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선생님, 방학이라서 선생님이 보고싶어요. 방학이 빨리 끝나도 선생님을 얼마 볼 수가 없잖아요. 선생님이 우리 분교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사랑해요. 2학년 정나라 올림' '선생님, 저는 진우예요. 방학동안 잘 계세요? 저는 잘 있어요. 그런데요. 선생님, 편지를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 선생님, 사랑해요. 1학년 김진우 올림' '선생님, 저는 서효예요. 오늘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통화를 했지요? 그때 저는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한말은 거의 예예 뿐이죠...선생님, 사랑해요! 1학년 한서효 올림' 20년 넘게 고학년을 가르치며 방학이면 받은 편지가 많았지만 이번 겨울방학처럼 나를 감동시킨 편지는 없었습니다. 이제 한글을 께우친 1학년 아이들이 띄어쓰기와 받아쓰기를 틀리지 않고 편지를 쓴 것도 기특하고 편지 겉봉투 쓰기, 우표를 붙여서 보낸 것도 여간 대견했습니다. 방학에 선생님께 편지를 쓰게 했을 부모님들의 가정 교육의 힘이 더 컸다는 사실에도 감동을 했습니다. 진실한 말은 단순하고 어렵지 않으며 진솔하기에 몇 글자 안 되는 문장만으로도 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고 말았답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20일이 지났습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 첫날의 순간을 다짐하던 일들도 잊혀진 지 몇 해가 가고 언제부터인지 새해가 주는 감동이나 설렘보다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새해가 되었어도 진실 공방에 휩싸여 진실과 사실 사이에서 조작과 갈등, 자성과 발전의 목소리들에게 연일 귀를 시끄럽게 열어 둔 탓에 영혼이 맑지 못했습니다. 엄밀히 따진다면 성장과 발전, 과정보다는 결과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가치에 몰입하며 느림의 미학을 소홀히 해 온 우리 교육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 남의 탓만 하는 논리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으니 언제든지 재발할 수밖에 없음을 깊이 인식하고 이제부터라도 도덕교육을, 진실과 성실로 돌아가는 일에 우리 사회의 정신적 어른들이 선생님들이, 어버이들이 나서야 함을 생각합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외침으로 시달림을 받으며 이제야 겨우 가난을 면하고 자존감을 찾는 일에 너무 서두른 탓이며, 빨리빨리 성과를 요구하는 익숙한 삶의 습관이 가치 혼란까지 잉태했던 결과였음을 아프게 시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이 서로 잘못했다고 싸움질하기보다는 먼저 불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니 교사로서 어제 이루어진 '황우석 교수 기자회견'은 당연히 관심사이며 개인적으로도 관심사였기에 월드컵 축구 경기를 기다리듯, 그러나 침통한 마음으로 회견 내용을 다 보았습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가상공간의 기사들을 찾아 행간을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발견한 소식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독일 슈피겔지는 조작이 아닌 오류'로 보도했다는 내용 앞에서 단어의 의미가 눈에 걸렸습니다. 조작인가, 오류인가?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조작으로 보는 것과 오류로 보는 시각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국어 사전적 의미로 조작(造作)이란, '무슨 일을 지어내거나 꾸며 냄'이고 오류(誤謬)는 '그릇되다 속이다, 잘못'이라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과학적 소양이 부족하니 깊이 말할 자격은 없지만, 이번 일을 조작으로 보는 것과 오류(잘못)로 보는 것에는 엄청난 시각차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제 짧은 소견으로는 조작에는 범죄적인 느낌이 강하고, 오류에는 실수나 고의성이 덜 느껴지는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다수 언론들은 하나같이 조작으로 보도하는 사안을 먼 나라에서는 오류로 보는 시각의
리포터인 저는 요즈음, 극심한 가치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이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하고 어느 직업에서건 정체성 확립이 문제이며,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적인 현실. 거기다가 컴퓨터의 발달은 가상 공간에서 자기를 숨기고 활자로 얼마든지 '정신적 살인'을 하고도 유유히 거리를 활보하는 이중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학교와 가정에서 오랜 시간 공들여 '교육'하고 '학습'해 온 본질적인 가치와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도전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더 이상 지식은 학교 교육의 전유물이 아니며 면벽수도하며 직관과 통찰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배움의 자세보다, 손쉽게 접하는 정보와 남의 것을 내 것인 양 가져다 쓰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나 수치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지적 양심'의 부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면신문과 가상공간에서 연일 터지는 '황우석 사태'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조용한 '교육계'의 모습이 리포터인 저에게는 매우 신기한 현상으로 보여서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진실 규명의 작업'이 벌어지고 있으니 교육계는 조용히 기다렸다가 모든 결과를 종합해서 평가적 위치에서 교육 현장에
