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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001 교원문학상-소설 가작


그녀의 일기 속에 끼어 든 배추흰나비 애벌레와 지렁이
배 경 숙

열어 놓은 거실 창문으로 들어온 5월 오후의 햇빛이 코발트 색 바닥에서 잘게 부서진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치맛자락을 휘돌아 감듯 금빛
너울이 일렁인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책장 정리를 하다 찾아낸 빛 바랜 일기장을 열었다. 먼지가 매캐하게 피어오른다. 볼펜으로
또박또박 쓴 글씨에서 기름이 배어 나와 있는 것이 20여 년의 세월 저편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한 번 더 들려줄 준비를 하고 있던 것 같다.
그녀는 소파에 등을 대고 편히 앉았다.

19○○년 4월28일
두 손을 깍지를 끼고 등뒤로 올려 크게 하품을 했다. 왼쪽 검지손가락에 낀 묵주반지도 함께 하품을 한다. 눈가에 묻은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내던
나는 창가 쪽 그늘진 구석에 놓아둔 사육상자에 시선이 붙들렸다. 무 잎 한 장만 덜렁 들어 있지만 잎 뒤쪽에는 배추흰나비의 알이 다섯 개나
붙어서 생명을 키워가고 있다. 어제 아침에 강 선생이 낳은 지 3, 4일 됐을 거라면서 돋보기로 관찰해 보라고 해서 들여다봤을 때 깨알만큼 작은
보송보송한 연두색의 알을 보았다. 알이라니까 그런가보다 하지 꼭 만화책에 나오는 총알을 붙여 세워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옆의 수조에 삼분의 일쯤 담긴 흙 속에는 문제의 지렁이가 몸을 숨기고 있을 터였다. 지렁이, 시뻘건 살덩이, 길고 눈도 없는 것이 아무 데나
마구 기어다니고.
어제는 둘째 시간부터 다섯째 시간까지 3학년이 지렁이의 생김새를 관찰하는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다행히 지렁이는 강 선생이 준비한다고 해서 나는
그 외의 실험기구만 준비해 주면 됐다. 그런데 수업이 다 끝나고 과학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만 소리를 꽥지르고 말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지렁이 한 마리가 교실 바닥에서 몸을 뒤채고 있는 게 아닌가. 강 선생한테 도움을 청하자 강 선생은 지렁이를 버리는 대신
수조에 담아 사육상자 옆에다 놓았다.
강 선생은 작은 생명에 대해 아는 것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사육상자 안을 들여다보는걸 보더니 이렇게 이야기를 해줬다.
"5일 째가 되면 노란색으로 변할 거요. 검은 색으로 변하면서 애벌레가 나올 준비를 할 때가 일주일 정도가 됐을 때입니다. 애벌레는 나오면
알껍질을 먹어요. 강한 생명력이지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다가 수조를 툭 건드려 보았다. 아무 기척이 없다. 피부가 촉촉해야 산다는
녀석이 어제 마루바닥에서 괴로웠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바싹 마른 흙 한쪽에다 물을 한 컵 가만히 부었다. 습기가 적당한 곳을 찾아
살겠지.

