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졸업식을 마치고 아이들은 학교를 떠났습니다. 각자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간 것이지만 그래도 녀석들의 움직임이 사라진 교실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 허진한 일이기도 합니다. 회자정리라는 말처럼, 사람이 만나고 떠나는 것은 자연의 순리 가운데 하나이지만,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로지 한가지 목표를 위해 매진했던 그 치열했던 흔적은 시원함보다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은 지금쯤 무엇을 할까요? 아마도 새롭게 시작할 대학생활을 준비하느라 바쁘겠지요.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땀으로 얼룩졌던 우리들의 교실을 잊지말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이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눈 졸업식은 추억속에 묻혀졌고 벌서 하루가 지났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대학이라는 더 큰 배움의 터전을 향해 떠나갔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어제 졸업식에서 우리반 반장을 맡고 있는 재우가 졸업생을 대표하여 답사를 낭독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작성한 답사를 모두 낭독한 재우는 단상위로 올라가 오늘이 있기까지 정성을 다해 키워주고 가르쳐주신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렸습니다. 물론 졸업생이나 참석한 가족들의 박수가 이어졌음은 당연하겠지요. 학교를 떠나는 순간에도 부모님과 선생님의 은혜를 잊지 않은 아이들이 있어 마냥 행복한 행복한 졸업식이였답니다.
세월이 남긴 나이테가 하나 더 늘었다. 이번까지 3학년 담임만 여섯번째니 그간 내 손을 거쳐간 녀석들만도 족히 기백명은 넘을 듯싶다.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도 미운정 고운정이 알맞게 들어야 금실좋다는 얘기가 있듯 스승과 제자 사이도 적당히 밀고 당기며 속도 어지간히 태워봐야 서로의 필요성을 절감하는가 싶다. 작년 이맘 때쯤으로 기억된다. 졸업식을 마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사실상 고3과 다를 바 없는 너희들과 첫대면을 했지. 다른 담임선생님들처럼 아이들의 명단이 담긴 봉투를 선택할 권리도 없이 내가 맡게 될 반은 이미 정해져 있었단다. 공부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처럼 다른 재능으로 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을 모아놓은 혼성학급이었지. 처음에는 공부와 거리가 먼 녀석들이 있어서 걱정을 했으나, 그런 대로 담임의 말을 믿고 따르는 모습에 한시름 놓았단다. 이른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숨돌릴 틈없이 이어지는 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으로 인해 특별한 추억거리를 만들 여유가 없었으나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구나. 교내 체육대회 때, 전력상 절대 열세라는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농구 경기에서 결승전까지 올랐을 때였지. 매경기 혈전을 치르느라 ‘부상병동’으로 변한 우리반
삼년 전, 입학식 날이었다. 대열을 맞추라고 호통을 치는 학생부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 앞에서 장난을 치는 녀석이 있었다. 유난히 키가 작아서 그런지 한 눈에도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앞에서 지휘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가볍게 넘기는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골치깨나 썩이겠다 싶은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녀석과 나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불행중 다행인지는 몰라도 녀석은 우리 학급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 만약 내 자식(?)이 된다면 옹골지게 다뤄 태도부터 고쳐놓겠다고 벼르던 마음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다만 내가 맡고 있는 과목은 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업 시간마다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사람의 선입견이라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입학식장에서 보았던 녀석의 불량기는 수업시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말그대로 수업에 충실한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맡고 있는 국어 과목에서 녀석의 성적은 다른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야말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애초에 녀석에 대하여 품었던 선입견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해가 갈수록 아이들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졸업식을 앞두고 고3 학생들의 참여를 높이기 위하여 담임 선생님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학교 홈페이지에 졸업식 일정에 관한 소개를 해놓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이들이 미처 확인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여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구체적인 일정을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졸업식과 관련된 사항을 메모해 놓은 칠판에는 대입 합격자들의 명단이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졸업식이 다가오며 담임선생님들의 업무가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수상자료를 챙기고 행여 생활기록부에 누락된 내용은 없는지 다시 한번 점검을 하고, 졸업식날 학생들에게 나눠줄 졸업장에 한 字 한 字 정성을 다하여 이름을 써 넣습니다. 해마다 아이들과 이별을 나누는 시기가 다가오면 만감이 교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아이들과 함께 지지고 볶던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관심과 애정을 베풀었다면 좀더 잘 될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가슴을 칩니다. 언제 다시 불러볼지 모르는 이름이지만 졸업장에 한 字 한 字 아이들의 이름을 써 넣으며 마음속으로 다시 기도합니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굳건히 자신의 뜻과 의지를 펼치라고'