"엄마, 00 옷 가게에서 50% 세일하는데요." "그래서?" "이쁜 옷 봐 둔 거 있는데, 하나만 사 주시면 안 돼요?" "아이고, 옷 속에 파묻혀 살겠다. 속사람이 비면 겉치장에 신경쓴단다." "엄마, 제발 한 번만...." 딸아이의 애교 전략에 내가 또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도 작은 기념품 하나 해준다고 마트에 데려갔는데 글쎄 목걸이 값으로 상당히 지출했기 때문에 녀석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는데 통제가 안 됩니다. 대학 졸업반인 딸아이는 1월에 공무원 발령을 받을 거라며 기념으로 옷을 사달랍니다. 날마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며 옷을 물색하는 모습을 못 본 체 했는데... 여자 아이 아니랄까봐 얼굴에 너무 신경을 쓰더니 뾰루지로 피부과에 다니는 것도 만만찮은 경비를 들이더니 이제는 옷타령입니다. 그래도 고생해서 공부한 결과가 있어 제 밥값은 해놓은 아이이니 못 이긴 척 소원을 들어줄 생각으로, "그래. 딱 하나만 사준다. 오늘 몇 시에 강의 끝나지? 엄마 마음 변하기 전에 일찍 들어와라." "우와, 엄마가 역시 최고다! 앞으로는 제가 벌어서 사 입을 게요. 엄마, 고맙습니다." 즐거운 표정으로 계절 학기 공부를 나가는 딸아이의 발걸음이 통통
- 이 글은 2005년 2월 설날에 본 영화, '말아톤'의 감상문입니다. 부모와 자녀들에게 한 번쯤은 꼭 보았으면 하는, 다시 보고 싶은 영화라서 남겨둔 감상문을 올립니다.- 겨울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오니 이제야 살맛이 난다. 긴 겨울 방학 동안 개인적으로 준비해 온 시험을 치르느라 전문 서적에 얽매어 수 천 페이지의 문자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래도 공부하는 그 시간만은 시간이 정지 한 듯 젊음의 그날로 되돌아 간 듯하여 참 기뻤다. 책상 앞에서 두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들락거렸지만 정신만은 세수를 한 듯 가볍다. ‘교육’ 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과 잡지, 전문 서적의 숲을 드나들며 작가들의 사상과 목소리와 향기를 마신 겨울 방학 덕분에 20여 년 동안 제대로 갈지 못하고 달려온 무디어진 칼날을 다시 세우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다. 잠시 수험생이 되어 도전을 마치고 한가한 마음으로 설을 맞았다. 양가 어르신이 모두 생존하지 않으시니 허전하고 서글펐다. 친척, 조카들과 어울리면서도 가신 분들에 대한 그리움,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 내 몫의 삶이 어설프게 다가서서 시간이 참 더디게 갔다. 그런 허전한 공간을 채우려고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으로 위로를 받고
-학문의 즐거움을 주는 조선인들의 공부 이야기- 다시 2006년이 시작되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공부의 근본은 책에서 비롯된다. 새 책으로, 참고 서적으로 각종 도서로 시작된다. 다양한 매체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종이 책의 중요성과 효용성을 능가하는 도구는 없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유교 문화와 선비 정신의 나라 조선이 이룬 학문적 업적은 지대하다.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성군 세종대왕은 한 권의 책을 1100번 읽었다고 한다. 책을 사랑함이 지극하셨으니 문리를 터득하고 사색하여 번득이는 창의성이 발달했음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를 아꼈으니 훌륭한 인재들이 행복하게 연구할 수 있는 토양이 비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니, 그들이 쏟은 씨앗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새 학기를 준비하며 조상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찾아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줄 목적으로 /김건우/도원미디어/을 샀었다. 이 책에는 세종과 정조를 비롯해 학자들의 공부, 여성들의 공부, 중인과 평민들의 공부까지 기술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1100번 읽었다는 세종 임금의 학문 사랑과 책에 대한 애정은 사람의 경지를 능가한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밥을 먹는
2006년 1월 2일. 방학을 맞은 지 첫날입니다. 아이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빈 교정엔 찬 바람이 일고 낯익은 까치 소리만 들립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아이들 목소리들, "안녕하세요" 선생님!"하며 교실문을 들어설 것 같은 착각에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빈 학교를 새들과 함께 지키는 하루는 어느 때보다 해가 깁니다. 시원스레 옷을 벗은 벚나무들은 겨울 바람에 맞춰 휘파람을 불며 겨울을 만끽하고 서서 가끔 찾아오는 까치들과 새봄을 약속합니다. 벌써부터 양지 바른 화단엔 민들레가 꽃을 피우고 꽃씨를 날리는 모습을 선보이며 아이들보다 먼저 봄을 안고 서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내 마음엔 아직도 2005년의 잔영들이 더 많이 남아 있나 봅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바빠서 기사조차 내보내지 못한 학년말을 보내고 이제야 이 곳에 들러 리포터로서 숙제를 합니다. 작은 칠판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미주알고주알 써 놓고 간 사랑의 언어들이 혼자 있는 나를 달래고 있답니다. 내 얼굴보고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던 꼬맹이들이 나 몰래 숨어서 써 놓고 간 카드며 낙서(?)들이 겨울방학 내내 교실을 지켜 주며 주인 노릇을 하겠지요? "선생님, 사랑
