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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001 교원문학상 소설 가작 - 1999년 덕적도


안 종 수

"또 왜 전화야, 뭐? 대낮부터 술 처먹구 잘 헌다. 알았어. 내 알아보구 전화할 테니께 끊어. 끊으라니께."
우리가 구 기사 님이라고 부르는 구천석 씨는 핸드폰을 접어 넣으며 투덜댄다.
"허구 헌 날 술만 처먹으면 시도 때도 없이 전화질여. 에이구"
투덜대는 그 목소리에는 그래도 짙은 정감이 배어있음을 숨기지 못한다. 가끔 귀찮게 해도 곁에 두지 않으면 못미더워 걱정되는, 의지하고 따르기에
보살펴 주지 않을 수 없는 철없는 동생에 대한 맏형의 투정 같은 느낌이 한껏 묻어있다.
나는 구씨 아저씨에게 자주 전화를 하는 그 남자를 두 번 보았다. 그냥 평범하고 순박한 섬의 어부였다. 이곳 덕적 본 도에서 구씨 아저씨의 소형
쾌속선으로 30여분 정도 거리에 있는 울도 라는 섬에 사는 사십대 사내이다.
"즈이 딸내미들 보구싶다구 술만 처먹으면 내헌티 전화질여. 그깟 생선 몇 푼이나 된다구 맻 마리 잡으면 이놈 저놈 불러모아 설랑 술 마시구
저러는겨. 예편네만 불쌍허지"
구씨 아저씨의 말투는 그의 표현대로 충청도 사투리에 전라도와 황해도 말이 조금씩 가미된 삼도 짬뽕이라는 게 옳다. 구씨 부친은 육이오 때
월남했고 모친은 덕적도 여자요 부인은 충청도 여자라니까 그럴 만도 했다. 덕적도라는 섬의 위치를 보면 구기사의 인맥관계가 수긍이 간다.
덕적도는 지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경기, 충청, 황해 삼도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예전의 조기 성황기내지 꽃게 철에 따라
오고갔던 어부들의 행로를 짐작해보더라도 이해가 된다. 특히 황해도 피난민과 조기를 따라 이동했던 전라도를 포함한 서해안 어장의 교류는 그들을
자연스럽게 섞이게 하여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문제여. 예편네 그물 끌르게 하고, 지는 생선 맻 마리 잡아 설랑 대낮부터 저 모냥여"
어디선가 뻐꾸기가 울고 한낮의 고요한 정적 속을 황새 서너 마리가 긴 곡선을 그리며 오르내린다. 창 밖을 내다보며 말없이 서있던 총각 김 선생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피워 문다. 그는 가끔 창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듯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교무실 중앙에 놓여있는 낡은 쏘파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던 홍 선생이 고시랑거리는 구씨 아저씨의 투정이 시들해 갈 즈음에 한마디한다.
"또 나리 아빠한테서 온 전화 구만"
구씨 아저씨는 응원군을 만난 듯 한껏 볼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내가 지 뭐나 되는지 심통거리나 화통거리만 있으먼 나헌티 하소연이니 거 참..."
"다 그게 구 기사 덕이지.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하소연 할 곳 없으니까 그러는 것 아니겠어."
구씨 아저씨는 언제 그랬냐 싶게 넉넉한 표정으로 싱그레 웃으며 홍 선생의 맞은편 자리에 몸을 넓게 펴고 앉으며 한마디한다.
"그렇지유 뭐, 지가 누구헌티 술 처먹구 그러것써. 나두 그 사람 맘 다 알어유. 오장 터지겄지. 술 마시면 지 마누라 패고 살림 때려부수고
지랄을 쳐도, 잔정이 많고 이웃지간에 내남없이 잘 어울리구. 퇴끼같은 두 딸네미는 끔찍이두 여겼는디... 하나는 중핵교 1학년 막내는 초등핵교
5학년 인디 지금 인천에 가 있구, 그나마 일인당 삼십 만원씩 보조해준다는 돈도 아직 송금하지 않으니께 이래저래 울화통이 터져갔구 설랑 하루가
멀다하고 술 처먹구 전화 해대구 그러는규."
