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7일. 한국 영화계는 이제 막 전 세계 무대로 비상하던 걸출한 배우 이선균을 잃었다. 48세. 연기의 절정 앞에서 스러진 그의 나이다. 이선균 배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를 졸업했다. 2001년 MBC 시트콤 <연인>과 뮤지컬 <록키호러쇼>로 데뷔했지만, 오랜 무명생활을 보냈다.
이후 MBC 드라마 <하얀거탑>(2007), <커피프린스 1호점>(2007), <파스타>(2010)에서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인생작’으로 꼽는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는 톱스타 아이유와 함께 출연해 ‘참 어른’의 모습을 보이며, ‘믿고 보는 배우’ 대열에 합류했다.
2019년은 그야말로 이선균 배우의 연기 지평이 세계로 확장된 해다. 제9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아시아 최초로 4관왕에 등극했고, 그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감독 봉준호)에서 주인공 ‘박 사장’으로 분해 세계가 그의 연기에 주목했다. 지난해에는 <잠>(감독 유재선)과 <탈출: 사일런스 프로젝트>(감독 김태곤)이 동시에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올스톱’됐던 유작 두 편이 2024년 여름 관객과 만난다. 7월 12일 개봉한 <탈출: 사일런스 프로젝트>와 8월 14일 개봉을 앞둔 <행복의 나라>(감독 추창민)이다. 이 두 편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를 정말 떠나보내야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유흥업소 출입 등 그를 지탄하는 목소리도 분명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세계로 날아오르다 지천명(知天命)에도 이르지 못한 채 추락하고 만 그의 운명 그리고 이제 막 성숙의 단계로 접어든 그의 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먹먹함은 숨길 수 없다. ‘안타깝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이선균 배우의 마지막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초대형 재난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올여름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버릴 대형 재난 스릴러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기상 악화로 한 치 앞을 구분할 수 없는 공항대교에서 100중 추돌사고가 일어나며, 붕괴 위기에 놓인 다리 위에 고립된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겪는 일을 속도감 있게 다뤘다.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 정원(이선균)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딸 경민(김수안)을 배웅하기 위해 짙은 안개를 뚫고 공항으로 향하던 중 최악의 연쇄 추돌사고 한복판에 놓인다. 완벽하게 고립된 상황 속에서 구조 헬기가 추락하고, 유독가스가 폭발하는 등 재난이 잇달아 터지며, 공항대교는 붕괴 위기에 놓인다.
이때 극비리에 이송 중이던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군사용 실험견들이 케이지에서 탈출하고, 다리 위 모든 생존자를 타깃으로 인식해 무차별 공격을 하면서 다리 위는 살아남기 위해 극한의 사투를 벌이는 생지옥으로 변한다. 주지훈 배우가 반려견 ‘조디’와 함께 인생 한 방을 노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렉카 기사 ‘조박’을 맡아 영화가 무거워질 때마다 적절한 위트를 구사해 균형을 잡아준다.
군사용 실험견들을 만들어낸 미치광이 과학자 ‘양 박사 역’은 천의 얼굴 김희원 배우가 맡았다. 붕괴 직전의 다리를 함께 탈출하는 노부부 ‘병학’과 ‘순옥’은 문성근 배우와 예수정 배우가, 골프선수 여동생 유라와 그의 매니저를 자처한 어딘가 조금 모자라 보이는 언니 미란 역에는 박희본, 박주현 배우가 맡아 강철 멘탈과 유리 멘탈의 극과 극 상황 대처 케미를 선보인다.
대형 재난영화답게 스펙터클에도 신경 썼다. 실제 300대의 자동차를 부수고, 광양의 1,300평 세트에 실 사이즈의 인천대교를 재연했으며, 그 안을 실제 안개로 가득 채웠다. 국내 최고의 VFX 기술을 가진 덱스터가 구현한 실험용 군용견 ‘에코’들은 100% CG임에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고, 사람보다 더 변화무쌍한 얼굴로 감정을 전달한다.
일상의 공간이 악몽의 현장으로 변하고, 인간과 가장 친근한 동물인 개들이 위협의 대상으로 바뀌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김태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남편은 필요 없고, 아이만 필요해!”라는 톱배우 김혜수의 도발적인 대사로 히트한 <굿바이 싱글>(2017) 이후 8년 만의 컴백작이다. 작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선보인 후, 관객들의 반응을 적극 수용해 영화에 감정이 과잉된 장면들을 과감히 덜어내면서 러닝타임이 짧아졌다. 감정을 강요하는 듯한 배경음악도 대폭 축소했다.
이선균 배우와는 오랜 술친구였던 김 감독은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시나리오를 준비하며 이선균 배우에게 주인공 정원 역을 제안했다. 이선균 배우는 “내가?”라며 깜짝 놀랐다는 반응이었다고 김 감독은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재난영화는 특정 배우들이 독식하는 분위기였고, 로맨스 드라마나 시대극에서 주로 활동했던 이선균 배우는 그런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스스로 자신의 연기폭을 제한하고 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뛰어난 정무 감각과 빠른 판단력,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안보실 행정관 정원 역에 이선균 배우는 찰떡처럼 딱 붙는 연기를 보여준다. 재난영화 특유의 무거운 톤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길을 잃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데 성공한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침착하게 진두지휘하며, 냉철한 판단으로 공항대교 탈출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정원의 모습에서 관객은 이선균 배우도 ‘블럭버스터 영화’에 걸맞을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선균 배우의 다음 블록버스터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선균을 ‘깐깐한 배우’라고 회고했다. 광대한 세트, 수많은 등장인물, 짙은 안개 속에서 동선을 맞추고, CG로 구현될 실험견에 대한 시선을 맞춰야 하는, 자칫하면 길을 잃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이선균 배우는 중심을 잡고 하나하나씩 맞춰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주지훈 배우는 “깐깐한 게 아니라 이선균 배우가 맞다. 식당에서 제육볶음을 주문했는데, 고등어구이가 나오면 안 되지 않나?
