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맛있었다. 짙은 액체가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어떻게 이렇게 깊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신선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천카페에서 파는 120원짜리 커피 한 잔에도 감탄이 나온다.
에티오피아를 처음 찾은 건 몇 해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갈 때였다. 원래 홍콩과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더반으로 가는 여정이었지만, 비행기가 연착하면서 항공편이 꼬여 갑자기 아디스아바바로 들어가게 됐다. 홍콩에서 아디스아바바까지 비행시간은 11시간이었다. 담요를 부탁했지만, 승무원은 담요가 없다며 대신 따뜻한 차를 마셔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홍차를 마시고 겨우 잠들었던 것 같다. 스리랑카 콜롬보 상공을 지날 때쯤 눈을 떴는데 창밖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창문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인도양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잘못 든 길’이 주는 행운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슬며시 좋아졌다. 더 좋은 건 비행기 환승시간이 넉넉했다는 것. 그래서 비록 공항에서지만 에티오피아 커피를 에티오피아에서 마실 수 있었다는 것. 커피는 기대보다 별로였지만, 여기는 아디스아바바공항이니까, 이 정도쯤이야 뭐.
그리고 다시 한 달 만에 에티오피아를 찾게 됐다. 첫 여행은 아디스아바바에서 시작해 랄리벨라와 곤다르를 돌아보는 일정이었고, 두 번째 여행은 아디스아바바에서 시작해 진카·아라브민치·하와사·콘소를 거쳐 짐마·봉가·바레국립공원·하라르까지 이르는 다소 긴 여정이었다. 그렇게 한 달에 걸쳐 에티오피아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에티오피아의 다양한 모습과 만났다. 고대 기독교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랄리벨라의 암굴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온몸을 감싸던 숭고한 느낌을 아직 잊을 수 없다. 진카의 무르시족과 하마르족 마을에서는 TV에서나 보던 아프리카 부족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으며, 함께 술을 나눴다.
세계 커피의 발상지
하지만 이 모든 풍경과 경험을 지나 한국에 와 있는 지금, 머릿속에 가장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커피다. 매일 아침마다 거리의 노천카페에서 에티오피아 사람들과 함께 마셨던 진한 커피향은 아직 잊을 수 없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코끝에 커피향이 스치는 것만 같다.
‘커피’ 하면 많은 이들이 브라질 또는 콜롬비아를 떠올릴 테지만, 커피의 발상지는 에티오피아다. 다양한 설이 있지만 커피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6~7세기경 에티오피아에 살았던 목동 ‘칼디(Kaldi)’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염소를 보살피던 칼디는 어느 날 이상하게 생긴 붉은 열매를 먹고 있는 염소들을 목격했다. 그 열매가 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칼디는 염소들이 열매를 실컷 먹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붉은 열매를 먹은 염소들이 술에 취해 흥분하여 춤을 추는 듯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칼디는 그 열매를 따서 집으로 돌아와 물에 끓인 후 마셔 보았는데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칼디는 이 신기한 사실을 이슬람 수도사들에게 알렸고, 이 열매가 악마의 것이라고 생각한 수도사들은 불 속에 던져버린다. 그런데 열매는 불에 타면서 더 향기로운 냄새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발견 덕분에 이른 아침을 여는 지루한 회의가 그럭저럭 참을 만하게 된 것이다.
커피라는 이름 역시 에티오피아의 지명 ‘카파(Kaffa)’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카파는 에티오피아의 커피나무 자생지이기도 하다. 카파가 터키로 전파되어 Kahweh,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에서 Cafe, 이탈리아에서 Caffe, 독일에서 Kaffee, 영국과 미국에서 Coffee로 불리게 되었다.
커피콩은 크게 아라비카종과 로부스타종으로 나뉘는데 아라비카종은 로부스타종에 비해 산미가 있고 향이 뛰어나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고 냉해에 약한 편이라 가격이 비싸다. 아라비카종은 주로 해발고도 1,500m~3,000m에 이르는 고산지대에서 연평균 15~25도의 기온과 2,000~2,500mm 정도의 강수량인 지역에서 자라는데 에티오피아는 그 조건에 딱 떨어지는 곳이다.
여행자를 반기는 커피 세리머니
아디스아바바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한 시간을 가면 짐마(Djimmah)다. 이곳이 바로 카파. 그러니까 카파는 짐마의 옛 명칭이다. 짐마공항에 내리자마자 커피를 그려놓은 커다란 커피 간판이 여행자를 반겼다. 공항 한쪽에는 에티오피아식 커피를 파는 조그만 커피 좌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십여 분을 달려 시내로 들어서자, 에티오피아의 여느 도시와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삼륜 오토바이 택시와 말이 끄는 마차, 자동차가 뒤엉킨 도로는 복잡했다. 이 복잡한 도로 위를 양과 염소가 느린 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숙소에 들어서자 커피 세리머니가 펼쳐졌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 환영의 인사로 커피 세리머니를 한다. 에티오피아 말인 암하릭어로는 ‘분나 마프라트(Bunna Maffrate)’라 부른다. ‘분나’는 ‘커피’를, ‘마프라트’는 ‘요리’를 뜻한다.
