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눈 너무도 깊어 물을 마시러 몸을 기울이며/나는 보았다, 온갖 태양들이 그리로 와 제 모습 비춰보는 것을/온갖 절망들 그리로 뛰어들어 죽어가는 것을/그대 눈 그리도 깊어 내 거기서 기억을 잃어버리네” 이렇게 시작되는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의 시 ‘엘자의 눈’은 프랑스 현대시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시의 명편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엘자’는 러시아의 혁명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의매(義妹)로서 1928년에 만나 시인의 아내가 된 엘자 트리올레를 가리킨다. 그녀는 무려 32권에 걸친 ‘교차 소설집’(1965~1974)을 함께 쓴 동지적 공동 집필자일뿐만 아니라, 시집 ‘엘자의 눈’(1942)을 비롯해서 ‘엘자’(1959), ‘엘자에 미친 남자’(1956) 등을 태어나게 한 시적 영감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아라공은 그 어느 시인보다 강렬한 울림의 연가를 많이 남긴 시인이었음에도 오랫동안 ‘코뮤니스트 작가’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활동했던 이념적 성향 때문에, 그의 문학에 대한 가치평가 또한 편향적이고 불공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라공이 1958년에 발표한 소설 ‘성주간’(聖週間)은 개인적 상황과 역사적
2008-08-26 09:41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쟁이 마감된 오늘날 세계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문명 간의 충돌이라고 말하는 저자 새무얼 헌팅턴(Samuel E. Huntington). 그는 그 구체적 예로 문명의 중심에서 떨어진 문명 사이의 단층선 즉 이슬람과 서구 문명이 겹쳐지는 곳에서의 분쟁, 중국과 여타 문명과의 단층선 상에서 발생하는 문명의 충돌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예들은 동서 냉전 이후 문명의 재편 과정에 발생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헌팅턴의 가설을 일정하게 정당화해 준다. 그러나 문명의 단층선 사이에서 문명이 조우하면서 격돌이 발생하기보다는, 교섭의 양상을 보이는 예도 적지 않음을 생각하면 문명의 충돌이라는 가설이 너무 단선적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유일신을 믿는 문명인 서구와 이슬람 사이에서는 격렬한 격돌의 양상을 보이지만, 여타 문명의 경계선에서는 격돌의 양상이 약화되거나 교섭을 통해 다문명 체제로 나아가고 있음이 그 근거가 된다. 또 헌팅턴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 문명의 단층선에서 발생하는 충돌 이외에도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주변국 사이의 역사적 갈등 관계, 지구 온난화에 따른 물 부족 문제, 인류 생존에 필수적인…
2008-08-25 09:33스테판 말라르메(Stphane Mallarm, 1842~98)는 상징주의의 3대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보들레르에 이어 순수시의 극치, ‘고귀한 시의 이상’을 끈질기게 추구한 수도사로 평가된다. 일생 동안 시를 종교처럼 생각했던 그는 ‘시의 종교’, ‘미의 종교’, ‘이상의 종교’에 도달하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욕망을 버리고 순교자적인 고행에 삶 전체를 바친다. 그는 한 편의 야심적인 순수시를 쓰기 위해 5년, 10년, 또는 20년의 산고를 겪기도 한다. ‘주사위 던지기’(1897) 같은 작품은 무려 30년간의 번민에 찬 심사숙고 끝에 완성한, 프랑스 시문학 사상 가장 난해한 시적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 말라르메는 사물의 순수한 개념과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 언어를 일반적 의미에서 해방시키고, 시어의 배합을 일상적인 규칙과 구문에서 해방시켜 고도의 음악성과 특이한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순수시를 쓰고자 했다. 그는 일반 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인정받지도 못했다. 기교에서는 포의 영향, 사상 면에서는 보들레르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는 그의 초기 시편들 중 유난히 낭만주의적 색채가 뚜렷한 ‘바다의 미풍’ 정도가 겨우 일반 독자들에게 읽혀질 뿐이다. 이
2008-08-07 19:41뜬금없이 ‘천자문’을 들이대니 조금 생뚱맞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국어·한문 선생님이야 ‘천 자문’ 아니라 ‘만자문’을 이야기해도 심심할 터인데. 하지만 지금 다시 ‘천자문’을 읽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으니, 그것은 ‘천자문’이 동양적 인문학 입문서로 딱 좋기 때문이다. ‘천자문’ 첫 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예로 들어 보자. “하늘과 땅은 검고 노랗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늘은 파랗고 땅은 노랗지 않은가? 이 구절은 ‘주역’에 나오는 말로서,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天玄而地黃)”고 풀이한다. 여기서 ‘현(玄)’은 ‘검다’ 외에 ‘하늘, 하늘빛, 멀다, 그윽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유현(幽玄)하다’, ‘현묘(玄妙)하다’ 할 때의 그 ‘현’이다. 또 ‘황(黃)’은 오행(五行)의 중앙에 자리잡은 색으로, 동서남북으로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를 거느리는 색이다. ‘황’을 오방의 중심에 둔 이유는 중국 문명이 황하에서 기원했기 때문으로 보는 설이 유력한데, 농사의 기반이 되는 땅이 노랗기 때문에 그것을 모든 색의 우두머리에 두었다는 것이다. ‘황제(皇帝)’가 ‘황제(黃帝)’와 통하거나 오로지 황제만이 노란색 관복
2008-08-04 13:26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백범이건만, 그의 사상과 이념을 올곧게 이해하는 이는 정작 많지 않은 것 같다. 백범을 두고 ‘반공주의자’라 하기도 하고, 또는 ‘용공주의자’라 하는 등 세간의 엇갈린 평가는 그런 단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분단과 반공의 질곡에서 빚어진 흑백논리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백범 사상의 진실이 크게 오해를 받거나 폄훼되는 일이 적지 않다. 독립과 통일 위한 실천이념 제시 백범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만난 것은 1920년대 독립운동을 펼치던 때부터였다. 이후 백범은 때론 ‘반공’의 입장에 서기도 했고, 민족을 위해서는 ‘용공’도 사양하지 않는 사상의 포용성과 다원성을 드러내었다. 민족을 외면하고 계급해방에만 치우친 공산주의는 반대했지만, 민족독립과 통일을 위한 길이라면 공산주의와의 통일전선도 마다하지 않던 백범이었다. 때문에 1940년대 좌와 우가 어우러진 통일전선형태의 임시정부를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백범에게는 좌파의 극단적 계급주의와 친일파를 제외한 전 민족·각 계급·각 당파의 공동 이해에 의한 민족 단결의 독립운동과 통일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독립운동의 지도자,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
