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역사 탐방 다섯번 째 길, 동작구는 충효의 얼이 깃든 유적이 많은 곳이다.
흑석역에서 가까운 산등성이 계단을 오르니 정자가 보인다. 첫 방문지 효사정은 세종조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대감의 별서였다. 노한대감의 자는 유린이며 시호는 공숙이다. 노한대감이 모친을 여의고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북쪽 개성에 있는 아버님 산소를 바라보며 추모했던 곳이다. 당시 이조판서 강석덕이 효사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효사정을 지나 동작구 출생 심훈(1901-1936)선생을 기리는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박열, 박헌영, 윤극영들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덕수궁 앞 해명여관에서 체포되어 재판에까지 회부되었는데, 이를 통해 주모자급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구속되어 수개월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특히, 서대문 형무소에서 어머님께 보낸 편지인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당시 서대문 형무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강전투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량진·영등포 등 한강 유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한강 방어선 전투’라고도 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6일 동안 저지해 미군이 지상군을 파병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6.25전쟁에서 약 13만 8천여 명의 국군과 3만 8천여 명의 유엔군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숫자와 기록으로 남은 전사자들 외에도 나라를 위해 전사한 군인들이 바로 '학도병'이다.
이러한 학도병들의 희생정신과 활약상을 기리고자 전국 각지에 학도군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오늘은 그중 서울 흑석동에 있는 학도의용군 현충비를 탐방하였다.
'학도병'은 학생의 신분으로 한창 학업에 몰두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나간 소년들이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자원한 5만여 명의 학도병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되었다.
학도의용군의 시작은 학도호국단 학생 200여 명이 조직한 비상학도대로, 이들은 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아 1950년 6월 29일부터 한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국군부대로 들어가 전투에 참가하였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 묘사된 포항여중전투는 학도병들이 중심이 되었던 전투다. 이 전투는 3사단에 배속된 71명의 학도병들이 북한 군의 남하를 11시간 동안 지연시킨 전투로 기록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47명의 학도병이 전사했다.
다음 탐방지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찾았다. 현재 용양봉저정은 한강대교 남쪽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도 한강의 물굽이가 흘러가는 모습이 잘 내려 보이는 용양봉저정을 찾아, 부친에 대한 효심을 지켜나간 정조의 모습을 기억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조는 용산에서 노량진에 이르는 곳에 주교(舟橋·배다리)를 설치하게 하고 한강을 건넜다. 한강을 건넌 후에는 잠시 휴식을 취했는데, 이곳이 현재 서울시 동작구에 위치한 용양봉저정이다.
정조가 직접 쓴 ‘용양봉저정기(龍驤鳳翥亭記)’가,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의 화성 행차 중 가장 대규모의 행렬이 동원된 1795년 윤2월의 행차에서, 정조는 용양봉저정에서 점심 수라를 드셨음이 나타난다.
“이해 윤 2월 9일에 자궁(慈宮·어머니)을 모시고 출궁하였는데, 가마를 따르는 관원이 129명, 장관(將官)이 49명, 각 차비가 43명, 장교가 236명, 원역(員役)이 1108명, 군병이 3,410명, 내관(內官)이 12명, 나인이 31명, 액속(掖屬)이 113명이었다.”고 『홍재전서』의 기록에는, 다수의 인원이 용양봉저정에서 휴식을 취했음을 알 수가 있다.
사육신묘는 조선조 단종을 강제로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항거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 등 일곱 충신 절사의 묘역이다. 숙종은 1681년 사육신의 충성심을 기리는 뜻에서 이곳 산 기슭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왜 사육신은 7명으로 의문이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충신으로 밝혀진 6명의 묘비가 1955년 세워졌다.
세월이 흘러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어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 끝에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과 같은 충신으로 현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 7명이 되었다.
미세먼지도 없어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사육신공원에서 바라본 한강과 주변의 모습을 과거와 비교해 보면서 한강의 발전이 한국의 발전상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