“에티오피아식 커피는 한국에서 마시던 커피와는 전혀 다른 맛일 거예요. 처음엔 좀 낯설 테지만 이틀만 지나면 세 잔 이상 마시지 않고는 하루를 보내지 못할 거예요.” 짐마 지역을 안내할 가이드인 데스가 말했다. 커피잔이 가득 올려진 자그마한 탁자 위에는 네렐라(Nerela)라는 에티오피아식 하얀색 옷을 입은 여인이 앉아있었다. 주위 바닥에는 행운을 불러온다는 풀이 깔려 있었다. 탁자 앞에 자리한 화로에는 숯불이 연기를 피워 올렸고, 그 위에는 목이 긴 토기 주전자 ‘제베나(Jebena)’가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향로가 있었는데, 노란색 송진덩어리를 올려놓으니 흰 연기와 함께 진한 향내가 퍼져 나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세리머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예요.” 데스가 귓속말로 나지막이 말했다. “주변의 냄새를 없애 커피향이 더 도드라지도록 하는 거죠. 손님에게 예의를 표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여인은 곧 프라이팬에 하얗게 건조된 커피콩을 볶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가 진한 갈색으로 변하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때 손님들은 연기를 함께 마시며 향기를 음미한다. 커피가 적당하게 볶아지자 곧 절구에 넣고 빻기 시작한다.
그 사이 제베나에 담긴 물이 끓기 시작하고 커피가루를 넣고 다시 얼마간을 끓인다. 에티오피아는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2,000m 이상인데, 높은 고도 때문에 95℃ 정도면 물이 끓는다. 하지만 목이 긴 제베나는 기압 차이를 줄여줘 진한 커피를 우려낼 수 있다. 또한 커피 아로마의 손실도 최대한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이제 커피를 마실 차례다. 제베나에서 나온 커피가 손잡이 없는 작은 찻잔 ‘시니(cini)’에 넘치도록 담긴다. 기분 탓인지 훨씬 더 검고 진하게 보인다. 여기에 설탕을 두 스푼이나 넣는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셔본다. 진하고 신선한 맛이 입 안에 가득 찬다. 초콜릿향인지, 캐러멜향인지, 뭔가 달콤한 맛과 쌉싸름한 맛이 어우러져 있다. 박하향이 스며있고, 에티오피아 커피 특유의 신맛도 깃들어 있다.
“세 잔은 마시는 게 예의입니다. 첫 잔은 ‘우애’, 둘째 잔은 ‘평화’, 셋째 잔은 ‘축복’을 담아 마시죠. 커피 생산지 중 고유의 커피를 마시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에티오피아가 유일합니다.” 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깻짓이었다. 첫째 잔은 ‘아볼(Abol)’, 두 번째 잔은 ‘후에레타냐(Hueletanya)’, 마지막 잔은 ‘바라카(Baraka)’로 부른다.
커피의 시원을 찾아서
짐마에서 차를 타고 1시간을 가면 봉가(Bonga)라는 조그마한 도시가 나온다. 이곳이 칼디가 가장 먼저 커피를 발견한 곳이다. 봉가에는 야생 커피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숲이 있다. 지금의 카파는 10개의 워레다(작은 행정구역)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 인구는 100만 명 정도다.
봉가는 카파의 행정수도. 인구는 약 3만 명가량이다. 에티오피아의 모든 커피는 우리나라 농림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ECX(Ethiopia Commodity Exchange)’를 통해 거래된다. 수확 후 가공을 마친 커피는 ECX의 커피 보관소로 모인다. 커피 보관소는 에티오피아 8개 주요 지역에 있는데 봉가도 그중 한 곳이다.
봉가 시내를 지나 비포장도로를 30여분 가자 짙은 황토색 강이 나타났다. 드라이버는 이곳부터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봉가 가이드를 맡은 베레케트는 물 한 병을 던져주며 여기서부터 40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늘 하나 없는 황톳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걸어가자, 이곳이 커피를 가장 먼저 재배한 곳이라는 입간판이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발견한 곳이라는 명성에 비해서는 다소 초라한 간판이었다. 베레케트는 팔을 이끌며 숲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런데 몇 발짝 숲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에티오피아에 오는 여행자들은 사실 봉가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그들은 랄리벨라의 암굴교회나 진카의 원시부족 마을에 방문하길 원하죠. 하지만 봉가는 아라비카 커피의 최초 발생지이기도 한 만큼 더 알려질 필요가 있는 곳이에요.” 베레케트가 말했다. “커피나무가 어디 있죠?” 내가 묻자, 베레케트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 숲의 모든 나무가 커피나무입니다.” 정말 놀라웠다. 아열대 기후 속에 자리한 이 울창한 레인 포레스트가 모두 커피나무라니! 나는 어느새 커피 숲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나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커피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어떤 커피나무는 키가 5m는 더 되어 보였다.
“봉가의 산림보존지역은 넓이가 500㎢에 이르는데, 이와 비슷한 크기의 아열대숲은 에티오피아에 몇 군데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베레케트는 숲의 나무들이 만드는 짙은 그늘이 열매를 느린 속도로 자라게 하는데, 이 때문에 풍미 가득한 커피열매가 열린다고 설명했다. “이걸 바로 따서 먹을 수도 있나요?” “물론이죠. 단 수확기가 되어야 하죠. 10월부터 빨갛게 익은 커피를 따기 시작해요.” 지금이 10월이 아닌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