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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시네마 편지> 간장선생


사회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라
“나이가 들수록 관객을 너무 피곤하게 하는 영화는 옳지 않다고 느낀다 ”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말처럼 '간장선생'은 '나라야마 부시코'
'우나기' 같은 전작들보다는 덜 가슴 아프고 덜 날카로운 영화다. 영화의 대부분은 간장선생과 마약, 술, 동화 같은 꿈에 의존해 사는 그의
동료들이 자아내는 코믹한 유머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 유머가 따뜻함으로 위장한, 전쟁 상황을 살아가는 무력한 소시민의 현실에 대한 자조임은
영화를 볼수록 분명해진다.

아카키 선생님, 당신은 모든 환자를 ‘간염’이라고 진단 하셨지요. 그래서 '간장선생' 이란 별명까지 얻게되었고요. 한평생 간염 박멸을 위해
뛰어다닌 당신은 세상이 이토록 간염 천지인데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고 분개하고 좌절하셨지요. 새 현미경을 들여오고 조명을 바꿔보는 등 간염
균 정체 파악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셨지만 당신이 간염박멸에 실패한 이유는 발병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제 머리맡에는 일본의 정신과 의사 노다 씨가 쓴 '전쟁과 인간' 등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선생이 박멸하기로 마음먹은 간염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번진 소위 '15년 전쟁기'(1931년 만주사변∼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에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중국과 만주 등에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자행한 만행을 깊이 들여다보려 한 사실 기록들입니다. 전쟁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며 사람을 가장 비인간적 상황에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자폭탄으로도 나타난 치명적 간염 바이러스 균의 전염경로가 바로 일본사회와 일본인에게 있었고 아직도 있음을 이 기록들은 잘 보여주고
있지요.
선생의 동료이자 몰핀 중독자인 이치로 선생은 러시아와의 '노몬한 전투' 이후 쇼크를 받아 폐인이 되었습니다. 속성 해부실습을 위해 3시간만에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짐승처럼 생체해부 했다는 기억 때문이었지요. 선생의 간염박멸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던 도쿄의대 출신 의사들. 그들도
동창회 자리를 벗어나선 다 군의관과 병원장들로, 그 야만스런 현장의 집행자와 책임자들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던가요.
"중상자를 우선 살려야한다는 인명중시의 안이한 관념은 버려라. 전선에 복귀할 수 있는 병사는 치료하고, 그 외의 병사는 죽게 놔두어라"라는
거듭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명령대로 했을 뿐"이란 답변으로 그들을 합리화 할 수 있을까요. 간염박멸을 같이 외쳤던 그들이야말로
진짜 간염바이러스가 아닐까요.
일본사회와 일본군 속의 간염바이러스를 찾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현미경과 조명이 있은들 치료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선생의 치료는
일본인들 속에 15년 전쟁기, 아니 한국강점에서부터 자리잡은, 다른 인간에 대한 감정의 마비, 전쟁기억의 마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메르데카' 등 과거 일본군의 전쟁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파시즘 영화와 파시즘 역사교과서가 난무하는 요즘의 일본 분위기에서 선생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을 한 줄기 양심으로 격려해 주어야 할까요. 하지만 아카키 선생님, 지나간 기억들에 대한 깊은 응시와 반성만이 더 큰 박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알고 계시겠지요. 선생의 계속되는 간염박멸에 건투를 기원하며.... /서혜정 hjkara@kf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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