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이기적임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얼마나 더 이기적일까? 이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와 같다. 인간은 권력, 명예, 그리고 부를 추구하며 종국적으로 이것들이 가져다준다고 믿는 행복을 구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부모와 학교는 그런 것이 많을수록 편안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요술 지팡이라고 가르친다. 출세와 성공 지향적인 우리 사회는 특히 이러한 이기적인 성향이 매우 심하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도록 몰입하는 학교 공동체는 과연 교육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학교는 완전한 ‘야만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있다. 이는 유럽에서 모든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혁신한 6.8 혁명 당시 독일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도르노가 교육을 통한 경쟁을 지적하며 “경쟁은 야만과 동격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경쟁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국시(國是)’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초중고 교육은 가장 공정한 경쟁이라 착각하는 시험 제도, 즉대학수학능력시험의 대비에 따라 한 줄 세우기에 익숙하다. 이를
일찍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함께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사태를 극복하면서 ‘함께 또 따로’라는 삶의 의식이 싹트고 있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에는 이중성을 내포한 모순이다. 함께는 뭐고 또 따로는 무엇이란 말인가? 흑과 백의 논리처럼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일찍이 공자가 말한 군자의 행동 원리인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일맥상통한 것이라 할 것이다. 또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란 행동 원리와도 맥을 같이하는 논리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 이것이 바로 관계의 아름다운 거리라면 우리는 얼마나 마음의 울림을 얻을까? 최근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인위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참으로 고육지책이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가족, 친지의 소중함을 간절하게 느낀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왜냐면 믿고 의지할 존재는 가족과 혈족밖에 없다는 것에 애착이 증대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단일민족을 내세웠던 우리이기에 동족(同族)이라는 말은 아무리 이념의 장애가 가로막는다 해도 이면에서는 한민족의 남다른 ‘정’을 나
신입생 여러분, 어서 와요! 중학교는 처음이지요? 오늘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온 마음을 다해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 3년 동안 마치 전쟁을 치르듯 힘겹게 학교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재기발랄한 성장기의 멋과 맛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움을 간직한 채 여러분의 중학교 진학을 한동안 고민하고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여러분은 전통의 명문 산곡남중과 모교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오늘은 축복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산곡남중은 1987년 개교한 이래 35회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산곡남중의 모든 교직원들은 자신들의 진로와 진학의 선택에 따라 당당히 교문을 나서는 졸업생들을 떠나보내면서 진심으로 축복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긍지와 보람을 느꼈습니다. 왜냐면 산곡남중 졸업생들은 앞으로 상급학교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멋진 모습으로 자신의 진로와 삶을 개척해 나갈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첫째, 산곡남중은 모든 학생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생활하고 진로·진학을 지도하는 학교입니
미국에 거주하는 딸 부부가 가족 행사로 한국에 잠시 머물다 돌아갔습니다. 2년여 만에 입국한 탓인지 그동안 타국 생활에서 온 정신적, 사회적 격리 현상이 심하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비교적 오랜 기간의 이별이 그들의 일상생활과 의식 속에 암암리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옛말에 공부하는 선비는 이별한 후 삼일 후에 만나도 눈을 비비고 쳐다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여 딴 사람으로 보인다(사별삼일(士別三日,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처럼 젊은 딸 부부에게도 성숙한 의식의 변화가 돋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애완동물을 유기하게 되면 일단 동물보호단체에서 일정 기간 보유하다가 10개월의 기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안락사를 시킨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유기견을 해외에 입양시킨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한국의 유기견을 입양하여 키운다는 사실 또한 충격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애완동물을 해외에서 입양한다는 사실이 여러 가지로 흥미롭고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선진국의 가정에서 해외의 부모 없는 어린아이들을 입양하여 부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딸과 사위는 미국으로 복귀 길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 교수는 우리가 파상력을 통해 문제를 보는 눈을 키울 것을 주장한다. 