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달라고 사흘 굶으며 간청
나를 버렸나이다
달마대사가 숭산(崇山) 소림사에서 면벽 좌선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다. 신광이라는 사나이가 찾아와 도를 묻고 스승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달마는 제자로 입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禪)이란 다른 가르침과는 달리 스승이 제자에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닦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한 데 이 사나이는 허락할 때까지 눈보라치는 가운데 서있기만 했다.
몇 일이 지나도록 받아들일 기미가 없는지라 뉘우침이 선행되지 않고는 안되겠구나고 생각하고 그 뉘우침이란 속세의 욕망같은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광은 ‘소인은 묵은 나를 버려버렸나이다’고 고했다. 달마가 문을 열고 보니 한쪽 팔을 잘라 선혈이 떨어지는 것을 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달마는 입문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신광의 첫마디가 ‘저의 마음의 불안부터 쫓아주옵소서’하자 달마는 그 마음을 들고 오면 안심시켜주겠노라 했다. 아무리 그 마음을 찾아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하자 그럼 안심시켜준 것이 되네 했다. 불안한 마음이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사라진 것이요 사라졌으니 안심을 찾은 것이라 했다. 한 팔을 잘라 없애기까지 하면서 스승을 찾은 이 사나이가 바로 달마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선종(禪宗)의 2대조인 혜가(慧可)스님인 것이다.
지금은 명문학교를 찾아다니듯이 옛날에는 이처럼 배우고 싶은 스승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소문난 스승의 슬하에는 팔도의 산하가 멀고 험하다않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조선조 성종 때 일이다. 대과를 급제하고 당상관의 고관 자리에 있는 반우형(潘佑亨)은 당대의 학문과 행실을 귀일시키는 도학의 태두인 김굉필(金宏弼)을 찾아가 추운 겨울눈을 맞으며 스승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김굉필은 허락치를 않았다. 이유는 반우형이 자신보다 벼슬이 높으니 벗을 삼을 수는 있어도 스승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시국이 험난하여 작당의 모략을 받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었다.
한데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며 사흘을 굶는 것을 보고 글방에 들였다. 그리고 다음 행실을 지킬 수 있을 때 스승이 되겠다’하고 18조로 이루어진 한빙계(寒氷戒)를 적어주었다.
집 안팎을 불문하고 앉을 때는 갓을 바로 쓰고 꿇어앉아라(正冠危坐) 종전의 욕망이나 포부나 생활습관을 대담하게 버려라(痛絶舊習) 욕심을 죽이고 분함을 무턱대고 참아라(窟慾懲憤)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日新工夫)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두 갈래로 갈팡질팡 말라(主一不二) 마지막 시작할때처럼 조심하라(愼終如始) 말의 뜻보다 왜 그 말이 나왔나를 먼저 알고 일이 생기면 그 조짐부터 감지토록 하라(知言知幾) 등등 오늘에 재활시키고 싶은 가르침 들이다.
팔도에서 몰려와
곧 옛 스승은 인간됨의 행실을 가르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글과 이치는 버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스승의 사표인 김굉필은 무오사화로 산골짝인 평안도 회천에 유배살이 하는데 그 명성과 소문을 듣고 팔도에서 몰려들어 방이 모자라고 청마루가 모자라며 마당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한국 행동가인 조광조도 바로 회천까지 찾아와 김굉필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다. 요즈음 교육에서 지식만을 가르치니까 스승을 찾을 필요가 없다. 행실과 철학을 가르치면 찾아가 사사하고 싶은 스승이 생기게 마련이다. 곧 현대의 학교교육의 큰 결함은 찾아 배우는 스승을 증발시켰다는 것과 굳이 찾아 배우지 않더라도 인생에 전환을 주는, 감명을 주는 스승이 없다는 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