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교사로 글쓰기 교육에 관심이 많다. 글쓰기는 국어교육의 한 부분이 아니라 마지막 단계라는 철학을 지니고 있다. 국어교육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교육을 간혹 글짓기라고 하기도 하고, 창작과의 차이점을 궁금해 한다. 실제로 과거에 많이 쓰던 표현은 글짓기였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한 교육에서는 여전히 글짓기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글짓기는 그 이름에 행위가 명시되어 있다. 즉 글을 짓는 것이다. 집을 짓고, 옷을 짓 듯이 필요한 대상을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시, 소설, 노래 가사를 만들어낼 때도 짓는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널리 쓰던 표현이다. 그런데 짓는다는 말에 억지로 하는 느낌이 있다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글은 새로 만들어내는 것인데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대안이 글쓰기다. 이 표현은 글짓기가 억지로 한다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고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글쓰기는 창의적인 행위라는 인식이 심어져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 우선 글짓기는 한자어로 작문이라고 한다. 이 작문은 여전히 쓰고 있는 표현이다. 교육과정의 편제에도 빠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글짓기라는 표현이 억지로 지어 내는 것이라
신규 선생님이 수업이 어렵다고 호소한다. 중학교 2학년이 무섭다고 들었는데, 본인은 고등학교 2학년도 무섭다고 한다. 아니 무서운 것은 없는데, 도무지 수업을 들을 자세가 안 되었다고 울먹인다. 그 선생님은 사실 올해 신규 임용으로 교직에 발을 디뎠지만 명문 대학 출신이다. 게다가 어린 나이도 아니다. 기간제 교사 경력이 있고, 두 번 도전에 임용 시험에 합격했다. 즉 만만한 20대의 여교사가 아니라, 30대에 접어드는 선생님이다. 그런데도 수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선생님은 우선 아이들과 수업하기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나누는 일을 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교과서를 펼쳐들고 수업을 시작했다. 마음을 나누지도 않고 다짜고짜로 수업에 뛰어 들어갔다. 그러다보니 처음에 가만히 앉아 있던 아이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떠드는 아이들, 잠자는 아이들,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들이 들어갔다. 처음에 한두 명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수업을 했지만, 이제는 교실이 소란스럽다. 뒤늦게 규율을 잡겠다고 소리쳤지만 게 등에 소금치기다. 그 선생님은 수업이 안 되는 원인을 아이들에서 찾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무섭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근무하는 학교 아이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줄곧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햇수를 따져도 25년을 넘겼다. 오래 한 것으로 치면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동안 국어교육을 제대로 했냐고 하면 마음이 무겁다. 이 시점에 국어교육이란 무엇일까. 답을 찾아본다. 국어교육은 말 그대로 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국가에서 만든 교육과정에 근거하여 국어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일컫는다. 국어의 개념도 찾아갈 필요가 있다. 국어라는 과목이 생긴 것은 1894년 이후 정규 학교 교과서를 편찬하기 시작하면서다. 이후 교육제에서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국어 교과서가 등장했다. 그러다가 다시 일제강점기에서는 국어가 일본어로 대치되고 우리 국어는 조선어 과목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국어는 말 그대로 이해하면 나라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우선 나라의 말이라고 하면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가 걸린다. 우리는 고조선, 그리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가 있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의 말을 국어라고 할지 애매하다. 우리가 써야 하는 국어라는 개념은 나라가 사라지는 나라말이 아니라 온 겨레가 함께 쓰는 말이어야 한다. 이래서 쓰기 시작한 말이 겨레말, 배달말(배달민족이 쓰는
창의지성교육의 방법론으로서 배움중심수업 이야기를 많이 한다. 수업에서 학생들의 자기 생각 만들기 즉 지식 창조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 배움중심수업이다. 배움중심수업에서는 어떻게 지식을 탐구해 나가는가를 배운다. 따라서 수업은 비판적 사고 활동을 통한 배움(자기 생각 만들기)과 나눔(다른 사람과 자기 생각 나누기)의 과정을 전개한다. 이 관점은 학생을 수업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창조하는 주체로 보는 것이다. 배움중심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지식을 만나는 방법 즉 사고력이 중요하다. 사고력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말한다. 흔히 사고력은 많이 언급했지만, 사고력이 어떤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사고력을 키우기 바란다면 사고력의 요소는 무엇인지 정리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학습자가 만나는 사고 작용은 사실적 판단이다. 이는 지식을 그대로 이해하는 수준이다. 따라서 학습자는 개인의 의견보다 지식의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치중한다. 글을 읽을 때도 글 속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내용상의 정보와 구조상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도록 한다. 글을 읽을 때 문단의 중심 내용을 파악하고 글 전체의 중심 내용을 이해하는