워낙 연기경력이 많은 베테랑 배우였기에 현장에서 감독과 스태프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체크할 수 있었다. 그래서 피곤한 적도 있었지만, 힘들 때면 함께 스몰토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덜어버리고, 다시 극의 중심을 잡아줬다”라고 말했다.
10.26 사태에 숨겨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운 <행복의 나라>
영화 <행복의 나라>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인 10.26 대통령 암살사건과 12.12 사태를 관통하는 정치재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유신헌법을 공포하며 영구집권을 꿈꿨던 박정희 대통령의 수하였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살해한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녹여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는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연출 장수봉, 1995)이나 영화 <그때 그 사람들>(감독 임상수, 2005),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 2020)에서 재현되기도 했다.
그런데 <행복의 나라>에는 같은 소재를 다룬 기존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다. 김재규와 박정희, 차지철 등 10.26 사태의 주요 인물들에 주목하지 않고, 그사이 숨겨진 주변부 인물을 주역으로 최초로 다뤘다는 점이다. 이선균 배우는 이 영화에서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으로 대통령 암살사건에 연루된 주인공 ‘박태주 대령’(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을 맡았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동안 밖에 있던 경호원들을 사살했다. 이후 법정에서는 사전에 모의한 행동인지, 강압에 의한 행동인지에 대해 다툼이 있었지만, 박태주 대령은 “나 살자고 부장님을 팔아넘기라고?”라는 한 마디로 평소 그의 강직함을 표현한다.
그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정인후 변호사’ 역은 팔색조 조정석 배우가 분했다. 정당하게 진행되지 않는 재판에 분노하며 박태주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정해진 결말로 짜맞춰져 가는 재판장에서 “이럴 거면 재판은 왜 하는 겁니까!”라고 일갈한다.
부정 재판을 주도하며 훗날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거대 권력의 중심인 합수부장 ‘전상두’ 역은 유재명 배우가 맡아 호흡을 맞췄다. 재판과정을 실시간으로 감청하며 재판 결과를 자기 뜻대로 주도하는 전상두가 “니가 무슨 짓을 하든 그놈은 죽어”라는 대사를 뱉는 장면에서는 야욕에 휩싸인 인물의 광기와 권력에 대한 갈구가 느껴진다.
이선균 배우가 연기한 박태주 대령은 실존 인물(본명 박흥주)이다. 평안남도 평원군 출생으로 한국전쟁 당시 가족과 월남했다. 명문고였던 서울고를 졸업하는 등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사 18기 졸업 후 6사단 포병 소위로 임관했고, 뛰어난 성적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6사단장이었던 김재규의 눈에 들면서 부관으로 발탁됐고,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옮기며 38세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대령으로 진급했다.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재판으로 불렸던 박태주 재판은 공판이 진행되는 도중 여러 차례 법정에 은밀히 쪽지가 전달된 사실로 인해 ‘쪽지 재판’이라는 조롱 섞인 타이틀이 붙기도 했으며, 첫 공판 후 단 16일 만에 최종 선고가 내려져 ‘졸속 재판’이라고도 일컬어졌다. 김재규는 부하를 살리기 위해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박 대령의 두 딸이 TV에 나와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울부짖었지만, 공범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늘 군대로 돌아가길 바랐지만, 조금만 더 곁에 있어 달라는 김재규의 부탁에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다. 현역 군인이었지만, 사형수로 형 집행당했기에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도 없었고, 비상계엄하에서 현역 군인에 대한 재판은 단심제였기에 형 집행도 가장 빨랐다. 수감된 교도소 벽에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라는 글을 남겼으며, 총살되기 전 “대한민국 만세! 대한 육군 만세!”를 외쳤다고 알려졌다.
불공정한 재판과정을 영화적으로 흥미롭게 재구성한 연출은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로 1,232만 관객을 동원한 추창민 감독이 맡았다. 시대를 관통하는 탄탄한 스토리와 묵직한 메시지를 담아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감독은 가장 중요한 법정 씬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촬영 전 수많은 자료를 철저히 조사했다.
2022년 10월 크랭크업 후 그는 “어려운 고비 때마다 묵묵하게 현장을 지켜주던 스태프들, 수다와 환한 웃음으로 촬영장을 이끌어 준 배우들, 모두 최고 중의 최고였다. <행복의 나라>에 참여한 모든 분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자리에서 이선균 배우는 “<행복의 나라>는 여러 의미에서 도전이 된 작품이었다. 잘 마무리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싶다. 감독을 비롯해 훌륭한 배우들,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해서 즐겁고 감사했다”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현재까지 영화 <행복의 나라>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국내 최대 영화배급사 NEW에서도 정보를 거의 알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크랭크업 이후 1년이 넘도록 구체적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채 베일에 싸여 있는 영화가 이제 곧 관객을 만난다. 영화 속 박태주 대령처럼 마지막을 맞이한 이선균 배우는 크랭크업 불과 1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의 마지막 모습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것이 그가 떠난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듯하다.
‘행복의 나라’로 ‘탈출’한 ‘나의 아저씨’…. 그곳에선 부디 ‘평안함에 이르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