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어느 기업의 광고문이 새삼 떠오른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 그 날도 선생님은 어김없이 두 개의 도시락을 가져오셨습니다. 그 날은 두 개의 도시락을 모두 우리에게 주시고 "오늘도 속이 불편하구나" 하시며 교실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찬물 한 주발로 빈속을 채우시고는 어린 마음들을 달래시려고 그 후 그렇게 자주 속이 안 좋으셨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긴 세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내 추억의 언저리에도 이런 스승님이 한 분 계신다. 나는 삼십여 년 전 무주의 산간벽지 작은 초등학교에 다녔었다. 얼마전 한 친구가 어렵게 찾아 모은 초등학교 동창들의 주소록과 이금순 선생님의 연락처를 함께 보내왔다. 사는 일을 핑계로 잊고 살았던 까마득한 그 옛날의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너무 오랜만이라서, 저를 기억이나 하실는지..." "아, 그래 그래 생각 나. 눈이 동그랗고 새침했던, 정말 오랜만이구나. 어디서 어떻게 살았어 응?" "나는 요즘 심장이 안 좋아서 문 밖 출입을 못해. 귀도 안 들리고, 그런데 오늘은 잘 들리는구나" 그리웠던 음성을 듣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선생님과는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 그렇게 2년을 같이했다. 학교 옆 어느 작은 문간방에 세 들어 사셨는데 남편과는 사별 후여서 두 어린 아들과 어렵게 사셨다. 작고 컴컴한 방안에는 지독한 약 냄새와 함께 병약한 작은 아들이 늘 웅크리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우리들은 선생님을 돕겠다고 뒷동산에 올라가 나뭇잎을 긁어다 땔감을 마련해 준 일도 있었고 어머니를 졸라 콩이며 보리쌀 같은 것을 갖다 드리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해서 손수 옥수수 빵을 쪄먹여가며 한글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을 오후 늦도록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 틈틈이 가정방문도 잊지 않으셨던 자상하고 따뜻한 천사 같은 분이셨다. 어느덧 무정한 세월은 흘러 팔십의 더께로 귀멀게 하고 가슴까지 쉬 뛰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시집 한 권을 보내드렸다. "보내 준 책 잘 받았다. 자랑스럽고 아직도 너는 예쁘더구나." 사십을 훌쩍 넘은 당신의 제자가 아직도 어리고 예쁜 것일까. 선생님, 선생님은 저에게 영원히 밟을 수 없는 그림자이십니다. 그리고 멈춰진 한 장의 푸른 사진이십니다. 임송자 인천시 부평구 갈산2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