“선행학습 부분도 시험에 안 내야 사교육 질서 잡혀”“교과서 외에는 절대로 (시험에) 출제하지 않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위원 전원이 참석한 회의를 주재하면서 한 말이다. 이 자리에서 교육·문화·경제 여러 가지 분야를 세세하게 당부하면서 중·고교 시험에서 교과서 출제 원칙을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박 대통령은 “시험에서 선행학습 부분에 대해서는 내지 않겠다고 하면 실제로 나오지 않아야 된다.”라며 “그래야 사교육 문제에 대해서 질서가 잡히기 때문에 충실하게 지켜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친절한 교과서”를 강조하면서, 전과를 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충실한 교과서를 만들기를 기대한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미 대선 과정에서 사교육비 경감 대책으로 “수능과 논술 시험을 교과서 중심으로 출제해 학교 공부만으로 대학 진학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공약을 강조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140개 국정 과제를 만들 때도 ‘교과과정을 넘는 시험·입시 출제 금지’와 ‘충실한 교과서 제작’ 목록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이번 언급은 그 본격적인 공약 실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번 언급은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교육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선생님을 만난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사랑으로 큰다. 이 땅에서 올곧게 생활하고 있다면 분명히 어린 날 선생님이 훌륭하게 가르쳐주고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장하는데 선생님은 늘 곁에 있었다. 영원히 가슴에 남아서 우리를 뜨겁게 한다. 그래서 선생님의 은혜는 하늘같다. 그러나 급속한 사회 변화로 선생은 존경받는 스승의 이미지가 점점 퇴색되고 있다.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이 물질적 가치에 눌리면서 교사도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직업인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사는 인재를 기르는 사명에는 변함이 없다. 흔들리는 아이들에게 밝은 길을 인도하는 등대 같은 선생님이 필요하다. 특히 오늘날 학교는 위기에 있다고 하는데 그 위기 속에서도 아이들이 멋진 선생님을 만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멋진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일까. 교과 지식에 대한 전문가 교사로서 교과 지식에 대한 전문성을 지녀야 한다. 전문성이란 그가 가르치는 분야에서 발휘하는 높은 수준의 지식을 말한다. 이 문제는 교사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이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교과에 대해 학문적 깊이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학문에 대한 애정도 있어야 한다. 애정이 있어야 끊
작년에 이규혁 교수의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를 감명 깊게 읽었다. 특히 수업을 비평의 대상으로 확대 고찰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즉 교사의 수업 행위는 과학성의 측면과 예술성의 측면이 동시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과학성의 측면은 다 알려진 것이고, 예술성의 측면으로 연극을 거론했다. 수업 비평은 연극 비평과 유사성이 높을 것이라는 잠재적 제안을 했다. 연극의 속성은 대본이 있고, 감독, 배우 관객이 있다. 마찬가지다. 수업도 학습지도안을 가지고 수업에 임한다. 그리고 연극은 직접성이 강한 공연 예술이다. 특히 배우와 관객의 상호 작용에 따라 공연의 질이 달라진다. 수업도 교사와 학생의 원만한 교류에 의해 성과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수업 비평을 연극 비평으로 제안한 것은 탁월한 고찰이다. 복도를 지나면서 웃음이 넘치는 교실 장면을 자주 보았다. 웃음뿐이 아니다. 복도까지 들리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따뜻함과 함께 깊은 믿음이 있었다. 중국어를 가르치는 안소영 선생님 수업이었다. 그래서 늘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수업 참관을 하겠다고 하니 기꺼이 허락을 해주었다. 수업은 과학적 측면과 예술적 측면이 동시에 보였다. 도입 단계에서 지난 시간의 수업 내
결혼반지를 아직도 끼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아내를 사랑한다느니 금실이 좋다느니 한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반지를 끼는 이유로는 아니다. 서랍 속에 굴러다니는 것이 아까워 끼고 다닌다. 시계도 마찬가지다. 유행도 지났고, 황금색 도금이 예물 시계 티가 난다. 늙수그레한 주제에 이제 막 결혼한 신랑 분위기를 내는 꼴이다. 그런데 특별히 차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유행으로 치면 반지나 시계는 멋대가리가 없다. 황금색은 누렇게 변했고, 모양새도 곰팡스럽다. 한눈으로 봐도 오래된 결혼 예물 같다. 하지만 이것이 멀쩡한데 버릴 수도 없다. 옷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몇 년 입으면 닳지 않아도 바꿨는데 요즘은 한번 선택하면 제법 오래 입는다. 집안 살림살이도 시기를 미루다가 진짜 탈이 나면 바꾸고 있다. 이를 두고 검소하다고 칭찬한다.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과거와 다른 삶의 방식이 생겼다. 새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습관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누구보다도 새것을 좋아했다. 명절 때 신발을 사면 이상한 냄새가 좋아서 며칠간은 머리맡에 두고 잤다. 학기가 시작할 때 학용품을 새로 사면 부자가 부