반백에다 대머리인 홍 선생이 담배를 빼들며 한마디한다.
"그 어린것들 인천에 내다놓고 오죽하겠나. 사람 사는 것이 뭔데. 힘들고 가난해도 가족끼리 함께 사는 재민데, 어린 자식새끼들하고 같이 못살고
떨어져 사는 맘이 오죽하겠어."
공문처리에 몰두하고 있는 성 선생이 일이 거의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야무지게 내뱉는다.
"썩을 놈들, 책상 앞에 앉아서 한다는 것이... 한번 와 보고 결정을 했어야지. 순전이 머리로만 계산 한 거야."
교무실 정면을 왼쪽으로 치우쳐 자리잡은 최 선생도 거든다.
"정말 그래요. 경제논리로만 정책을 결정하고 먼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곳이 고향이며 통폐합된 덕적 본 도 학생들을 통학시키는 학교버스 기사인 이 기사가 둥글고 큰 얼굴에 힘을 주며 한마디한다.
"이건 농어촌 다 죽이자는 거요. 이런 식으로 작은 학교 없애고 통폐합하면 어떤 놈이 이곳에 살어. 고향에 발붙이고 살려고 왔는데, 누가 살 것
습니까?"
그는 뭍에서 직장생활 하다가 한 두 해 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사업을 하며 학교버스 기사로 근무하고 있는 삼십대 후반의 예비 학부형이다.
"맞어, 지금 섬에 젊은 사람이 어딨어, 웁써. 울도만 해도 학교 웁서지니께 애들있는 부부들은 살구 싶어두 못 사는겨. 안 그렇겄어."
구 기사가 정색을 하고 말한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학부형이자 이곳 면사무소 총무계장 이라는 사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94년 1700여명이던 덕적도 인구가 이제는
1300여명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학교가 없어진 일곱 개의 부속 섬에 사는 사람들의 수는 앞으로 더욱 격감하게 아예 무인도가 될지도
모르는 형편이라고 탄식하듯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도서벽지에서 그래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학교다. 빌어먹어도 제 자식은 가르치려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의 본능과 같은 욕구가
아닌가. 그나마 있던 학교마저 없어지면 학령기의 자녀를 둔 사람들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떠나기 싫어도 고행을 등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인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현관 앞 계단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김 선생이 들어와 이 기사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교무실 뒤편에 세 대의 컴퓨터가 놓여 있고, 두 여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한 사람은 주간학습 안내문을 작성하고 있는 병설 유치원 교사인 김 선생이고, 한 사람은 금주의 식단표를
짜고 있는 처녀 영양사이다. 컴퓨터 자판 찍는 소리와 한쪽에선 작업이 끝났는지 인쇄하는 소리가 또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에 섞여
이질적으로 들린다. 인쇄를 마친 유치원 김 선생이 인쇄가 끝났는지 사뭇 험악하다가 갑자기 고요해진 분위기를 깨고 밝은 목소리로 주위를
환기시킨다.
"이 좋은 날에 다들 왜 그런 표정들이세요?"
얼굴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는 김 선생의 해맑은 웃음에 모두들 싱겁게 웃고 만다.
아무리 도서벽지 학교라도 있는 것은 다 있다. 없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사람이다. 내가 이십 여 년 동안 지냈던 인천에서는 그렇게 넘치던 사람이
이곳에는 없다. 있기야 있다. 그러나 지금 학교 교무실 창으로 내다보이는 학교 운동장에는 인적이 없다. 오월의 눈부신 햇살이 내리고, 드문드문
뻐꾸기가 울고, 햇살에 반짝이며 미풍에 흔들리는 신록이 싱그러운 운동장에는 한낮의 고요가 숨죽이며 흐를 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오후 3시
이후에는 학교버스가 아이들을 실어가 버리고 학교에는 열 명 미만의 교직원만 남아있다.