아이들이 오지 않는 교정을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민들레 한 송이가 내 발길을 붙잡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도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며 웅크린 채 꽃대를 올린 앉은뱅이 민들레꽃 한 송이, 그 옆에는 언제 꽃을 피웠는지 벌써 씨방을 날려보낼 준비를 하고서 둥근 공처럼 부푼 민들레 홀씨들이 바람만 더 불면 멀리 날아갈 채비를 하고 서 있었습니다. 계절에 약한 것은 아마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한 순간도 단절과 포기를 생각하지 않으며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는 질긴 생명력에 감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연의 소리는 한 순간도 뒤돌아봄을 허락하지 않음을 새삼 깨달으며 서 있는 이 자리에 연연해서 새해가 오는 것도 반기지 못하고 옮겨갈 학교 걱정에 뒤치락거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즐거이,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가야 할텐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경력이 많아질수록 커지는 두려움을 감출 수 없으니 아직도 철이 덜 든 탓인가 봅니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아름다운 이 곳도 오래 머물면 나태해지리라 생각하며 기꺼이 자리를 내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정을 들이고 공을 들인 3년의 분교 생활이 짧은 겨울 해만큼
오늘은 온 세상이 하얀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사택 창문을 열고 눈꽃 세상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느낌도 잠시, 아이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이 눈 속에 학교에 오라고 해야 하나, 집에서 쉬라고 해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는 데 학교에서 가장 먼곳에 사는 피아골 마을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아랫 동네에서 학교에 갈 수 있는지 전화가 오는 데 어쩌지요?" "글쎄요. 내려 오실 수 있으세요? 피아골이 가장 힘들텐데요." "이 정도라면 내려갈 수 있겠습니다. " 다행히 아이들은 학교에 거의 다 왔고 한, 두 명만 감기를 앓고 있으니 집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교 시간이 되니 그친 것 같던 눈이 계속 오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을 보니 군내버스마저 끊길 것 같아 점심 식사를 일찍 마치고 서둘러 아이들을 내려 보내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피아골에는 버스마저 올라가지 못 하게 되어서 걱정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피아골 친구들은 걸어서 가면 되요. 선생님. 30분이면 충분합니다." 4학년 미영이가 대수롭다는 듯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3.5km의 거리를 아이들 걸음으로 그것도 눈 속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인데 1시간 반은 족히 걸릴 것인데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났습
오늘은 한교닷컴의 리포터로서 최고의 행복을 누린 날입니다. 이 곳에 올린 교단의 일상과 책 이야기와 교단칼럼이 주류를 이룬 원고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단의 이야기를, 될 수 있으면 밝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며 아이들의 예쁜 모습과 선생님들의 진정성을 조금이나마 알리기 위해 서툰 필력에 힘을 주어 쓰고자 노력했던 지난 4개월 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가난한 내 그릇" (웹진에세이 출간). 교단 경력이 높아질수록 내가 가진 그릇이 얼마나 초라하고 가난한 그릇이었는지를 절감하는 탓에 책 제목마저도 그렇게 뽑았습니다. 아이들이 던지는 한마디에 감동하고 함께 웃던 일들이, 작은 아픔들을 혼자 삭이지 못하고 내뱉은 언어들이 이제는 내 울타리를 떠나 세상 속으로 날갯짓하고 떠났습니다. 이제 그 글들은 더 이상 내 언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가난한 내 영혼의 그릇을 채워주는 보물입니다. 그 보물들의 이야기를 남기지 않는 것은 참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부족한 글이지만 한 순간 깜빡이다 사라지는 기사로 둘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남긴 이야기들이 먼 후일 아이들의 사진첩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아이