그는 파상력은 ‘망가지고 깨지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힘’이라 정의하고 있다. 즉, 점차 망가지는 상황을 직시하면서 나름의 생기를 만들어내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찍이 사회학자 김홍중이 만든 용어다. 우리의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마치 나선형으로 진보한다고 믿는다. 불행히도 지금은 진보를 향한 열망과 희망이 깨져가는 때이다. 따라서 조한혜정 교수는 시대가 주는 절망을 견디면서 생기를 북돋을 수 있는 ‘기쁨의 실천’을 찾아내길 주장하고 있다. 이는 문제 인식 능력을 키우는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지적 회의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불완전함과 광신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주로 썼던 프랑스의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1844~1924)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나는 인류가 어느 시대건 똑같은 양의 광기와 어리석음을 분출하도록 만들어졌다고 굳게 믿는다. 광기와 어리석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본이다”라고 기록했다. 끔찍한 인간의 본질과 시대적 조망이 아닐 수 없다. 잠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체적인 삶(삶의 주인), 노예적인 삶(삶의 노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속에는 크게 두 가지의 상반된 면이 존재한다. 무의식적으로 타인에 의해서 강요당하거나 법과 규정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피동적인 삶의 자세와 반면에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역동적인 삶의 자세가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삶의 궤적을 남긴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타인과 구별되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 온 사례가 돋보인다. ‘Yes’라고 말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강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진정한 역사의 영웅(Hero)으로 인정받는다. 권력자 앞에서 No라고 말하기는 자신의 운명에 모험을 거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당당히 역사 앞에서 존재감을 발휘한 경우도 많다. 중국 당나라의 위징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당 태종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고 용기있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충언을 했다. 오죽하면 태종 이세민이 후에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고 고백했을까. 하지만 그런 충신을 곁에 두었기에 후세가 경애(敬愛)하는 ‘정관의 치’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전성시대를 영도할 수
인류 문명의 발전은 역설적이다. 인류는 초기의 수렵채집 시대를 거쳐 농경사회를 지나고 산업화 사회를 넘어 지식정보, 디지털 시대로 살아오며 문명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이렇게 문명의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의 불행은 다양해지고 깊어지는 현상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은 이제 인류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기보다는 불행을 낳고 위기를 남긴다. 한 미래학자에 의하면 2030년이 되면 3일 만에 지식이 두 배로 증가할 것이라 한다. 이렇게 지식의 총량이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이 놀라운 과학·기술의 시대에 왜 세상은 끊임없이 위기로 비틀거릴까?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던가? 예전이 더 나빴던가? 아니면 더 좋았던가? 오래된 미래에 등장하는 라다크라는 곳은 히말라야의 거대한 산맥에 둘러싸인 고도 35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이다. 이곳 주민들은 최초의 거주자인 아리안족과 기원전 500년경 티베트 사람들, 그리고 티베트에서 이주해 온 몽고 유목민들과 합류하는데 오늘날 라다크 사람들은 바로 이 세 부족의 후손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티베트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서 종종 리틀 티베트라 불리기도 한다. 라다크는 ‘산길의 땅’이란 뜻이다. 이곳에서는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 그는 나노(Nano) 연구 분야의 세계 최정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미 ‘월클’의 수준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첫 노벨 화학상을 받을 수 있는 0순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노벨 화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된 2020년, 강의실에서는 그룹 BTS의 노래 ‘NOT TODAY’가 흘러나왔다. 물론 “오늘은 아니야“라고 노래로 대신 대답했지만 그는 2023년 현재도 여전히 세계 학계가 손꼽는 한국인 첫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감이다. 그는 스스로 나노 연구 분야에서만큼은 ‘정상급’도 아닌 ‘정상’이라고 말할 정도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의 아주 작은 단위(unit)다. 그는 ”물질을 작게 쪼개고 쪼개서 나노의 세계로 들어가면 눈으로 보는 것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도우미 기술’로 주목받는 나노는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에서 칩(chip) 사이즈가 점점 줄어들면서 같은 면적에 더 많이 넣을 수 있는 기술로 현재 대한민국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효자 종목인 반도체의 원천으로 유명하다. 현 교수는 QLED TV의 바탕이 된 기술, 즉 반도체를 나노 입자로 만들어 자외선을 쬐면 형광 빛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굳이 철학자 데카르트를 소환하지 않고도 이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위한 인간의 특권이다. 