학교에서 보이는 언덕 위의 교회 지붕과 그 아래로 낮게 펼쳐진 몇 채의 집, 비탈진 밭, 손바닥만한 몇 데기의 계단식 논. 그리고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말을 나는 두 달 여 전에 이 학교 부임해서 이곳 부임 선배인 홍 선생과 성 선생에게 들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공기 좋고 바닷물 깨끗하고 경치가 좋다는 말은 했지만 예전처럼 인심이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특별한 생산물이나 특산물이 있는 곳도 아닌 평범한 그런 섬이다. 경기도에서 인천시로 편입된 후에도 이곳 사람들은
인천과 이곳을 구분해서 부른다. 인천에서 덕적도 들어간다. 인천으로 나간다, 라고 표현한다.
예전 한 때는 고기가 많이 잡히고 황해도 월남 피난민이 몰려, 지금은 폐교되어 허물어져 가는 북리 어항 어귀에 있는 명신 초등학교 학생수가
800명이 넘었었다니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은 한물간 섬이라는 것이다. 이곳 덕적 본 도에서 좀 나가면 우럭이 조금 잡히고, 서포리 해수욕장이
알려져 있어 그나마 물때를 아는 낚시꾼이나 여름 한철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이 있는 뿐인 별 볼일 없는 가난한 섬이라는 곳이 나보다 일 이년
먼저 부임한 그들에게서 얻은 이 섬에 대한 정보였다.
거기에 덧 붙여서, 너 이제 도서벽지 섬에 왔으니 오랜만에 찌든 도시를 떠나 심신을 정화시키러 왔다고 생각하고 잘 적응해라. 그러나 외로움은
각오하라. 이곳 사람들을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멀리 하지도 마라.
나는 마지막 말을 알 듯 모를 듯 이해했다. 섬 주민들이 예전처럼 교사를 대하지 않고, 교사를 승진점수를 따러 철새처럼 왔다가 철새처럼 가버리는
그렇고 그런 선생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르게 대한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다. 앞에서 표현한 철새라는 표현은 '이미자'의 노래인 '섬 마을
선생님'의 애틋한 노래가사와는 그 뉴앙스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도 누군들 사람이 그립지 않겠는가. 젊은 시절 한때는 친구가 그립고, 짝사랑하던 여자가 그립고, 무엇인지 딱 잡아 말할 수 없는 알 수 없고
가보지 않은 많은 것이 그리워서 그 그리움으로 얼마나 외로웠던가.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외로움 마저 젊은 날의 감미로운 추억으로 다가오는 내
나이 사십 후반. 되돌아보면 그 그리움들은 목마를 때 찾는 탄산음료나 물과 같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구하는 맛이 다양한 탄산음료가 아닌,
고향 집 우물 맛처럼 변하지 않는 그리움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이곳 학교는 전 직원이 함께 자리하는 기회가 많다. 전 직원이라야 모두 열 명이다. 교감, 홍 선생, 성 선생, 나, 최 선생, 김 선생,
유치원 교사, 영양사, 올 구월이면 퇴직하는 구 기사, 이 기사가 전부이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모두 교무실로 모인다. 잡무도 처리하고 수업
준비도 한다. 이런저런 대화도 오가지만 대체로 학교는 고적하리 만치 조용하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운동장에서 노는 애들도 없다. 가끔씩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나가는 몇 대의 차들이 학교 옆으로 난 북리로 통하는 길을 지나갈 뿐이다. 절간 같은 한 낮의 고요와 권태가 나른하게
흐른다.
99년 올해부터 1.5 킬로미터 남짓 거리에 있는 중고등학교와 통합되어, 구월이 되면 중고등학교에 초등학교 교실을 새로 지어 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있다. 지금은 행정적으로만 통합이 되어 교장은 중등에서 교감은 초등에서 맡고 있다. 구월이 되면 행정적 통합분만 아닌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의 유일한 학교인 덕적초중고등학교가 생겨나는 것이다.
또, 오 스잔나의 음률이 방정맞게 울린다. 구기사가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귀에 댄다.