19○○년 4월 30일
어느 새 벽시계가 4시 30분을 가리킨다. 오늘 저녁은 성당에서 청년미사가 있는 날이라서 누구 말대로 '땡! 교문 출발'을 하려고 퇴근 준비를
서둘러야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퇴근해서 저녁만 먹고 성당에 가는데도 여차하면 늦기 일쑤이니까 그럴 수밖에. 그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강 선생을
흘낏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말 없이 창가로 가 담배를 피워 무는 강 선생의 뒷모습이 만져질 듯이 들으며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당신은 누구세요?'
"지렁이가 말이요."
"녜?"
"보면 볼수록 사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자웅동체인데도 두 마리가 만나야만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외로움을 타는 남자의 속내 같고 눈도 없는데 빛과 어둠을 가리는 능력을 가진 것도
그렇고...."
"....."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지렁이 녀석이 점잖게 모자까지 쓰고 나와서는 고맙다고 합디다. 아름다운 곳에서 살게 해 줘서. 그런데 뭐가 아름답다는
건지 통 모르겠더라구요."
강 선생의 눈빛이 부딪쳐왔다.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나의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신이 아뜩해져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구원의 퇴근
종이 울렸다. 나는 서랍을 열어 핸드백을 꺼내고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강 선생은 두 팔을 번갈아 휘두르며 종희 얘기를 꺼냈다.
"또 쓰러졌어요. 올해 벌써 세 번짼데 녀석 날이 갈수록 몸무게만 늘어서 나를 이렇게 골탕을 먹입니다."
나는 입술 양끝을 올려 웃어 보였다. 덩치가 큰 종희를 안고 2층 보건실로 뛰었을 강 선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쓰러지는 횟수가 느는데도 정확한 병명을 모른다니..."
"걱정이겠네요."
그런데 내 말에 대꾸를 않던 강 선생이 몇 발짝 문을 향해 걷다가 돌아서서
"저녁에 시간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순간 이상한 경험을 했다. 성당에 가야한다고 말을 하려는데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본드라도 붙인 것처럼 말이다.
"바쁘면 늦게라도 슬슬 나와봐요. 시 도서관에서 논문 자료를 찾아야되는데 신 선생이 옆에 있어주면 잘 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손까지 떨렸다.
"밤을 꼬박 세워야 하거든요. 게으름을 피웠더니...."
강 선생이 뚜벅뚜벅 여덟 발자국을 걸어서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제서야 입을 열고 숨을 내쉬었다.
미사만 겨우 마치고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강 선생은 두꺼운 책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옮겨적고 있었다. 내가 다가앉자 씩 웃더니 하던 일을
계속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과 눈씨름을 하고 있고 책장 넘기는 소리와 외우는지 가끔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기만 했다. 라운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강 선생에게서 샴푸 냄새가 났다. 앞머리가 푸스스 이마로 흘러내린 강 선생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옆에 내가 앉아 있다는
걸 잊었을까?

19○○년 5월 2일
아침에 출근해 보니 까맣게 만지면 휘어질 것 같은 털이 온몸을 뒤덮은 애벌레 한 마리가 머리를 휘두르며 알 껍질을 먹어대고 있었다. 일 껍질을
다 먹으면 무나 배춧잎을 먹고 자란다니 내일부터는 시장을 돌아서 출퇴근을 해야겠다. 어린것은 귀엽다던데 영 맘에 드는 구석이 없다. 털을 보면
볼수록 온몸에 스멀스멀 뭐가 기어다닐 것만 같다.
수조 속 지렁이의 옆구리가 보였다. 어느 땐가는 머리인지 꼬리인지 모를 부분이 눈에 띈 적도 있다. 녀석이 가끔 빨갛고 길쭉한 끈으로 보이기도
하고 움직임이 때로는 경쾌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오늘 정말 하고싶은 얘기는 지금부터다. 중간놀이 시간에 종희가 쓰러지면서 머리를 다쳐 강 선생이 안고 인근 병원으로 옮겼는데 여덟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데 마침 양호선생이 출장 중이라 내가 강 선생과 교대를 했다. 강 선생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손이 왜
눈물에 젖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종희 할머니가 정말 검사를 해 봤을까요?"
"......"
"언젠가 종희 할머니를 본 적이 있어요.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데 정말 대학병원 가서 검사를 했을까요?"
강 선생은 자신과 종희를 동일시하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와 외롭고 가난하게 사는 종희의 아픔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지도. 먼 빛으로
본 교사이면서 대학원생인 강 선생은 나의 숲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숲의 속살이 군데군데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숲의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강 선생이 힘들면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둥지이고 싶다.