교사들의 고민 중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 수업을 할 수 있을까’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학습능력을 극대화하는 방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특히 최근에는 이러한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교직 경력이 제법 오래된 사람들도 학생들의 학습지도를 어려워하며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노력의 일환으로 교사들이 많이 택하는 방법은 연수 참여다. 교육청 단위의 연수에 직접 참여해 수업 관련 기술을 공부한다. 그 다음이 교수 학습 이론서를 읽는 것이다. 속칭 자율 연수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교내에서 선생님들과 수업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기타 컨설팅에 참여한다. 그러나 교사들이 노력하는 만큼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다. 이유는 효과적인 학습 지도가 교사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수업은 교사의 가르침과 함께 학습자의 관심과 노력이 더 중요하다. 학습자가 교수 학습 과정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참여했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진다. 교사들의 수업 기술 찾기는 결국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적극적인 학습 태도를 가질까'로 모아진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이런 측면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는데, 그 중에 유머 있는 수업을 권해 본다. 이
국내 대학이 평가 순위에 집착하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순위에 의해 대학의 위상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들은 좋은 순위에 들기 위해 대학 시스템을 정비하고, 평가 요소에 집중 투자한다. 실제로 순위 평가 후에 대학들은 교수 논문 발표 수가 늘고, 대외적인 양적 팽창을 한다. 아울러 순위 평가는 대학의 투자를 북돋우고, 질적 개선을 위한 동력이 되기도 해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많다. 대학이 좋은 순위에 들기 위해 장학생 및 졸업생 취업률을 부풀리고, 교수 충원율까지 속인 경우도 있다. 실속은 없고, 몸집만 불리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학들이 평가 순위보다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미래 순위에 집착하고 있다. 대학마다 미래 비전과 목표를 발표하면서 순위권을 스스로 정해 발표하고 있다. 엊그제도 전문대학이 같은 재단의 대학과 통합하면서 교명 변경식을 가졌다. 이 대학은 전문대학과 동일 재단의 4년제 대학과 통합해서 연륜이 있다고 말하지만, 대중은 거의 처음 들어보는 대학이다. 이제 막 발을 디딘 대학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대학이 2020년에 국내 20대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작년에 교명을 변경한 사립
우리나라 학위제도는 고등교육법과 동법시행령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학위의 종류는 학사 ·석사 ·박사 ·명예박사의 4종으로 되어 있다. 이 중 학사학위는 4년제 대학(교) 졸업자에게 수여되며 논문 제출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는 학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논문을 제출한다. 학위 논문은 곧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학위논문은 학문상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는 글이다. 당연히 자신만의 독특한 업적이 기록되어야 한다. 남의 업적을 몰래 가져오거나 흉내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대학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선정된 심사위원을 구성하여 논문 심사를 까다롭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남의 논문을 자기 것처럼 쓰는 경우가 많다. 이를 표절(剽竊)이라고 한다. 논문 표절은 다른 사람이 쓴 학술논문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직접 베끼는 경우다. 연구 결과를 모방하면서,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산물인 것처럼 공표한다. 또는 인용 등을 하면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자신의 것처럼 기술하는 경우도 많다. 학문적 업적은 독창성이 생명이기 때문에, 표절은 엄격히 말하면 도둑질과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논문 표절이 문제되기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따돌림으로 어린 아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관계 당국은 예방책을 내놓고, 전문가들도 대안을 제시했지만, 안타까운 일이 계속 일어난다. 이런 가운데 우연히 존중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에는 존중 교육을 통해 학교 폭력을 줄이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외국의 사례인데 공감이 간다. 