"누구여, 왜 또 전화여. 응 응... 아 글세 알았다니께... 그건 나도 물러. 내도 니 맴 알어. 응, 응 그려 참어야지 어티켜. 알었어.
끊어, 끊으라구."
통화 끝 부분은 항상 핀잔 투로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끊어'로 마무리되곤 한다.
"여하튼 바쁘셔, 울도 유지답게 정치하랴, 상담하랴, 야단치랴."
남도태생인 성 선생이 한마디한다. 그는 정의파로 한마디를 하더라도 칼칼하고 딱부러지게 한다.
"나리 아빠, 승질 나것지. 어린 딸년들 인천에 내보내고 폐교된 학교 둘러보는 맴이 오죽 하것어 이."
맛있게 담배를 피우던 홍 선생도 거든다.
"맞아, 그까짓 보조비 및 십 만원이 문제겠어. 애들 때 놓고 눈에 밟혀 잠이 오겠나."
그는 오십 초반의 얼굴이 길고 반백머리에 귀밑머리가 짙은 말이 적고 중후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학교 직원 중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많이 받는
축이다. 늦게 둔 초등학교 막내아들이 아빠를 찾는 전화가 많이 오기 때문이다. 나도 역시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딸이 전화를 자주해서 그와는
막상막하로 전화를 자주 받는 편이다. 평균 한 달에 두세 번 만나볼 수 있는 어린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그와 나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아저씨는 행복한 줄 아셔. 나리 아빠가 허구 헌 말 전화해대고 하소연하고 투정을 부려도 기댈 사람은 아저씨 뿐이라, 좋지 않습니까."
구씨 아저씨는 예의 그 큼지막한 볼웃음을 지으며 느긋한 어조로 말한다.
"허긴 그려. 지가 누구한티 하소연 할껴. 내 집에 세 들어서 형제처럼 산 게 얼마 간디. 한 식구지 뭐."
나는 울도에서 무시로 걸려오는 나리 아빠와 구씨 아저씨의 관계를 두어 번의 통화를 통해 금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리 아빠라는 사내와 구씨
아저씨의 통화내용을 간단하게 줄이면 줄거리는 간단하다. 왜 울도에 있는 학교를 없애서 내 새끼를 인천으로 보내 이산가족이 되게 했느냐는 나리
아빠의 분통과, 왜 내게 그런 화풀이를 하느냐고 짜증을 내는 구기사의 타박이 그 내용의 전부였다. 이런 저런 다른 이야기도 오고 갔겠지만
결론적으로 마지막에는 폐교 이야기로 끝나고 만다. 한쪽에서 분통을 터트리면 한쪽에서는 같이 닦달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그려, 그려 알았어, 니맴
내 다 알지, 하고 부드럽게 어르면서 전화를 끝내는 단순 반복형 전화였다.
구씨 아저씨에게 술 마시면 전화를 하는 나리 아빠라는 사내는 울도에서 구씨 아저씨와 형님 아우로 지내며 한집에서 지내는 사람이다. 그곳 울도
분교가 폐교되자 울도 분교에서 학교 기사로 근무하던 구씨는 올 팔월에 퇴임을 조건으로 본교인 이곳으로 전근을 해서 그도 역시 우리처럼 주말
부부가 되어 학교 관사 바로 내 옆방에 기거하고 있다.
교육부의 소규모 학교 통폐합으로 올해 소야 분교와 울도 분교가 폐교되어 이제 덕적도에는 새로 통합된 덕적 초중고교 하나만 남게 되었다. 덕적 본
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소야 분교 학생들은 배를 타고 이곳 학교에 다닐 수 있지만, 울도 분교 학생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인천에 나가 학교를
다녀야 한다. 인천의 친척집이나 여유가 있으면 새로 얻어놓은 셋집에서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 구 기사는 나리 아빠가 걸핏하면 술 마시고
전화해대는 까닭을 털어놓았다.
