의좋은 형제’, ‘은혜 갚은 까치’ 등이 처음 등장했으며, ‘형제담’을 다룬 동화도 모두 8편쯤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숫자 ‘3’과 관련된 작품도 눈에 띈다. 노승을 도와 부자가 되는 동생과 욕심으로 망하는 형의 이야기를 다룬 ‘세 개의 보물’과 못된 성질의 두 형과 막내 이야기를 다룬 ‘두 형의 회개’라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두 형의 회개’를 잠깐 들여다보자. 어느 마을에 욕심 많고 괴팍한 성격의 두 형과 마음씨 착한 막내가 살고 있 었다. 막내는 정직하고 욕심이 없었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두 형은 부모님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막내를 내쫓아 버린다. 길을 헤매던 막내는 다친 노승을 발견하고 그를 도와준 뒤 세 개의 선물을 얻게 된다. 자리 한 닢, 바가지 한 짝, 젓가락 한 매가 그것이다. 후에 막내는 이 물건들을 잘 사용하여 부자가 되고 벌을 받아 가난해진 형들을 받아들여 다시 우애롭게 살
아이들의 동화 속에는 유난히 무엇을 먹고 먹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무엇을 잘 못 먹어 동물이 되었다거나, 무엇을 먹고 그 동물 상태를 벗어나는 이야기,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는 마녀와 산 채로 잡혀 먹혔다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 등. 도대체 먹고 먹히는 관계가 무엇이기에 동화 속에는 끊임없이 이 ‘먹는’ 이야기가 등장할까? 우리가 무엇을 ‘먹는다’는 행위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데 우선은 생존이다.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어야 한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이 생존을 위해먹는 행위가 삶의 전부를 좌우할 만큼 절대적이어서 ‘먹는다’는 단어를 ‘살았다’의 동의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숲 속을 헤매던 주인공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엇을 ‘먹었다’, 죽어가던 주인공이 무엇을 ‘먹고’ 삶을 다시 찾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잣대만이 아닌 상징으로서의 삶과 죽음을 의미한다. 또 때로는 어린 시절로의 퇴행과 성숙을 가름하는 잣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는 그것을 통해 자신이 동일시하고자 하는 대상을 체화하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대표
구전 민담과 설화들이 채록되고 묶여 지금의 동화가 되었다면 신화는 조금 다르다. 오래도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해졌다는 전승의 역사는 조금 비슷할 수 있지만, 굳이 동화와 신화로 구분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목적성이다. 누구에게 읽히는가?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이 목적성에 의해 동화와 신화는 매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가능하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물론 이야기의 시작도 다르다. 보통 애써서 역사적 연원을 밝히려는 것이 신화라면 동화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느 시간, 어느 장소를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갖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동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 옛적에, 아주 오랜 옛날에 어느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화를 듣고 읽는 아이들이 겪는 다양한 심리적 불안과 고통,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로 착각하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동화 내용을 자신의 문제로 동일시하는 심리적 역동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진짜 자신이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어느 마을, 어느 아이의 문제라면 성장 과정
옛 동화 속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은근히 많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 비극의 주인공을 빗대 이 표현을 사용하기 전에 이미 옛이야기 속에 수없이 재연, 재현되고 있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을 뿐. 오늘은 그 동화들을 살펴보기 전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내용이 무엇인지 조금 상세히 알아보겠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하면 그저 막연히 아들은 엄마를, 딸은 아빠를 더 좋아한다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게 단순하게 끝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콤플렉스 흐름에 따라 딸이 엄마를, 아들이 아빠를 더 좋아하는 심리성적 변화의 시기가 있는데 이는 아이들의 성장 과정 중 엄마와 아빠 가운데 누구에게 더 강하게 동일시하는가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 이후 프로이트의 제자인 분석심리학자 융은 이를 여아의 경우에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부르기도 했는데 최근의 현대정신분석에서는 용어를 구분치 않고 여아와 남아의 구분을 둘 뿐 그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통칭하고 있다. 이번에는 먼저 라캉의 제자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아르헨티나 출신 나지오의 이론과 정리에 근거해 남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발달 과정을 한 번 들여다보자.
