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여고에서는 남자 선생님들이 시선처리나 행동 하나하나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여 선생님들도 처신에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다. 어느 날, 학교에서 가장 신참이었던 나는 회식 자리에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가게 됐다. 약속시간에 쫓기는 상황이었다. 이리저리 학교를 뒤지던 나는 아래층 복도 화분에 물을 주고 계시는 선생님을 발견했다. `아, 다행이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계단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한 걸음에 달려 내려가던 나는 그만…. 청소시간이라 잔뜩 물을 먹은 복도에서 엉덩방아를 요란하게 찧으며 쭈우욱 미끄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임 선생!"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부끄럽고 망신스런 일이라 얼른 일어나려 했지만 너무 아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남 선생님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지 않았다면 난 그 처참한 형벌의 시간을 얼마나 보내야 했을 까. 다음 날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교실에 들어갔다. 이내 "선생님, 어제 넘어지셨다면서요?"라는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학교에 소문이 다 난 모양이다. 난 `녀석들, 그래도 걱정은 되나보지'라고 생각하며 "아이고, 아파 죽겠다"고 엄살을 좀 떨었다. 그러자 아이들의 표정이 순간 싸늘하게 바뀌면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 왜 하필 박 선생님 앞에서 넘어지셨냐구요" 그제야 나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소위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인기 `캡'인 우상이었던 것이다. "그, 그건 우연이야, 우연이라구" "어쨌든 선생님 손을 잡았잖아요" 아이들은 억울하고 원통한 표정으로 책상을 두들겨 댔다. "미안, 내가 잘못했다" 백기를 들고 용서를 빌고서야 아이들은 책을 폈다. 요즘 나는 그 아이들과의 약속 때문에 물 묻은 복도를 조심조심 걷는다. 바닥의 물기를 피하느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제자들의 연적이 될 수 있는 여고의 여 교사기 때문이라고 자위하면서…. <임경희 대전여고 교사> ※선생님들의 작은 이야기를 보내주십시오. 잊지 못할 추억, 슬펐던 기억, 재미있었던 기억 등을 200자 원고지 5매 내외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