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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시네마 편지> 인디안 썸머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떠날 수도 없습니다

늦가을에 문득 찾아오는 짧은 여름날을 ‘인디안 썸머’라고 한다지요.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슬슬 겨울옷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쨍’ 하고 햇빛이 쏟아지고 사방에 푸르른 기운이 가득해지면 황망한 기분에 사로잡힐 테지요.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드는 짧고도 찬란한 순간.
돌아보면 우리의 생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시작과 함께 끝나버린 짧은 사랑이 있다면 그것 역시 인생의 ‘인디안 썸머’일 테니까요.
영화 ‘인디안 썸머’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 이신영(이미연 분)과 그녀의 변호사 서준하(박신양 분)의 이야기입니다.
사형수와 변호사를 다룬 영화는 많지만 죽음보다 깊은 절망 속에서 사형수와 변호사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더할 수 없이
매혹적입니다. 사랑이 찾아왔을 때 죽어야 한다니….
“재판을 거부합니다.”
그녀의 모습은 죽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평온하기만 합니다. 변호사 서준하. 출셋길이 보장된 해외연수를 기다리며 이신영의 항소심 국선변호를 맡은
그는 법정에서 처음 본 여자의 차가운 눈빛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말하지요. “죽고 싶단 말이 살고 싶단 말보다 더 절실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준하는 연수도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여자를 살리려 애씁니다. 신영은 “내 일에 너무 애쓰지 말아요. 자꾸 살고 싶게 만들지
말라구요”라며 사랑을 밀어내려 하지만 삶에 대한 모든 미련을 내던지고 온기 하나 없이 황폐해진 여인의 가슴에도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찾아듭니다.
촉박한 시간은 그들의 사랑을 더 절실하게 만들지요.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아 여자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함께한 단 이틀 간의 여행.
시골길의 햇살과 살에 닿던 바람, 처음으로 지어보이는 여자의 환한 웃음과 낮은 소리를 내며 잠든 남자의 곤한 잠….
하지만 살인의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서 다시 법정으로 돌아온 두 사람. 미치도록 살고 싶은 순간에 여자는 죽음과 맞닥뜨리고, ‘법의 진실’을
믿던 남자는 혼돈 속에 내던져지고 맙니다.
그렇게 짧을 수밖에 없었던 사랑, 행복한 미래보다 불행한 현실을 택하는 여자의 선택은 삶에 대한 그녀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겠지요. 갈 곳 없는
존재의 공허함,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떠날 수도 없고' 그 불안감과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허무주의적 시각. 하지만
영화는 그런 깊이 있는 철학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는 못하더군요. 충분히 아름다운 영상, 무척이나 격정적인 감정표현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로
땀 냄새가 풍겨나지 않고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화. 고통조차 표피적 낭만으로 잔뜩 치장된 영화. 감독은 '삶의 쉰내'가 싫어서 기억의
빙화(氷花) 속으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서혜정 hjkara@kf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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