"생각혀바이, 자식새끼라구는 두 딸년 뿐여. 어린 새끼들, 그 것 두 지지배여. 그것들을 인천에다 내다 놓구 같이 따라가 살 형편이 못되니께
환장할꺼 아녀. 벌어논 돈이 있어. 아니면 도둑질 할껴. 지가 나가서 뭘 할껴. 배운 거라곤 괴기잡는 거 뿐인디... 미치는 거지. 돈은 돈대로
나가지, 보듬고 키우던 딸년들, 나이나 많은가. 엘마나 찡할껴이."
언제는 징혀징혀 하더니 이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한다.
"나야 뭐, 자식새끼들 다 커서 물에 나가 제 힘으로 살아들 가고, 퇴직하면 울도에서 괴기나 잡으며 마누라하고 살면 그 뿐이지만 그 사람이야 나
하구는 달러. 한창 나이라 군 하지만 괴기가 그전처럼 많이 잽히나 보듬어 줄 새끼가 옆에 있나, 마누라가 하루좽일 그물 끌러서 그나마 그럭저럭
먹구 사는디... 마누라만 불상허지..."
"교육부 장관 물러나야 해요. 아니 그런 교육부 장관 임명해놓고 계속 못 들은 체 하는 이놈의 정부, 하기는 그놈이 그놈이라 더니..."
교무실 밖 현관에서 담배를 피우고 언제 자리에 앉아 있던가 싶던 총각 김 선생이 다시 뻑뻑 소리나게 담배를 피우며 퉁명스럽게 한 말이었다. 그의
그런 열에 받친듯한 말투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올해 이곳 덕적도에 나, 최 선생, 김 선생이 부임해 왔다. 모두들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그것에 왔다. 나는 어찌 이렇게 쉽게 섬에 왔나 하고,
최 선생은 어어? 하고 왔단다. 총각 김 선생은 아니 이게 아닌데, 하고 왔단다. 왜 그리 되었는지 세세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모두들
떠밀리듯이 왔다는 얘기다. 그 만큼 도서 벽지 근무 선호도가 낮아졌다는 것이다.
일 이년 전만 해도 옹진군과 강화군이 인천시로 편입된 이래 근무평정 1, 2 순위 그것도 연이어 받아야 원하는 도서 벽지에 근무 할 수 있었다.
1, 2년 전만 해도 사오십대 교사 중 유능한(?) 교사만이 올 수 있던 이곳이 벽지점수가 하향되자 우리같은 교사들도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찬들 고추장도 안 먹는 다잖아요. 지금 교육부 장관은 편견이 심한 것 같아요. 순전히 교육 개혁의 대상을 교사로만 잡은 것 같아요. 교육부
장관 물러나야 해요."
컴퓨터을 조작하던 최 선생이 한말이다. 삼십대 초반의 최 선생은 보살 같은 사람이다. 큰 머리에 토실토실하게 살이 찐 컴퓨터에 능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부조리와 어떤 종류의 폭력이건 용납하지 않는 평화주의자다. 그러나 요즈음의 교육세태에 대해 말할 때어는 단호하게 직설적이다.
"정치가가 교육을 안다면 얼마나 안다고. 어떻게 교육개혁을 정치, 경제논리로만 하려고 해. 정말 한심해."
총각 선생이 한숨쉬듯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맞장구를 친다.
이곳 섬은 내 첫 부임지였던 육 학급자리 산간학교와는 또 달랐다. 섬은 그곳과는 다르게 폐쇄적이고 좁았으며 답답했다. 육지의 산간 벽지와는
다르게 갇혀있는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이곳까지 하루 두 번 쾌속선이 왕복한다. 칠십 여 킬로를 오십 분에 달라는 쾌속선이
하루 두 번 왕복하는 것은 이 섬의 큰 혜택이다. 우럭 낚시와 몇 군데의 해수욕장이 개장되는 여름 휴가철에는 사백여 석의 정원이 꽉 찰 만큼
관광객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배 삯도 왕복 삼만 원이 넘어 이곳을 잘 아는 사람들 외에는 쉽게 배를 타지 못한다.