19○○년 5월 6일
끝내 다른 알속에서는 애벌레가 깨어나지 않았다. 환경이 갑작스레 바뀌는 바람에 부화하지 못한 것 같다는 강 선생의 말을 들으며 누르스름하게
말라붙은 알의 흔적을 본다. 얼마 더 지나면 그것마저도 사라지리라. 마음이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검은 색을 많이 띄던 애벌레는
무 잎을 먹기 시작하면서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용케도 애벌레는 줄기만 돌려놓고 부드러운 잎만 잘도 갉아먹는다. 겉모습도 빌로드 천 같이
부드러워 보인다. 그녀는 출근하면서 얻어온 배춧잎을 한 장 사육상자 안에 넣어주고 나서 문을 채웠다. 지금 누가 나더러 보물이 뭐냐고 물으면
'배추흰나비 애벌레 한 마리'라고 하면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줄까? 나비가 될 때까지 잘 자라주기를 기도하면서 6학년 실험 수업 준비를 하느라
부산스레 움직이는데 강 선생이 들어섰다. 면도를 하지 않은 꺼칠한 얼굴로 습관처럼 담배를 피워 물고 창가에 선다.
"종희 할머니가 붙잡고 웁디다."
"...."
"어쩌면 사는 꼬라지가 나보다 더할 수가 있단 말이요. 지하 단칸 셋방에서 그나마 파출부일이라도 하니까 사는 거지..."
나는 마음이 또 가라앉았다. 꼬라지, 지하단칸셋방, 파출부가 가슴 한가득 추가되어 매달렸다. 그런데 왜 그 순간 추가 왼쪽 검지손가락에 끼운
묵주반지를 건드리며 지나갔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강 선생의 입에서 놀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온 건 그 때였다.
"거참, 이상하다."
강 선생은 지렁이가 담긴 수조 앞에 서 있었다.
"전 반에는 내가 수조를 돌려놔 보기도 했는데 또 이쪽이네?"
웃었다. 강 선생의 목소리가 밝아져서.
"외로움, 그럴까요?"
또 웃었다. 지렁이가 알까, 외로움을?
"에라. 사랑이라고 해두죠."
나는 끝내 쿡쿡 소리내 웃었다. 강 선생도 하하 웃었다. 강 선생은 들어올 때보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실험실을 나갔다. 나도 전염병처럼 번진
나아진 기분으로 수조 앞에 섰다. 애벌레는 열심히 배춧잎을 갉고 있는데 지렁이가 애벌레 쪽에서 몸을 꿈틀댄다. 녀석은 내가 제 하는 양을
훔쳐보고 있는 줄 죽을 때까지 모를 거다. 투명이라는 단어를 모를 테니 흙 위로만 아나오면 아무도 못 보는 줄 알 거다. 음흉한 녀석. 눈도
코도 없는 녀석이 감히 머리, 가슴, 배로 나뉜 고등동물을 좋아하다니. 저는 겨우 강모나 있는 주제에 다리가 8쌍이나 있고 녹색 빌로드 외투를
입은 예쁜 애벌레 옆을 얼찐거리다니. 그런데 나는 지금 일기를 쓰다가 애벌레도 지렁이의 존재를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그렇다면 멋진 사랑 이야깃 감이 되지 않을까?

19○○년 5월 8일
"박 선생이 병가요. 이틀이지만 우리 학교는 전출입생이 많으니 신 선생이 맡아서 생활기록부 전산망을 관리해 주시오. 부탁합니다."
교감 선생의 말에 나는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을 했다. 입이 쑥 나왔다. 일손이 달린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사무가 구분되어 있는데 박 선생의 일이
또 내 몫으로 떨어졌다. 하긴 평소 우리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딱히 입을 내밀 일도 아니다. 전산보조원인 박 선생과 과학조교인 나는 교사의
사회에서 열외인 기분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부담이 되는 것은 박 선생만큼 컴퓨터를 만지는 일에 자신이 없어서일 것이다. 나는
뾰족한 수 없이 서류철과 디스켓, CD를 들고 전산실로 들어갔다.
전산실에는 덜렁 컴퓨터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키도 크고 예쁜 박 선생과 방이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자기의 방은 자기의 냄새가 나도록
꾸며야한다'는 교장 선생의 말도 들을만한 것 같다. 컴퓨터를 켰다. 커서가 몇 번 깜박이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초기화면이 떴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래,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거야. 이틀뿐이잖아.'
전산실은 외딴섬처럼 조용했다. 조용하다못해 고즈넉했다. 지나다닐 사람이 별로 없는 한 쪽 구석에 있어서 박 선생을 평소에 자주 볼 수 없었나
보았다. 창문께로 다가앉으니 다행이 운동장 한 조각이 내려다보인다. 소리는 정지한 채 햇살만 가득 운동장에서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 햇빛입니까? 돈 한 푼 내지 않아도 에너지를 만들어 1분 1초도 쉬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주고 있으니. 햇빛 에너지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잘 난척하는 저 녹색 애벌레를 봐요. 4, 5일 동안 실컷 먹고 잠을 잘 때도 햇빛 에너지를 받으면서 자라지요. 먹은 만큼,
잠 잔 만큼, 허물 벗은 만큼 자라지요.'
노크도 없이 문이 드르륵 열렸다. 나는 햇빛에 강 선생의 기억에 취해서 천천히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강 선생의 놀란 얼굴이 나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 선생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쩐 일이요? 신 선생이."
"선생님은요?"
"전출생이 있어서요. 박 선생 어디 갔어요?"
박 선생이 결근을 해서 내가 전출입생 때문에 오게 되었다고 하자 강 선생은 주먹을 부르쥐며 분개했다. 하루 이틀 미룬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닌데
꼭 이렇게 해야하느냐는 것이었다. 침묵도 긍정이니 말을 해서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하며 얼굴이 벌겋도록 교장교감 선생을 성토했다. 나는 괜찮으니
아무 말도 말라고 애원하다시피 해서야 강 선생은 돌아갔다. 전출생 이야기를 빼먹은 채. 다시 생각해도 참 따뜻하다. 따뜻한 사람이다. 참 저녁을
잘 못 먹어서 식중독에 걸렸다는 박 선생은 뭘 먹었을까? 이틀씩이나 병가를 내려면 얼마나 아파야 할까?