오늘 아침에는 까치가 울었습니다. 날마다 눈 속에 출퇴근 하느라 힘들어하는 선생님들도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 들어와서 현관 앞에 오니 못 보던 상자 하나가 나를 반깁니다. "선생님! 나눠 드십시오. 진호 아빠가" 작은 쪽지를 끼워 둔 귤 한 상자가 이른 아침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말에 아이들이 있는 장모님 댁에 들르시며 학교와 집에 똑같은 귤 한 상자를 선물한 진호, 진이, 진아 아버지인 정대용씨. 나는 그 분을 우리 학교의 우렁각시라고 부릅니다. 늘 몰래 아무도 안 볼 때 말없이 소문내지 않고 즐겁게 해 주시는 학부형이기 때문입니다. 저 귤 한 상자이면 우리 분교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며칠 동안 귀한 간식으로 충분합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그 역설을 이 산골분교에서만큼 많이 누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많은 학부모님들이 사는 곳이라서 요새같은 폭설에도 우리 분교의 동네엔 눈때문에 피해를 받은 곳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따스한 온기로 세상을 녹이고도 남는 훈훈한 사랑을 간직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산을 이룬 덕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얼마후면 겨울방학을 맞이할 분교는 적막에 쌓입니다
12월 17일 오전 9시 30분. 산골분교에는 아침부터 동네 어르신들이 눈길에도 불구하고 학교로 나오셨습니다. 우리 분교에 손자와 손녀를 보내고 계신 학부모님들입니다. 가정 사정으로 아들 대신, 딸 대신 손자들을 돌보아 주시는 고마운 분들입니다. '생일잔치 작은음악회'를 선보이는 이날은 며칠째 눈이 와서 등교하는 아이들도 출퇴근하는 선생님들도 고생하면서도 행사를 위해 날마다 가꾼 실력을 뽐내는 준비로 바빴습니다. 유치원 학부모님들이 준비한 음식, 유치원 동생들의 단체 생일 잔치에 초대된 초등학생들은 그 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보여주며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타이틀을 꾸며온 정태훈 선생님, 바이올린, 핸드벨, 합창을 지도해 준 임명희 선생님, 사물놀이를 지도해 온 김점쇠 선생님,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안내장을 만들며 2005년 학교 실적 브리핑 자료를 만드는 나를 비롯해서 주변 정리를 맡은 이재춘 주사님까지 한마음이 되어서 이 날 행사를 치렀습니다. 모든 학부모님이 한 분도 빠짐없이 다 나오셔서 함께 즐거워하고 축하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감사하며 음식을 나누며 행복함을 만끽했습니다. 날마다 퍼붓던 눈마저도 오전 시간만은 잠잠히 자리를 내주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1
"다른 나리꽃들은 땅을 보면서 피는데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보면서 피어. 소희 너를 닮았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은 소년 바우,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시골로 내려온 도시 소녀 미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개가를 한 어머니 대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소희라는 세 아이의 성장기를 다룬 장편 동화 '너도 하늘말라리야'는 청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장편동화입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쓴 책이지만 부모 세대도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춘기를 지나는 청소년이라면 당연히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책입니다. 마치 옆집에 사는 아이의 이야기를, 마음 아프게 살아가는 이웃집 아저씨 이야기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 사촌 아주머니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호흡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소희의 아픔이, 바우의 말하지 않는 행동이, 미르의 반힝이 그대로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실에서 손을 들고 발표를 해 본적 없는 유년,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잊고 살았던 10대의 나날들, 가슴 속에 응얼이진 까닭모를 울분을 눈물로 삭이던 청소년기의 방황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교 아이들
"연곡분교 전교생은 점심을 마치고 바이올린을 가지고 1학년 교실로 모이세요." 유치원 선생님의 안내 멘트에 전교생이 술렁입니다. 아이들이 바이올린을 들고 모이는 일이라면 뭔가 행사가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7일에 유치원 어린이 8명을 위한 생일잔치 계획이 있다는 유치원 임명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 갑자기 생각난 아이디어가 있어서 제안을 했습니다. 그날 전교생이 초대받아 축하 행사를 해주곤 했으니까 이번에는 행사를 좀 키워서 '작은 음악회를 열자고 말입니다. 가을 대운동회를 하는 바람에 이번 학년말에는 학예회가 취소되었습니다. 작은 학교에서 두 가지 큰 행사를 함께 치르면 아이들에게 미치는 수업결손을 염려해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 분교 아이들은 평소에 꾸준하게 연습해 온 프로그램이 여러 개 있어서 학예회를 하지 않으려니 아이들이 무척 서운해 합니다. 2년 동안 배운 바이올린 실력, 3년 동안 계속해 온 핸드벨 연주, 사물놀이를 추가하고 운동회 때 선보인 전교생 에어로빅을 추가하면 근사한 학예회를 꾸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들과 상의하여 '유치원 생일 잔치와 작은 음악회' 이야기를 꺼냈더니 찬성하시는 선생님들. 모름지기 학교란 즐거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