문제는 그것이 때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추구하고자 대책 없는 철없는 아이처럼 될 수 있음을 염려한다. 명분상으로는 자기의 삶을 성찰하는 것이든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든, 아니면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갈망하는 것이든 무한 상념으로 돌입함을 제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 정초에 잠시 해답 없는 넋두리를 펼치고자 한다. 인간의 무한 상념은 그것이 과연 세상에 얼마나 의미 있는가로 귀착될 수 있다. 좁게는 개인과 국가의 성장과 행복을 구가하고자 하며 넓게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요즘 잠 못 드는 밤이 늘고 있다. 왜냐면 세상살이가 온통 갈수록 거칠고 투박해지며 동시대 타인들과 일상에서의 행복조차 감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이 시대의 교육자로서 피할 수 없는 직업적 자문인가 한다. 이 시대의 비애! 누군들 비에 젖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삶이 있으랴. 무한 상념은 시작된다. 순탄한 삶과 평화로운 삶은 어디서 구가할
먼저 오늘 영광스러운 졸업을 하는 학생 제위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냅니다. 아울러 학생들을 열정과 사랑으로 지도하신 선생님들과 자녀 양육에 물심양면으로 고생하신 부모님들께도 더불어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3년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매우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일찍이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인해서 그야말로 혼돈과 위기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루하루 바이러스와 생과 사를 다투는 투쟁은 차라리 현대판 세계전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하고 끔찍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인 여러분들은 학교 문이 닫히고 가정에서의 온라인 수업과 비대면 교육활동으로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오늘의 영광스러운 졸업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인간 승리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학교와 교육의 역사에 참으로 위대한 승리를 남겼으며 여러분의 인생에서 평생 기억할 멋진 인내와 극복의 역사를 창조하였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견하고 위대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비 온 뒤에 땅이 더욱 단단하게 굳어지듯이 3년 전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한층 성장해진 모습으로 학교
“너는 관리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다.” 불과 십 년여 전에 소속 학교장으로부터 면전에서 직접 들은 불만 섞인 코멘트였다. 이 말의 진심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는 필자에게 쇼킹한 말이었다. 원래 음주가무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 함께 어울림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 대인관계의 약점일 수 있다. 특히 우리 조직문화에 그러한 시기가 분명히 존재했기에 내심 짐작은 했다. 하지만 마치 선천적인 증상처럼 교직 초기 단계부터 알코올을 몸이 이겨내지 못하고 또 학생 시절 내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 공부하던 생활 방식은 야간에 친교의 시간을 갖지 못하기에 두고두고 타인과의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필자에겐 교직의 입문부터 지론(持論)이 있다. 이는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것을 삶의 모토(motto)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성격적으로도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사교를 중시하기보다는 조용히 홀로 침잠(沈潛)하여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기는 내향적인 기질이 압도적이다. 그러니 젊은 날 또래들과 어울려 당구를 치며 우정을 쌓는 시간을 비롯해 소위 잡기(雜技)를 즐기는 놀이문화에는 젬병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술을 즐기는 모임에서는 고통스런 시간을
어느 사회와 문화든 가난을 언급하는 말들이 많다. 우리에게도 ‘가난은 임금도 구제를 못 한다’라는 말이 있다. 가난은 우리 인류와 더불어 불가분의 관계였다. 따라서 가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경제행위로 연계되고 이것은 문명의 발달을 초래하여 인류는 현재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보유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가난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라는 말이 널리 인용된다. 하지만 전반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아직도 가난과 굶주림으로 지구촌 많은 곳에서는 인류가 존중받지 못한 채 고통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도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 생생하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성행할 정도로 먹을 것이 부족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한 시즌을 살았던 빈궁했던 이야기는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국민을 배불리 먹이는 게 정치의 근본임을 위정자들은 잘 안다. 따라서 각종 선거철이 돌아오면 유권자들에게 온통 경제문제를 부각하면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외친다. 이에 국민들은 이를 해결할 구세주라도 되듯이 온통 경제 우선 정책을 가진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떤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다.