19○○년 5월9일
강 선생이 나른한 오후 햇살을 몰고 과학실에 들어섰다. 내가 사육상자 앞에서 세 번째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애벌레를 훔쳐보고 있을 때 강 선생은
얼굴에 온통 웃음을 머금은 채 옆에서 함께 애벌레를 훔쳐봤다. 지렁이 녀석도 함께.
'지금이 몸이 자라는 때요."
내 귀에 대고 강 선생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눈앞이 깜깜해져서 나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봐서 알겠지만 이 번 잠에서 깨면 허물을 벗고 한 번 더 열심히 먹어댈거요. 마지막으로 잠을 자고 허물 벗고 그 다음에는 번데기가 되어서
나비가 될 준비를 하지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면서 지렁이와 애벌레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자나깨나 자기만 쳐다보는 지렁이 녀석을 애벌레가 눈치를 챘을까? 첫 번
째보다 두 번째보다 세 번째 잠자는 애벌레의 침대가 지렁이와 더 가까운 것은 우연일까? 나는 눈가가 후끈해지는 걸 느낀다. 그래 식물도 감정이
있다는데 하물며 움직이는 동물인데, 느낌이 없겠나? 느낌. 강 선생의 옆얼굴을 보니
'느낌을 말해 보라구. 그 남자가 풍기는 냄새 같은 거.'
하고 다그치던 친구가 떠올랐다.
'음, 어두운 것 같으면서도 밝고,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리고 생명을 사랑해. 지렁이도 애벌레도... 또 많은 여자들이 그를
좋아해.'
'그 남자가 좋아하는 게 아니고?'
'아니야,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친절해.'
'바람둥이의 전형이구나.'
웃었다. 강 선생은 다른 처녀 선생들도 많은데 나를 좋아한다는 걸 잘 아니까.
"천신만고 끝에 나비가 되어서 세상에 살러 나오면 햇살이 젖은 몸을 말려줘요. 나비는 그 다음에 어떻게 할까요?"
"날아가겠지요. 멀리."
강 선생의 눈에 얼핏 물기가 어렸다.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신 선생을 볼 수 있으면 참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
"나를 똑바로 봐요."
강 선생이 내 손을 잡으면서 얼굴을 가까이 댄다. 눈빛이 눈부시다.
"보기 싫소?"
고개를 저었다. 슬픔이 가슴 밑을 흐른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어렸을 때부터 철들도록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 속에서만 살았다는 강 선생은 그래서
벌레와 친해졌다고 했던가. 강 선생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강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가락에 천천히 입맞춤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묵주반지에 대고 눈을 감은 채 입을 맞췄다.
"옆에만 있어 준다면 나는 신 선생의 그 분 앞에 무릎도 꿇을 거요."
강 선생의 말이 귀 안을 울렸다.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모든 세포가 곤두서서 방망이질
을 한다. 강 선생이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골마루에서 다다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팔을 푼 우리는 서로 등을 대고 돌아섰다. 강 선생이 문께로 나가며
"저녁에 전화 할 건데 괜찮지요?"
하고 머리를 긁는다.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저녁 내내 나는 박 선생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강 선생은 전화로 감미로운 G선상의 아리아를 들려주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지만 먼저 걸려온
박선생의 차분하다못해 울림통을 울려 나오는 웅얼거림 같은 전화목소리 때문에 심사가 꼬인 실처럼 비틀려 있었다. 박 선생은 저녁에 꼭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찻집에 다다른 것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난 뒤였다.
박선생은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10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찻집에는 연인인 듯한 젊은 남녀 한 쌍이 어깨를 편안히 기대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굳어지려는 마음을 풀어볼
양으로 물을 홀짝 마셨다.
"G선상의 아리아, 들으셨어요?"
'녜?"
"강 선생님..."
박 선생의 눈이 반짝하고는 빛을 잃는다.
"뭐라구요?"
모든 감각기관이 박 선생을 향해 열렸다. 온 신경을 팽팽히 당긴다.
"분위기가 디카프리오 같지 않아요?.....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귀 안으로 벌떼가 몰려든다. 수십 마리, 아니면 수백 마리가 날아들면 이런 소리가 날 것이다.
"...... 다른 사람도 아닌 그에게서,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그 남자에게서 직접 들었으면...아니예요.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는 직접
들으나 누구를 통해서 알게 되더라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마찬가지겠죠."
나는 와들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가 힘들어 물을 마셨다. 젊은 두 남녀는 마주보고 입맞춤을 하는가.
'눈앞에서 싹 꺼져버려!'
"왜 저한테 강 선생님 이야기를..."
박 선생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 사라진다.
"그 사람 다음 순례지가 신 선생님이라는 걸 진작에 알았어요. 그런데 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거예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제가."
박 선생 이전에 또 어떤 곳을 거쳤을까? 그런 남자에게 순례자라는 말은 얼토당토않다. 나는 절대 강 선생의 순례지가 아니다. 숨을 깊이 마셨다가
천천히 코로 내 쉬었다. 가슴이 꽉차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허전하지도 않다.
"그 사람 할머니 뵈었나요?"
고개를 흔들었다.
"할머니도 병의 흔적을 갖고 계세요. 약하긴 하지만. 한.센.병."
박 선생이 한. 센. 병. 하고 꼭꼭 찍어 말을 하면서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한센병. 전에 어디선가 읽은 기억은 있는데. 어감이
부드럽다. 이런 이름의 병도 내가 환절기 때마다 의례적으로 앓곤 하는 감기몸살처럼 온몸이 쑤시고 아플까? 그런데 왜 박 선생은 '할머니도'라고
할까?
"소록도에 그 사람 부모님도 살아 계세요."
나를 지탱해주던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바닥으로 통나무처럼 뚝 떨어진다. 실제로 나는 그 순간
옆으로 쓰러졌었나 보았다. 박 선생의 외마디 소리를 들은 것도 같고 그냥 보얗게 앉아 있는 걸 본 것도 같다.