내일 졸업식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줄 앨범이 도착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다보니 삼년 동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입학식과 함께 시작된 충의사 참배에서부터 야영훈련, 수학여행, 교내 체육대회 등 기억속에 남아있던 장면들을 살펴보며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던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게 되겠지만, 평생 소중하게 간직될 앨범을 통하여 학창시절의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긴 겨울방학을 끝내고 드디어 개학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간밤에 엄청난 양의 눈이 내려 통행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간신히 학교에 도착하여 창문밖을 살펴보니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한 무리의 학생들이 눈밭을 헤치며 일렬로 줄지어 등교하고 있었습니다. 개학과 동시에 시작된 폭설이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시작하는 학교생활에 기폭제가 되기를 마음 간절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칼럼을 써 오면서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쓰고 있는 칼럼을 학생들의 논술지도에 활용할 수는 없을까? 고민을 풀기 위하여 학생들의 논술지도에 칼럼을 활용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칼럼이야말로 논술문을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전문가적 시각을 바탕으로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쳐가는 칼럼을 읽고 또 그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대입 논술에서 요구하는 답안을 충분히 쓸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교재 집필에 들어갔습니다. 중간 중간에 난관에 부닥친 적도 많았지만, 일정한 방향이 정해지니 소소한 어려움은 능히 극복할 수 있었고 무사히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내놓고 보니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이 책은 일반 서적이라기보다는 학습도서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렇지만 일반인들도 논리적인 글쓰기의 능력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학습도서는 개념 설명과 함께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하고 있지만, 이 책은 모든 예문을 필자가 직접 쓴 칼럼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술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겐 좀더 친근감있게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실제로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시집을 냈습니다. 저에게는 처녀시집으로, 그간 틈나는 대로 써 두었던 몇 편의 시들을 정리하다보니 시집(『당신이 있어 내가 있습니다』/오늘의 문학사/2006)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가슴속에 품어둔 소중한 이야기가 있겠지요. 갈수록 물질과 감각적 쾌락에 경도되는 상황에서 인간의 정신은 상대적으로 더욱 황폐화되고 사랑을 잃고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시는 단순한 추상적 사유물이 아니라 배고플 때 만나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상처받은 마음에 한가닥 위로가 되며 힘든 하루를 너끈히 견디게 하는 힘만으로도 그 존재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지만 제 시가 바로 그런 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시집을 간단히 소개드리면, 자연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노래한 1부 「선운사 기행」, 교육과 가족에 대한 성찰을 담은 2부「교사의 기도」, 삶의 성찰이 담긴 3부 「행복, 그 무엇」, 사회와 역사 인식임 담긴 4부 「대릉원에서」등 총 4부 6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시인 '당신이 있어 내가 있습니다'는 '당신'이란 존재의 다양한 해석상의 묘미에 따라 '나'를 낮추고 '상대'를
요 며칠동안 대학생들의 취업난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국어 교사를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가자마자 60여명 가까운 지원자들이 원서를 접수했습니다. 지원자 가운데는 명문대학 출신이 많았고 각종 자격증을 소지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엄격한 서류심사를 거쳐 먼저 다섯명의 예비선생님을 선발했습니다. 이분들을 모시고 각각 임의의 단원을 선정하여 실제 수업을 했습니다. 물론 교장, 교감 선생님과 국어선생님들이 뒤에서 지켜보면서 일일이 채점을 하고 있습니다. 수업에 임하는 예비 선생님들은 60:1에서 5:1로 접혀진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기 위하여 혼신을 다해 열강을 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지적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선생님 등 수업 방식도 다양했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참관했던 선생님들이 채점표를 수합하고 최종적인 의견을 나누며 마무리했습니다. 과연 어떤 선생님이 다가오는 신학기에 교단에 설 수 있을지. 아마도 발표가 날 때까지는 예비 선생님들의 긴장은 계속되겠지요.