이곳에 발령을 받고 첫배를 타던 날이 새롭다. 갑판 위에서 소주를 마시며 언젠가 타보았던 통통거리며 달리던 여객선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들여왔다는 프린세스호는 이층으로 사백여 석이 넘는 안락한 좌석과 쾌적한 실내공간으로 그 안에는 깨끗한 매점과 대형 텔레비전이 앞뒤로 네 대나
설치되어 있는 대형 여객선이었다.
우선은 배가 깨끗하고 빨라서 기분이 좋았다. 아침 9시50분에 출발하는 배를 타고 생전 처음 먼바다를 행해하는 기분은 상쾌함을 넘어 순수하고
신선한 흥분과 감동을 전해주었다. 이제부터 집을 떠나 낯설고 불편한 섬 생활이 시작된다는 우울한 기분은 사라지고, 아침 햇빛을 받으며 달리는
배의 창 밖 풍경을 보며 새로운 고장에서의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설레는 기대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리 중국 해 쪽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달라는 크고 작은 배들, 그냥 떠있는지 움직이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큰배들, 등대가 서 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무인도인지 아니면 사람이 살고 있는지 분간하기 힘든 섬들을 지나치면서, 새로 보는 모습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다는
푸르고 깊고 넓게 물결쳤으며 수평선은 물보라 같은 안개를 품으며 끝없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정말 좋았다. 정말 잘 온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달에 두 세 번은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것 만으로도 좋다고 생각된 지경으로 기분이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눈이
시원하게 확 트이고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덕적도에 도착해서 바라보이는 선착장 모습은 한마디로 전형적인 섬 마을 그대로였다. 선착장 오른쪽으로 죽 늘어서 있는 자그마한 횟집들과 슈퍼마켓과
담배 가게,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들과 매여 있는 몇 척의 배들이 있었다. 선착장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이십여 미터 오르면서 길옆에 매표소
식당 노래방 당구장 중국집 등이 옹기종기 모여 서있었고 그 길을 따라 몇 백 미터 지나 언덕을 내려서면 면사무소와 중고등학교가 있다. 그 아래
덕적도 중심지라 할 마을인 진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는 우체국 농협 파출소 보건소 식당과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양옥들도 꽤 있었다.
가파른 언덕아내 펼쳐진 작은 마을은 서포리와 북리로 뚫린 두길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포리 쪽으로 뚫린 길은 바다를 끼고 산길로 이어져
있었고, 북리로 난 길을 따라 다시 작은 언덕을 넘어서면 그 아래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배에서 내려 자은 언덕을 두 개를
넘어야 초등학교에 다다르게 된다. 덕적도는 섬이지만 섬 안에 들어서면 산골에 온 느낌이 든다.
언덕에서 본 초등학교는 산을 뒤로하고 옆으로는 북리로 난 길을 끼고 아늑하게 자리한 조용한 산골학교였다. 나는 첫눈에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도 꿈에 그리듯 그리운 내 첫 부임지였던 산골학교와 분위기가 너무 흡사했지 때문이었다. 다시 이십대 초반의 첫 부임지에서 느꼈던 설레 임을
실로 오랜만에 맛보았다.
아담한 학교 운동장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이층으로 된 학교 건물이 있다. 왼쪽에 교장 관사가 있고, 오른쪽 뒤로는 강당과 식당이 있었다.
식당 옆에는 관찰용 간이 기상대와 작은 정원이 있고, 학교 뒤는 비탈이 완만한 산이 있다. 운동장 옆과 아래쪽에 교사들이 기거하는 관사가 있고,
관사 옆에는 실습지가 있다. 전형적인 시골 학교의 모습이었다. 학교는 이곳에서 가장 아늑하고 조용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1, 2학년 복식학급을 담임하게 되었다. 1학년 13명, 2학년 10명. 1학년을 담임한 것도 복식학급을 맡게 된 것도 교육경력 24년
만에 처음이었다. 1, 2학년 다 합쳐봐야 23명, 전체 인원으로는 많지 않다. 그러나 한번 가르쳐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주당 수업시간이
24시간이지만 좀 부풀려 말하면 단일 학급을 맡아서 가르치는 것보다 두 배 이상 힘이 든다. 교육과정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감을 잡지
힘들었다. 두 학년 합동으로, 교과통합으로, 주제통합, 분리수업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이끌어 보지만 만족스런 수업이 되지 못하고 시간이
모자라 허둥대는 때가 잦아 짜증스럽고 힘겨울 때가 많다.