19○○년 5월10일
따끈한 커피 잔에서 나오는 향내를 맡으며 책상에 엎드려 어젯밤의 꿈을 헤집어 보았다. 강 선생이 밤새도록 뭉그러진 손으로 나를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강 선생을 피해 다니느라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다가오는 얼굴이 뒤틀린 여자가 막무가내로
내 옷을 잡아당겼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말이 되어 나오질 않는다. 그런데 마이크처럼 뭉그러진 손에서 소리가 났다.
'내 곁에 있어줘요.'
'사랑해요.'
귀를 막았다. 이번에는 'G선상의 아리아.'
머리를 흔들며 다 식은 커피를 입에 가져가는데 행진곡이 울렸다. 5월의 아침 햇빛을 받으면서 행진곡이 아이들을 운동장 가운데로 불러모은다. 조기
꼬불꼬불 늘어선 아이들은 1학년일 테고 고 옆이 2학년 그 옆이 아! 3학년. 강 선생님. 그녀는 늘어진 어깨로 자리에 와 앉았다. 나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린데. 강 선생님은 분명히 박 선생에게 사랑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 하자고는 않고 부모님 이야기를 먼저
했다고 했지. 강 선생은 자신이 미감아 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도구로 나를 선택한 건 아닐까?
애벌레가 식성 좋게 배춧잎을 먹어댄다. 이번이 마지막 먹음일 텐데 지렁이는 애벌레 쪽에서 꾸물댄다. 저 빨간 살덩이가, 저 하등동물이 사랑을
알면 어쩌겠다는 건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날아가면 그 뿐인데. 사람인 나도 이렇게 복잡해진 머리와 가슴으로, 창백해진 믿음으로 앉아 있는데.