2022년 다사다난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이다. 월초부터 달랑 한 장만 남은 달력이 마냥 쓸쓸해 보인다. 며칠후면 세상에 사랑과 평화를 가져온 아기 예수의 탄생일이 다가온다. 늘 그렇듯이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오면 더욱 생각나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 외롭고 힘든 삶 속에서 오직 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관심만을 간절히 품고 사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가까이는 주변의 독거노인들을 비롯한 쪽방촌의 극빈자들, 코리안드림을 꿈꾸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그리움에 젖어 외롭게 살아가는 외국인 근로자들, 자유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 나선 이 땅의 소수 난민들이다. 나라 밖으로는 세상 어디선가 배고픔으로부터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외계층의 지구촌 사람들이다. 그뿐이랴. 우리는 오늘도 날씨가 추워지면서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몸을 피해 전철역사 안으로 들어와 노숙하는 사람들은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의 입장으로 역지사지해보면 견딜 수 없다. 이에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란 사실을 떠올려 본다.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에서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을 수 있는 모든 이들이 온 마음을 모아 그들에게 십시일반으로 나눌 수만
어느 엄마가 아기에게 딸기잼이 매우 좋다고 생각하여 매일 딸기잼을 먹였다. 그런데 아기는 딸기잼을 무척 싫어했다. 그날도 엄마는 아기에게 딸기잼을 먹이려고 거의 강제로 입을 벌려서 딸기잼을 먹였다. 아이는 먹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그만 딸기잼 그릇이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바로 그때 일어났다. 8개월짜리 아기는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방바닥에 쏟아진 딸기잼을 손으로 움켜잡고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토록 먹기 싫어하던 딸기잼을 스스로 먹다니…. 이 일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이가 싫어했던 것은 딸기잼이 아니라, 딸기잼을 먹이는 방법이 싫었던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배우도록 프로그램화된 존재다."노벨상 수상자인 병리학자이자 유전학자인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 1920~2013)의 말이다. 위의 일화를 교육적으로 접근해 보자.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배움을 즐길 줄 아는 존재들이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배움이 아니다. 가르치는 방법이 싫은 것이다. 이게 맞다면 교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 방법에 관심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는 선생님 앞에서
오늘도 변함없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의 과정으로 8km의 걷기를 실시했다. 요즘은 왜 이렇게 과거보다 걷기에 더욱 집착을 하는 것일까? 이유인즉 단순한 까닭에 있다. 첫째,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에 대한 경각심이 유발하기 때문이다. 환갑을 지난 나이로는 젊은 사람들처럼 달리기 등 활기찬 운동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도 함께 한다. 따라서 편안하고 안정된 운동 겸 삶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리게 된다. 둘째,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실망과 분노가 찾아와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걷기를 하는 시간만큼은 세상사의 시름을 잊고 비우는 시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걷기를 실행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성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사가 잘 풀리지 않아 고민할 때, 나만의 고독한 시간을 갖고 싶을 때, 건강을 위해 무리 없이 운동하고 싶을 때,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싶을 때, 가까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친교를 다지고 싶을 때, 세상으로 자신을 내던져 실존에 대한 강한 욕구를 드러내고 싶을 때, 식사 후에 긴장을 풀면서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