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지배 아래 민족 의미 ‘여진’ 버리고 ‘만주’ 명칭 반포
1636년 국호도 ‘후금’에서 ‘청’으로 개명, 새롭게 태어나
대륙 입관 후 청은 만주 지역을 봉금(封禁) 상태로 유지
분쟁 대상되며 민족명 ‘만주’가 지명·국가명으로 바뀌어
1368년 몽골이 중국 지배를 포기하고 초원으로 돌아간 후 276년만인 1644년에 이번에는 만주가 입관(入關)하여 중국을 정복, 지배했다. 만주족은 어떻게 명(明)나라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곳에서 흥기해 후금(後金)을 건국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명나라의 요동(遼東)지역으로 쳐들어가 그 곳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여진족과 만주족은 서로 같은 민족인가 다른 민족인가? 후금에서 청(淸)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은 언제, 왜인가? 그리고 몽골과는 어떤 관계인가? 1644년 이후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더라도 입관 전 만주 땅에서 전개된 청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생소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초원으로 돌아간 몽골 원(元)나라 순제(順帝)는 명나라 군대가 가까이 진군해오자 수도 북경을 버리고 북쪽 초원으로 이동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북원(北元)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농경사회 지배를 통해 거두어들이던 국가재정 수입이 끊긴데다가 초원 깊숙이 공격해 들어온 명나라 군대에 쫓겨 다니다가 와해되고 말았다. 북원 붕괴 이후 몽골에서는 새로운 초원의 패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북원의 뒤를 이은 타타르와 원대부터 몽골 서부에 남아 있던 오이라트의 양자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
명나라의 요동경략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몽골을 북쪽 초원으로 몰아낸 이후 원(元)나라가 통치하던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고 북쪽으로 계속 진군했다. 그러나 원나라의 요동행성(遼東行省) 지역에는 여전히 나하추 등 몽골의 잔여세력이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요동으로 상륙해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省)에 해당하는 지역을 관할하는 군사행정 기구인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설치했다. 요동도사는 북으로는 몽골, 동으로는 여진, 남으로는 조선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명나라로서는 북방 군사 전략상 중요한 곳을 차지한 셈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교체 원과 명의 교체라는 국제질서의 변동은 한반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힘의 공백 상태가 된 요동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나 원과 명의 교체를 바라보는 고려 조정 내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일관된 대외정책은 시행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한 다음 명나라와 관계를 형성했다.
자유로워진 여진 이때 요동도사의 동쪽, 조선의 북쪽에 위치한 여진족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어느 세력의 통제도 받지 않는 상태가 됐다. 그러자 여진족은 소규모의 사회조직으로 분열, 거주지를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두만강에 접근한 일부 여진족은 조선과의 관계를 수립해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 하였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이들을 호의적으로 대했다. 여진 추장들은 조선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조공을 하거나 아예 조선으로 귀화한 자도 있었다.
영락제의 몽골 정책 변경 원과 명의 교체, 고려와 조선의 교체를 거쳐 형성된 국제질서는 영락제(永樂帝)의 몽골 정책 변화에 의해 다시 한 번 변동을 겪게 됐다. 영락제는 몽골과의 관계를 안정적인 전통 방식의 조공책봉체제로 전환하려 했다. 몽골의 타타르와 오이라트에게 조공을 요구하는 한편 그 대가로 대규모 말(馬) 교역을 허락했다. 그리고 몽골에 대해 막대한 무력을 사용, 이를 실현하려고 해 다섯 차례나 몽골 친정(親征)을 단행했다. 그러나 몽골에 대한 지배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락제는 결국 몽골 친정 후 돌아오다 도중에 죽고 말았다.
몽골과 여진을 격리 역사적으로 몽골 초원과 만주 삼림 지대에서 활동하던 북방민족이 통합되었을 때 거대한 국가를 형성하고 곧바로 한족들이 거주하는 남방을 위협했다. 영락제는 몽골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여진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몽골과 여진을 분리해 격리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진의 크고 작은 추장들에게는 명나라의 군인계급을 수여하고 기미(羈縻) 위소(衛所)로 편성했다. 위소관에 임명된 여진 추장들에게는 조공이라는 정치적 의무와 함께 무역을 할 수 있는 경제적 권한이 부여되었다. 명나라에 조공하러 가는 여진 추장들의 행렬이 영락년간에 상당 기간 동안 계속 됐다.
여진의 무역 확대와 정치적 통합 영락제 사후 군사력을 이용해 몽골을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고 소극적 방어정책만 이어졌다. 소극적인 대외정책으로 전환한 명에 대해 여진은 좀 더 많은 경제적 혜택을 요구했고, 일부 세력은 요동과 조선의 변경에서 약탈 등의 방법을 통해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몽골과 여진에 둘러싸여 있는 요동 방어를 위해 M자 모양의 변장(邊牆)을 쌓는 한편 여진에 대해서는 조공이라는 정치적인 정책보다는 마시(馬市) 또는 호시(互市)라 불리는 변경무역을 통해 여진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대외경제의 변화에 따라 여진사회에서는 명 중기 이후 명과의 무역권을 둘러싸고 부족 간에 정치적인 분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초피, 산삼, 진주, 버섯 등이 대명무역의 주요한 상품이었는데 이들 상품을 생산지에서 수집하는 것을 장악한 세력 집단과 호시에서 명과의 무역 거래를 장악한 세력 집단이 나타났다. 무역량이 많아짐에 따라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조공무역권의 통합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권리를 공고히 하려고 하는 정치적, 군사적 시도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 결과 16세기말 여진 사회는 대명무역에 적극 참여하는 하다, 호이파, 울라, 여허라고 불리는 해서(海西) 4부와 건주(建州)부, 대명무역에 참여하지 않는 야인(野人)여진(또는 동해여진)으로 재편됐다.