박 선생은 단칼에 무 자르듯 돌아섰다고 했다. 지금은 정상인으로 살아가지만 무서워서 싫다고 했단다. 자식이 잘못될까봐 싫다고 했다던가. 그리고는
씩씩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몸살을 앓는 것 같다고. 아니 멀쩡한 남자에게 상처를 줘서 벌을 받는 것 같다고. 박 선생은 끝내 그녀의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했다고. 강 선생은 처음부터 신 선생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자기가 유혹했었다며 욕해도 달게 받겠노라고도 했다.
전산실에서 본 강 선생의 얼굴이 모자이크처럼 찢어졌다 일그러졌다 붙는다.
행진곡이 귀청을 때릴 듯이 울린다. 황급히 몸을 운동장 쪽으로 내밀었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엉긴 채 교실로 들어가는데 먼지도 보얗게 따라
나선다. 나는 카메라가 훑듯 운동장을 눈으로 훑는다. 없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왜 강 선생을 찾는가? 분명히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게다. 벌떡 일어났다.
'강 선생님. 지금 내가 가요. 그러니 말 해줘야해요. 내게 바라는 게 뭔지.'
아이들이 교실에서 떠드는 소리가 왁자하게 나고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니 아직 강 선생은 안 들어온 게 분명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려고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골마루 판자 바닥 위로 개미가 줄지어 간다. 도대체 저 개미는 학교에 무슨 먹이가 있다고 자리를 잡았을까. 바보들.
"신 선생님."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강 선생이 복잡한 얼굴로 앞에 서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불쌍한 사람.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저 사람은 얼마나 건강한가. 아무 데서도 한센병의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잖은가. 강 선생은 담배를 물고 운동장 쪽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한참 기다렸어요 과학실에서.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줄도 모르고."
"...."
"그런데 왜 울어요. 설마 어젯밤 내내 생각하느라 눈이 짓무른 건 아닐테고."
나는 울다가 웃었다. 강 선생은 내 어깨를 툭 치며
"수업 끝나고 갈게요. 할 얘기가 있어요."
하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의 소리가 문을 여닫는 것을 따라 와악하고 퍼지다 도로 갇힌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할 얘기가 하, ㅏ,
ㄹ, o, ㅒ, ㄱ, ㅣ로 분해되어 온 몸에 내려 앉는다. 발자국을 땔 때마다 비그르르 웃으며 따라온다. 어지럽다. 봄에 느낀 아지랑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과학실로 돌아와 2차시에 있을 4학년 실험 수업 준비를 했다. 어렸을 적에 하늘을 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좋은데
떨어질까 봐 뱃속이 간질간질 했었지. 나는 구름 위를 걷듯이 4층으로 걸어 올라가 전산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을씨년스럽다. 어제의 박 선생이 하얗게 바랜 얼굴이 새삼 떠올랐다. 차가운 마음으로 앉아 있었을 박 선생. 박 선생이 마셨을 공기를 흠뻑 들이
마셨다. 박 선생이 걸었을 교실 바닥을 이리저리 걸어보았다. 박 선생이 만졌을 창틀을 만지고 벽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건 아니다.