교육이 변하기 위해선 교사부터 변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변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히 실력을 키우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특성상 우물안의 개구리는 절대 발전할 수 없습니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움으로써 안목을 넓히는 것이 궁극적으로 교육력 향상의 밑거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올 겨울도 중국에서 귀한 손님들이 학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들은 바로 중국 합비시 제일중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입니다. 2002년부터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에 학생과 교직원들이 정기적으로 교류를 하는데, 겨울에는 선생님들만 상호 교환 방문을 합니다. 학교에서는 이번에 오시는 중국 선생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교문에 환영 현수막을 부착했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 오시는 선생님들이 환영 현수막을 보면서 좀더 친근한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드러커는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주도할 핵심 동력으로 독서를 꼽았다.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책을 가까이 하는 우리 민족의 특성에 비춰볼 때 상당한 경쟁력을 갖췄다고 자평할 수도 있으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이달 초,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1가구가 책 신문 잡지 등 '읽을거리'에 쓴 지출액이 월평균 1만397원으로 전체 소비지출액(204만8902원)의 0.5% 수준으로 나타났다. 이는 월평균 4576엔(약 3만9200원)을 쓰는 일본의 4분의 1, 23.3캐나다달러(약 2만200원)를 지출하는 캐나다의 2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 같은 문화비용이라 하더라도 오락이나 취미생활과 관련한 지출액(9만7446원)에 비해 현격히 차이가 나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서적·인쇄물을 구입하는데 들어간 비용 가운데 신문대금이 포함되어 있어 사실상 책 구입비는 '제로(0)'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던 안중근 의사의 기개가 무색할 지경이다. 가계(家計) 소비지출액에서 '서적·인쇄물 지출액'의 비중이 현격히 떨어지는 것은 열악한 독서문화를 감안했을
오늘은 인근에 있는 모 대학의 교수님과 만날 일이 있어, 평소 보다 일찍 학교를 나와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대학 캠퍼스로 향했습니다. 행여나 늦을까봐 걱정을 했는데, 도학하고보니 오히려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하던 차에 마침 학생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열람실이었습니다. 방학중임에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무척 많았습니다. 어림잡아 수백명의 학생들이 꽉 들어찬 열람실은 학생들이 뿜어내는 학습 열기로 후끈거릴 지경이었습니다. 약속 시간이 다가와서 더 이상은 지켜볼 수 없었지만, 학기중과 다름없이 방학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있어 우리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척 뿌듯한 하루였답니다.
현대인들은 TV를 삶의 일부분으로 여기며 생활한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TV를 켜는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TV에 파묻혀 지내다가 잠자리에 든다고 하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방학이 되면 집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가장 많이 유혹하는 대상이 TV입니다. 몰론 부모가 나서서 TV시청 시간을 적절히 조종해야 하지만 정작 부모가 틈만나면 TV를 보는데 아이들이 통제가 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보기 위해 습관적으로 TV를 켜기 위해 다가서다가 화면에 붙어 있는 종이 한장을 발견했습니다. 궁금하기도 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설펴보니 아내가 써서 붙여 놓은 종이였습니다. 아들 녀석의 방학 숙제 가운데 하나가 온 가족이 하루 종일 TV를 보지 않고 지내보는 거라나요. 덕분에 아이들은 온종을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TV에 빠져 지내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선생님께서 정말 좋은 숙제를 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숙제가 아니더라도 가끔은 TV를 켜지 않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