명과 무역전쟁을 치룬 누르하치 여진사회 내부의 대외무역 장악을 위한 분쟁에서 끝내 승리한 것은 건주부의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는 대외무역권을 장악해가는 한편 통합한 여진사회를 팔기(八旗)제를 통해 강고한 군사조직으로 만들어갔다. 또한 몽골문자를 응용,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는 만주어를 창안하기도 했다. 1595년 누르하치의 도성 허투알라를 방문했던 조선 무관 신충일(申忠一)은 당시 건주여진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누르하치는 여허부를 제외한 모든 여진을 통일해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하고 한(汗)이 되었다. 이어 1618년에는 그동안 여진 내부 분쟁에 간섭하면서 여진 통일을 방해했던 요동도사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명나라는 1619년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 근거지인 허투알라를 공격, 누르하치 세력을 섬멸하려고 하였다. 누르하치는 사르후에서 공격 시차를 이용, 명군에게 타격을 가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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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무관 신충일의 누르하치 도성 방문 기록(출처: 興京二道河子舊老城, (滿洲國)建國大學硏究院歷史報告1, 建國大學刊, 康德6년(1939) |
위기에 빠진 후금의 요동한인 지배 사르후전에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명의 요동도사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갔고 1623년에는 요양(遼陽)으로 천도해 이곳에 있던 한인(漢人)들을 지배하는 정복왕조가 됐다. 그러나 명군과 대치하면서 한편으로는 요동 한인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고, 경제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다. 조선과 몽골 관계는 단절 상태였으며 후금은 체제 붕괴의 위기에 몰리게 됐다. 결국 누르하치는 많은 수의 저항 한인을 도살하고 심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겨 후퇴했다. 이 난국을 헤쳐나간 것은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한의 자리에 오른 홍타이지였다.
홍타이지의 위기 탈출 홍타이지는 요동이 명, 몽골, 조선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조선을 공격해 명과의 관계를 끊게 하는 한편 무역관계를 형성하려 했다. 몽골과는 일부 세력과 연맹관계를 맺고 이를 이용해 몽골에 대한 지배를 강화, 몽골 칸의 지위를 차지해 나갔다. 그리고 몽골 지역을 경유해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내지를 공격, 명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대치중이던 산해관 지역의 전력을 약화시켰다. 정치체제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시도, 만주인들의 팔기체제에 더하여 요동한인 지배를 고려해 육부(六部) 등 명나라의 관료체제를 추가로 채택했다. 이로써 홍타이지는 요동 한인을 지배하는 중국식의 황제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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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제들이 동순하여 조상에게 제사 지내던 영릉(永陵) (중국 요녕성 신빈현 소재) |
청나라 건국과 입관 이러한 대내외적인 개혁을 통해 홍타이지는 취약했던 만주한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고 만몽한 체제를 확립했다. 그리고 원나라 때부터 몽골의 지배 아래 있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여진이라는 민족명을 버리고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 명칭을 만들어 반포했다. 1636년에는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이러한 사실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산해관을 뚫지 못한 청군은 여전히 고립되어 무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청나라는 명나라에 계속해서 화의를 요구하면서 때로는 몽골 지역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내지로 쳐들어 가 많은 인력과 물자를 약탈, 일시적으로 궁핍을 면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여러 차례 공격에 성공했다고 해도 섣불리 명나라와 전면전을 치러 승리할 자신은 없었다. 홍타이지는 중국 정복을 권유하는 한인 관료들을 나무라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자고 했다. 그는 죽으면서도 명나라와의 대치 상태가 그렇게 쉽게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홍타이지가 죽은 지 채 일 년도 안 된 1644년 농민반란군이 명의 수도를 함락시킨 것을 틈타 청나라는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장군 오삼계의 요청으로 손쉽게 입관했다.
청나라 입관 이후 텅 빈 만주 입관 후 청은 만주 지역을 봉금(封禁) 상태로 유지했다. 청나라 황제들이 가끔 이곳에 와서 조상들에게 제사지내고 가는 동순(東巡)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텅 빈 채 남아 있던 이 지역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지로부터는 한인들이 들어가고, 북쪽으로는 러시아가 동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 말에 이르면 서구제국주의 국가들과 일본이 경제적 이권을 노리고 이 지역에 대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마침내 일본은 여기에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고 식민통치를 했다.
근현대시기에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분쟁의 대상이 되면서 봉금지역은 만주 또는 Manchuria라는 지명으로 불리었다. 민족명이었던 만주가 이때부터 지명, 나중에는 국가명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 지명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동북(東北) 또는 동북삼성이라고 부른다.
청의 입관과 요동 봉금은 조선에게도 대외관계 측면에서 커다란 전환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지역이 힘의 공백상태가 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전개가 새로운 성격을 갖게 된 것도 이러한 대외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 다음 회는 연세대 임성모 교수의 ‘만주의 국제관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