아니야. 나는 강 선생을 좋아하지 않아. 아니 그런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 사랑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나는 강
선생으로부터 자유롭다구.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어. 박 선생처럼 씩씩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씩씩할 수 있어.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는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꺼버릴 듯이 눈을 부라린다. 비밀 번호라. 어제도 켰는데. 비밀번호. 비밀번호.
한하운 시인이 어떤 시를 지었더라? 한 고개 넘어서 손가락 하나 묻고 한 고개 넘어 또 한 개의 손가락을 묻었다던가. 그 옆에만 가도 살 썩는
냄새가 날거야.
행진곡이 울리면서 방송으로 남자선생의 목소리가 꽝꽝 울린다. 오늘부터 중간놀이를 하니까 빨리 운동장으로 나오란다. 그녀는 전출생디스켓을 만들기
시작했다. 햇살은 벌써 따가울 텐데. 나는 골방에서 살 썩는 이야기나 기억해냈다. 흐흐흐. 손등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아, 피, 이건 피, 썩은
살이 아니라도 살은 뜯긴다. 썩은 살이 아니라도 냄새가 난다. 비릿한. 생리. 반쯤 마른 오징어.
점심 시간이 되어서야 과학실로 내려왔다. 아이들이 정리를 했다고는 하나 실험기구며 교실 바닥이 어지럽다. 오후에 수업할 준비를 대충 해놓고
교무실로 디스켓을 가지고 갔다. 교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보통 때는 주번교사가 지키는데 오늘은 동굴 속 같다. 갈 수도 없고 서성대는데 전화가
때르릉 울렸다. 새삼스레 교무실을 둘러본 나는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된 숨을 몰아 쉬었다.
"초등학교입니다."
'나 교감이요. 교장선생님 교무실에 안 계십니까?"
"안 계십니다."
"교장 선생님 뵈면 강 선생 상태가 안 좋다고만 전해 주시오. 종희는 괜찮고."
전화가 끊겼다. 한센병은 잠복기간이 10여 년이고 발병은 갑자기 되는게 아니라던데. 종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3학년 교실로 올라갔다.
3학년1반 아이들은 벌써 책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서고 옆 반 아이들도 집에 갈 준비로 부산하다. 나는 옆 반 교실로 무조건 들어갔다.
"강 선생님이 어떻게 됐어요?"
돋보기 쓴 선생님의 대답이 커다란 망치처럼 내 귀를 두드렸다.
"나도 잘 모르지 종희를 안고 가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 밖에는."
간신히 교실을 나왔다. 상태가 안 좋다. 교통사고가 나서. 종희는 괜찮다.
애벌레가 움직임이 둔하다. 벌써 때가 되었나? 흙 위로 나온 지렁이가 사랑의 몸짓을 한다. 뭄부림을 친다. 바보 지렁이, 바보 종희, 바보 강
선생님, 바보 나. 지렁이는 한참동안 제 몸을 부비다가 애벌레를 넘겨보다가 저 혼자 늘어져 있다가 천천히 흙 속을 파고든다. 아주 천천히.
애벌레는 가만가만 지렁이를 흘깃거리다가 지렁이가 흙 속으로 완전히 꼬리를 감추자 배춧잎을 부지런히 먹어댄다. 너희들 서로 사랑하는구나. 말
안해도 알아. 그리고 슬퍼하는 거지? 아서라. 서로 갈 방향이 다르잖니. 너는 기다리고만 있어도 날개에 금가루 은가루를 묻히고 하늘을 날 수
있어. 너를 부러워하는 것들이 많단다. 이 세상은 넓고 참 아름답고 멋진 곳이야. 그런데 지렁이를 보렴. 눈도 코도 입도 없어. 화려한
날개는커녕 다리도 없지. 어둠 속에서 축축한 습기를 즐기며 사는 너보다 훨씬 못난 동물 같지 않은 동물이야.
5시에 울리는 차임벨 소리를 들으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과학실 문을 열고 닫고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 교문을 나섰다. 햇살이 따갑다.
해가리개를 만들어 하늘을 봐도 해가 보이지 않았다.

