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진 ‘빨간 모자’ 이야기는 17세기 프랑스의 샤를 페로의 ‘작은 빨간 두건(Le Petit Chaperon Rouge, 1697)’과 19세기 독일의 그림 형제가 채록하고 작성한 ‘작은 빨간 모자(Rotkäppchen, 1812)’ 두 가지 판본에서 시작됐다.
샤를 페로는 궁정에서 시를 낭독하고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었다. 이때 청중으로 궁정의 아이들이 참여하는 일도 적지 않아 페로는 어떻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모아서 전달할까 생각하다가 당시 민간에서 구전되는 민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궁정이라는 분위기를 고려해 부드럽게 순화해 이야기를 개작, 재화(再話)했다.
대표적으로 손 본 작품 중 하나가 ‘작은 빨간 두건’이다. 당시 남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 쪽에서는 ‘가짜 할머니(La Finta Nonna)’ 등 할머니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가져와 ‘작은 빨간 두건’으로 만든 것이다. 이 두건은 그냥 모자 하나를 쓴 것이 아니라 우리로 치면 일종의 후드 망토 같은 것이다. 소녀는 사춘기에 막 들어서는 아이지만 여전히 ‘아이다운’ 순진함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가 이 후드 망토다.
그 후 독일에 사는 그림 형제가 첫 동화집을 내면서 주변의 친구들, 또래의 여성들이나 나이 많은 이야기꾼의 도움을 받아 구전 민담, 이야기들을 모았고, 이 ‘빨간 모자’ 이야기도 수록하게 된다.
빨간 모자 이야기에서 제일 먼저 눈여겨볼 부분은 ‘빨갛다’는 색이다. 후드 망토를 입고 다닐 만큼 아직 ‘어린이’의 티를 벗지 못한 여자아이에게 왜 하필 ‘빨간색’을 입혔을까?
정신분석에서 빨간색은 보통 생동감, 활발함, 싱싱함 또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으로 분석하곤 한다. 붉은 꽃을 보거나 붉은 해, 활활 타는 불 등을 보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까? 대부분 살아 있다, 펄펄 뛰는 무엇, 홀리는 듯한 느낌 등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붉은 피를 쏟는 장면, 타는 듯한 붉은색을 보게 되면 꿈을 꾼 사람은 보통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지만, 꿈 분석 등에서는 이것을 매우 열정적이고 활발한 자기 삶을 꾸려 나가는 모습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붉은색에서 재밌는 것이 바로 살코기(Red Flesh)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도 나오지만, 서양인들의 사고에서 살코기는 싱싱함과 함께 매우 성(性)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단어가 주는 지독히 ‘육감적’인 느낌도 그렇지만 그 붉은색에서 많은 사람이 성적인 기표를 먼저 읽어내기에 그렇다.
동화 ‘빨간 모자’의 붉은색은 이 부분을 생각하고 지어졌음이 분명하다. 이 이야기가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혼란 속에서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가를 각인시키고 강조하는 일종의 경고 또는 잠언의 역할을 한다는 후대 학자들의 설명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옛날 옛적 한마을에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아주 귀여운 아이가 있었습니다. … 빨간 모자 소녀는 매우 착한 아이로 그 아이를 보면 모든 사람이 소녀를 사랑했습니다.”
많은 동화가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여자 주인공, 그중에서도 ‘빨간 모자’의 시작은 이렇게 아이의 빛나는 외모를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또 아이가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착한 아이인 것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동화 속으로 더 들어가 보자. 하루는 어머니가 빨간 모자를 불러 말씀하신다.
“빨간 모자야 산 너머에 사시는 아픈 할머니에게 빵과 포도주를 전해주고 오너라.”
그런데 여기서 어머니의 당부가 이어진다.
“그런데 가다가 길을 놓치거나 다른 곳을 둘러보면 안 된다. 또 다른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라 해도 멈추지 말고 곧장 할머니에게 가야 한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데 빨간 모자의 어머니는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봉우리를 틔우는 사춘기 딸의 상황과 심리, 그리고 그에 따른 세상의 유혹을 이미 알아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한마디로 ‘한눈팔지 마라’는 얘기를 길게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머니의 염려대로 늑대가 나타난다.
늑대는 예쁜 꽃을 보라, 나무를 보라 유혹하고 결국 할머니와 빨간 모자를 잡아먹는다. 말 그대로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그에 따른 응징과 처벌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페로와 그림 형제의 이야기가 달라진다. 프랑스의 페로는 구전되던 민담이라 해도 가능한 잔인한 장면을 각색하고 누락시키며 그대로 전하지를 않았고, 그림 형제는 이런 부분을 비교적 담담히 옮겨놓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빨간 모자에서는 그 양상이 반대로 나타난다.
페로본 동화는 결국 할머니를 잡아먹은 늑대가 빨간 모자마저 잡아먹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반면에 그림 형제는 그렇지 않다. 한 명의 구원자, 사냥꾼을 등장시킨다.
보통 동화 속 사냥꾼은 위기에 빠진 여자 주인공을 구하는 키다리 아저씨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동화에서도 사냥꾼은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와 소녀를 구해내고 결국 소녀의 ‘부활’을 돕는다.
정신분석 연구의 많은 부분에서 이 사냥꾼을 ‘아버지’의 자리에 놓는 경우가 많은데, 크게 틀리지는 않으나 그것을 단순히 생물학적 아버지로 보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다. 오히려 이것은 아버지로 대별되는 ‘질서, 사회, 법’ 등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 ‘아버지의 법(Non-du-Père)’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특히 늑대의 뱃속에서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어둡고 컴컴하며 한 치 앞을 볼 수 없던 어린 빨간 모자라는 ‘아이’가 드디어 세상의 법과 도덕률에 안착하면서 결국 안전지대에 도달하게 되는 ‘소녀’로 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소녀는 한 단계 성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봐야 할 것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숲’이라는 공간이다. 숲은 나무로 가득 찼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 어디서 길이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호한, 그래서 두려운 공간으로 곧잘 그려진다.
실제로 동화 속 ‘숲’은 주인공의 그런 불안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공간이다. 자신의 정체감을 찾아가고 고민하는 주인공, 또 이야기를 듣고 읽는 아이들에게도 미지의 세계인 저 먼 곳, 바깥을 상상하게 하는 중요한 모티프가 바로 ‘숲’이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이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야기를 읽거나 듣고 있는 어린 독자 혹은 청자들이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주인공은 어디로 갈 것인지 등을 함께 느끼며 그 비밀의 공간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간 모자가 그 숲을 지나며 늑대로부터 받은 유혹과 실제 할머니 집에서 있었던 ‘어떤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재밌게도 빨간 모자에는 사춘기 소녀의 심리, 금기에 대한 언급과 함께 또 중요하게 다뤄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이야기도 있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마저 이야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