2008-08-04 11:03“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를 들고 나와, 실존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를 유포시킴으로써 한때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이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하나의 신화적 상징임이 분명하다. 그는 철학사상의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문학비평적 에세이 등 문학 분야에 있어서도 단연 돋보이는 독창적 성취를 이룬 위대한 전방위적 대가로 역사에 이미 자리매김 되었다. 글로 쓰는 거의 모든 예술장르에 걸쳐서 빼어난 업적을 자랑하는 그가 미술 평론 분야에서도 주목한 만한 글을 남겼다 해도 그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론과 마찬가지로 예술론 역시 그가 줄기차게 추구한 특유의 실존적 정신분석 비평의 변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etti, 1901~1965)에 관한 2편의 본격적인 평론 ‘자코메티의 회화’(1945)와 ‘절대의 탐구’(1948)를 쓴 바 있다. 이는 자코메티의 그림과 조각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깊고 큰 것인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르트르는 상황 속에 있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타인을…
2008-07-28 09:54미학 서적들이 워낙 어려운 책들이라 일반 독자가 동서 미학을 비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이 책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중국의 내유가 허정에 의거한다면, 서구의 상상은 천재를 강조 한다. 허정은 예술가의 마음이 우주의 마음을 얻어 창조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천재는 개인의 주관적 능동성으로 창조한다. 천재의 특징은 법칙을 타파하는 것이다. 범속의 초월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갖는 ‘타파’는 전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개인의 천재성에 의존한다.” 등과 같이 깊지는 않지만 저자 장파(張法)는 동서 미학의 차이점을 확실히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푸른숲)을 읽으면 동양화와 서양화를 감상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동양 문학 작품과 서양 문학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동양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인 반면 서양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과 형식이다. 동양화에서는 구체적 형상보다는 정신과 뜻을 표현하고 생동하는 기를 표현하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에 난을 그리는 것을 ‘난을 친다’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친다’의 의미는 난을 그리는 사람이 마음속에 난을 ‘기르고 있다’라는 뜻으로 난의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선비의 굳은 의지와 정신, 난의 생명
2008-07-23 15:13‘에로티즘’과 ‘문학과 악’ 등의 책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그 이름이 알려진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철학·경제학·종교사·생물학·민족학·문학·미술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무서우리만치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 ‘금기’와 ‘위반’의 작가라 할 수 있다. 헤겔과 니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근대적 합리주의와 생산 중심의 세계를 끊임없이 비판함으로써 독자적 사상체계를 구축한 그는 특히 데리다와 들뢰즈 그리고 푸코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타이유의 글쓰기에는 죽음과 에로티즘이라는 두 개의 핵심적인 주제가 종종 나타나는데, 그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공포스러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강박관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버지가 소변을 볼 때면 눈동자가 없는 하얀 동공이 커다랗게 벌어지곤 했는데, 그 이미지가 상상적 전이(轉移)의 기초로 작용했다고 바타이유는 말한다. 1928년 로드 오슈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그의 최초의 소설 ‘눈 이야기’에서는 하얀 동공이 달걀의 흰 색과 황소의 고환으로 변형되고, 다시 외설스런 오줌싸기와 죽음, 특히 눈을 찔려 죽은 투우사 그라네로의 죽음으로 변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2008-07-21 10:27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이 행복해지도록 도울 수 있을까?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인 마셜 B. 로젠버그는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에서 해답을 찾는다. 비폭력이란 우리 내면의 긍정적인 면, 즉 타인에 대한 이해, 연민, 존중, 감사의 마음 표현하는 것으로 비폭력대화의 과정은 구체적 상황의 관찰, 그 상황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파악, 자신의 욕구인식, 욕구충족을 위한 부탁이나 요청의 네 단계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친구가 약속 시간에 30분 정도 늦게 왔다고 해보자. 이 때 우리는 친구를 비난하면서 화를 내기 쉽지만, 자신의 욕구를 중심으로 상황을 이해한다면 달라진다. 친구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다면 이 때 느끼는 감정은 상처가 되지만,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고 싶었다면 시간낭비에 대한 좌절이 생긴다. 이와 같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구이해에 따라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 있니?”라고 비난하는 대신 “일찍 만나서 함께 있고 싶었는데, 시간이 줄어 아쉽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나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비난하거나 평가하는 말을 반복한다면, 그 말들이…
2008-07-14 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