일기는 여기서 일단 끝나는 듯했다. 벽시계가 어느 새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녀는 일기장을 소파 위에 둔 채로 일어났다. 주전자에 물을 담아
원두커피 몇 알을 띄워 가스 렌지 위에 얹고 불을 약하게 켜 두었다. 집안 구석구석 커피 향이 배는 걸 그도 그녀도 좋아해서 가끔 그렇게 한다.
그녀는 다시 소파 위의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분명하진 않지만 뭔가를 더 적어 놓았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몇 장을 넘기니 그녀의 기억대로
날짜도 없이 휘갈겨 쓴 몇 장의 글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날짜는 없지만 앞의 날짜를 짐작해서 그녀 나름대로 날짜를 눈으로 적어가며
읽었다.

19○○년 5월11일
나는 지렁이의 안내를 받으며 흙 속을 헤치고 걸어갔다. 숨을 못 쉬면 어쩌나 하는 생각과는 달리 공기는 쾌적하고 새벽의 동틀 무렵처럼 적당히
감춰진 햇빛 탓인지 모든 사물이 아름답게 보였다. 마을은 사람이 사는 곳과 아주 흡사해서 흙 속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지렁이는 간편한 옷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흉하다기보다는 전부터 잘 알던 것 같은 친근함 마저 들었다.
"아가씨. 부탁이 있어서 초대를 했습니다."
지렁이는 여름날 앉는 들마루로 나를 안내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눈치채셨겠지만 저 애벌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며 웃었다.
"그런데 곧 갈 거라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지렁이를 차마 쳐다 볼 수가 없어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가지 말라고 했더니 자연의 법칙이니 어쩔 수가 없다고... 나는 그딴 것 모르니 가지 말라고 했더니... 울면서 죽고 싶다고... 제발
부탁입니다. 애벌레더러 잡지 않을 테니 죽지는 말라고 전해 주세요. 꼭."
지렁이가 주춤주춤 내 무릎께로 다가앉았다. 어느 새 뻘건 살덩이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뒤로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갈길도 달리고 시냇물도 휙휙
뛰어넘었다. 그런데 앞에서 달려들어오는 또 다른 뭉그러진 살덩이., 아, 살, 아, 있, 는 살덩어리들.
나는 손을 잡는 다른 손에 두 손이 잡힌 채 눈을 떴다. 어딘가, 처음 보는 천정이다.
"정신이 드냐?"
엄마다. 집은 아닌데. 크레졸 냄새와 함께 간호사가 내려다보며 링겔병을 만지고 나갔다.
"디 큰 딸년 묻는 줄 알고 며칠 못 잤더니. 인제 됐다."
엄마가 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 강 선생님."
"쯧쯧, 박 선생한테 얘기 들었다. 이런 말해서 안됐다만 참 나쁜 사람이다. 어째 그런 사람이 멀쩡한 처자를 넘보는 거냐 그래."
"얼마나, 어떻게 됐어요 엄마."
"많이 상했다더라. 사람노릇 할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만."
나는 그 자리에 도로 누웠다. 강 선생이 살아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지요. 강 선생만 있으면 개똥이 아니라 더한
곳이라도 괜찮아요.

19○○년 5월 13일
병원에 달려갔을 때 강 선생은 반 토막의 몸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종희를 안고 쓰러지면서 대형트럭의 바퀴에 두 다리가 그 자리에 절단되었는데
종희는 타박상만 입었다고 했다. 강 선생은 내 얼굴을 아예 보려고도 않고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려버렸다. 강 선생의 할머니는 병원에 오지도 못하고
몸져누웠다고 했다. 불쌍하신 분.

끄트머리에 붙이는 글은 일기장의 끝 부분에 휘갈겨 쓴 것인데 어떻게 날짜를 적어볼까 하다가 그냥 읽기로 한 부분이다.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놀라움이 되살아난다.

나는 그 후로 학교에 꼭 두 번 갔다. 한 번은 강 선생이 1차 수술을 끝내고 바로 강 선생의 물건을 정리하러 3학년 1반 교실에 갔었고 한
번은 내 짐을 꾸리러 갔었다. 짐이랄 것도 없지만 과학실에 있는 교사용 책상 서랍을 정리해 쇼핑백에 담아 나오던 나는 습관처럼 사육상자 앞에
섰는데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지 못한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먹이가 모자랐는가하고 살펴보았지만 누렇게 말라 바닥에
뒹구는 배춧잎을 발견하고 말았다. 나는 그만 불가사의한 사실 앞에서 입을 틀어막은 채 울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웃는 듯이 그렇게 죽어 있었다. 죽어서 썩은 것이 아니라 파랗게 말라 있었다. 마른 누에처럼 아름다운 미이라로.

그녀는 등을 소파에 깊숙이 묻고 눈을 감았다. 애벌레와 지렁이의 일이 어제의 것처럼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그 뒤로 지렁이와 애벌레를 어떻게
했나 생각은 없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코끝에 커피 향이 배어든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천천히 내뱉는다. 가슴 가득 세월이 남는다. 휠체어를 타지만 자상한 강 선생과 두
딸의 따뜻함이 가슴이 터질 듯이 차 오른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뜨고 거실바닥에 에너지를 쏟아 붓는 햇살을 보며 일기장을 덮었다. -끝-
충북 청주 남평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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