프로이트가 처음 아이들의 성(性)을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의 당혹감은 상상외로 더 컸을 것이다. 무성의 존재, 아니 아예 성 자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슨 금단의 구역을 밟은 것 마냥 쉬쉬 두려워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니 그 놀라움은 더 컸을 것이다. 20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 프로이트는 후에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라는 묶음으로 불리는 논문들을 들고 나와 ‘유아의 성’까지 말한다. 그가 유아의 성에서 핵심으로 다룬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이 개념은 반대되는 성의 부모를 아이들이 따르고 좋아한다는 단선적 의미 외에 동성 부모에 대한 사실상의 적대감과 이성 부모에 대한 심리성적 변화의 측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잠깐 신화를 살펴보자. 오이디푸스 신화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신탁을 받으며 시작된다.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죽일 것이다.” 두려운 라이오스는 양치기를 시켜 아들을 죽이라 명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아기는 코린토스의 왕에게 맡겨져 자란다. 후에 청년이 된 오이디푸스는 역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접하자 바로 집을 떠난다. 길러준 부모를 친부모로 알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던 그는 라이오스의 일행을 만나 시비 끝에 자신의 진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빨간 모자’ 이야기는 17세기 프랑스의 샤를 페로의 ‘작은 빨간 두건(Le Petit Chaperon Rouge, 1697)’과 19세기 독일의 그림 형제가 채록하고 작성한 ‘작은 빨간 모자(Rotkäppchen, 1812)’ 두 가지 판본에서 시작됐다. 샤를 페로는 궁정에서 시를 낭독하고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었다. 이때 청중으로 궁정의 아이들이 참여하는 일도 적지 않아 페로는 어떻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모아서 전달할까 생각하다가 당시 민간에서 구전되는 민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궁정이라는 분위기를 고려해 부드럽게 순화해 이야기를 개작, 재화(再話)했다. 대표적으로 손 본 작품 중 하나가 ‘작은 빨간 두건’이다. 당시 남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 쪽에서는 ‘가짜 할머니(La Finta Nonna)’ 등 할머니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가져와 ‘작은 빨간 두건’으로 만든 것이다. 이 두건은 그냥 모자 하나를 쓴 것이 아니라 우리로 치면 일종의 후드 망토 같은 것이다. 소녀는 사춘기에 막 들어서는 아이지만 여전히 ‘아이다운’ 순진함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가 이 후드 망토다. 그 후 독일에 사는 그림 형제가 첫 동화집
미국의 심리학자 겸 작가인 로렌 슬레이터(Lauren Slater)가 쓴 루비레드라는 심리동화집이 있다. 백설공주의 이름을 원래는 ‘루비레드’로 짓고자 했던 공주의 아버지와 엄마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동화집에는 모두 15편의 창작심리동화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중국의 전족과 신발 이야기가 나온다. 너무도 작고 예뻤던 왕비의 발, 그 발을 사랑하는 왕. 이야기는 메이 왕후로 불리는 엄마의 전족을 당한 발, 늘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악취를 감추기 위해 갖은 향료를 뿌려대던 발 이야기가 나온다. 왕후였던 엄마는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처음 발을 동여매며 전족을 당하고 평생 그 작은 발로 살아간다. 넓은 들판을 마음껏 가로지르던 어린 발은 붕대 속에서 뼈가 부러지고 섬유조직이 끊어지며 여성으로서의 자기 삶 또한 부러진 나무처럼 고정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후에 왕인 아버지를 만나 딸을 낳지만, 엄마는 전족을 하던 서쪽 방이 아닌 북쪽 방으로 딸을 데려간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인 딸의 발은 전족을 당하지 않았지만 결국 자기의 왕국, 자기의 삶터를 떠나 농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가진 것 모두를 잃는 희생을 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껏 나무에 오르고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신화, 전설, 민담, 구전 동화 등에는 인간 심리의 기저를 밝힐 수 있는 비밀과 집단 무의식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야기가 흘러올 수 있는 상당한 이유와 배경이 들어 있다. ‘김정금의 옛날 옛날이야기’에서는 그 비밀들을 한 꺼풀 벗겨볼 것이다.왜 동화 속에는 새엄마와 친엄마의 대립구조가 들어 있는지,여자 아이들의 성공담에는 어째서 간난신고의 고생길이 마치 하나의 ‘과업’처럼 열거되고,남자 아이들이 영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반드시 집을 떠나는 과정이 들어 있는지 등우리 주변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많은 이야기의 비밀들을 열어봄으로써 인간 사회가 면면히 쌓아오고 있는집단 무의식은 무엇이고 어느 부분에서 그것들이 발견되는지, 오늘을 사는 우리 각자의사고와 심리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함께 고민해 볼 것이다. 재투성이 소녀, 고양이 신데렐라, 상드리용(프랑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동화 신데렐라는 전 세계에 다양한 형태의 판본이 존재할 만큼 널리 알려진 대표적 ‘이야기’다. 특히 신발 모티브로 인해 중국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뒷이야기부터 한국의 콩쥐팥쥐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