소개하면 이렇다. 10대들은 약한 친구들을 괴롭혀 권력을 얻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끼리는 공격적인 아이가 영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스스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 무리로부터 존중받기 위해 친구 가운데 먹잇감을 찾아내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존중받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므로 그보다 더한 자극을 추구하는 등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결론이다. 이 연구에 대해 따돌림이 주는 상처로부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존엄성 교육 프로그램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실제로 10대들은 치열한 경쟁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아이가 진정으로 잘 되기를 원한다면 존중의 귀중한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외국의 사례이지만 우리나라와 비슷
며칠 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마광수 교수가 자신의 저서를 강매했다는 뉴스의 중심에 올랐다. 보도에 의하면, 마 교수는 올 1학기 수업계획서에 수강생은 자기 저서 구입 영수증을 붙여야 한다는 공지를 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중간시험 대체 리포트로 저서에 대한 독후감을 요구하면서 책을 구입한 영수증을 첨부해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마 교수는 또 다른 자신의 수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공지했다. 영수증 제출 대상인 책 목록은 대신 다른 책으로 했다.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영수증이 첨부되지 않은 리포트에 대해선 무효 처리한다고 명시했다. 사실상 학점을 주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은 수강생들이었다. 학생들은 교수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책 강매’나 다름없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이를 비판하듯 대학 커뮤니티에는 서점에서 카드로 결제해 영수증을 받은 후 바로 취소하면 된다는 등의 대처 요령까지 올랐다고 한다.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교수의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다. 자신의 저서를 판매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나가서 교수가 책장사를 해 인세를 받기 위한 수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논란이 거세지지 마 교
수석교사 업무 수행을 위해 선생님들에게 수업을 공개하라고 주문을 한다. 이제 수업을 잘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내 수업을 보여주는 시대라고 역설하고 다닌다. 수업을 잘하기 위해서, 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업을 공개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이댄다. 맞는 이야기다. 교사는 좁은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서 공개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그 중에 들리는 핑계가 보여줘야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수업을 보는 사람들이 교사의 목소리가 어떻고, 옷차림이 어떻고, 교실이 지저분하다는 등 수업 외적인 것만 지적하고 정작 필요한 것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즉 우리는 수업을 보겠다 하지만, 무엇을 보겠다는 준비는 안 하고 있지 않나. 나도 마찬가지다. 신규 선생님께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수업 참관을 했다. 선생님을 볼까. 아이들을 볼까. 선생님을 보면 무엇을 보아야 하나. 아이들을 보면 어떤 면을 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휘적거리며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 외적인 것은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가정 먼저 선생님의 옷차림이 보인다. 봄빛 블라우스가 눈에 들어온다. 4월인데도 교실 밖은 강풍이 분다. 봄빛도 저 남녘에만 머물러 있다. 그런데 교실은
학교 교육은 어떠한 기본 방향과 목표를 지향할 것인가를 구상하고 계획할 때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교육과정이다. 지금까지 교육과정 편성은 거의 전적으로 국가 수준에서 결정되어 왔다.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는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왔다. 하지만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은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할지라도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각 학교가 처한 위치나 환경, 지역 사회의 특성, 학생들의 성향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앙에서 만든 교육과정은 전국의 학교가 같은 목표 아래, 같은 내용을 가르치기 때문에 획일화되는 문제점도 있다. 다행히 최근 교육과정은 국가 수준의 공통성과 함께 지역, 학교, 개인 수준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제6차 교육과정 이후부터는 국가 기준과 시․도교육청의 지침에 근거하여 지역의 특수성과 학교 여건에 맞게 학교 교육과정을 개발 운영하도록 하였다. 특히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에 대한 권한이 단위학교로 많이 이양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교육과정 재구성이라는 말이 많이 들린다. 학교에서 교육과정 재구성이라 함은 국가수준 교육과정 또는 지역 교육과정 그리고 학교 교육과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