수학 시간에 1학년은 합동과제를 해결하게 하고, 2학년은 개별지도를 하고 있는데 떠들썩하여 1학년 쪽을 바라보니 교실 한 구석에서 엎치락뒤치락
레슬링을 하고있고, 몇몇 녀석들은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며 강아지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1학년을 다그쳐 자리를 정리해 주고 있는데 2학년
남자녀석들은 티격태격 무슨 일인지 맹렬하게 다투고 있고 여자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무슨 얘기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있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
소리쳤지만 그들은 다투고 낄낄대는데 열중해 있어 내 목소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열이 올라 목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웅성웅성 자리에 앉는다.
"손 머리, 눈감아!"
늑대처럼 으르렁거리자 잠시 조용하다.
"선생님, 대훈이 눈떴어요."
"선생님, 은비 실눈 떠요."
기가 막혀 실실 웃음을 참다보면 어느새 내 지시도 없이 모두가 눈을 뜨고 히히 헤헤거린다. 쉬는 시간만은 정확히 챙기는 녀석이 꼭 있다.
"선생님, 11시 20분, 쉬는 시간이네요."
여기저기서 선생님 오줌 마려워요, 물 마시고 싶어요, 하고 떠들어댄다.
"그래, 화장실 다녀와."
항복하듯이 수업을 마친다.
쉬는 시간이면 교무실에 모여 10분의 휴식을 취한다. 내가 복식학급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자 3, 4학년 복식학급을 맡고 있는 최 선생이
동감이라는 듯 열을 올린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소규모 학교 통폐합은 적극적이면서 왜 소규모 학교 복식수업은 그대로 두는 거지요?"
성 선생이 코방귀를 뀌며 말한다.
"교육의 질 좋아하시네. 교사 한 명이라도 줄이려고 통폐합하는 건데, 어떻게 복식학급을 해소하겠나. 여기도 복식학급이 둘인데, 복식학급을
해소하려면 교사 두 명이 증원되어야 하는데 그리 되면 통폐합해서 교사 두 명을 줄일 효과가 없지 않나 이 말이야."
커피를 마시고 있던 이기사가 목소리를 높인다.
"정말이지 그거 심각한 문제요. 우리 애가 곧 1학년에 입학하는데, 걱정이 태산이라 구요. 여기 학부형들도 다들 복식학급 문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생각만 하면 뭘 해. 행동으로 보여야지. 학부형들끼리 뭉쳐 가지고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거 아닌가. 말로만 해서 되나."
성 선생이 말하자, 홍 선생도 한마디한다.
"맞아, 우리보다는 학부형들이 나서야 돼. 보라구, 지금 여기저기서 통폐합에 반대하는 학부모 집단행동들 말야. 정부에서도 그런 곳의 통폐합은
일단 보류하고 있잖아. 우는 아이 젖 준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며 당하기만 하는 거야."
머쓱해진 이기사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처럼 내뱉는다.
"알기야 알죠. 그렇다구 여기 섬사람들이 뭘 어떻게 해요. 숫자가 많아요 아니면 배운 게 많아서 앞장 설 사람이 있어, 먹구 살기에 바쁜데
시간이 많어, 아니면 교통이 좋아. 힘들어요 힘들어."
홍 선생이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수긍하듯이 말한다.
"하긴 그래, 여기 처음 통폐합 결정할 때만 해도 그랬어. 교장이 학부형들을 속인건 아니지만, 학부형들이 통폐합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들도
드물었지. 중고등학교와 통합하면 영어나 예체능과목은 중고등학교 교사들에게 배우는 줄 알고 좋아했더니 말 다했지 뭐. 그 뿐인가, 새로운
시설에다가 최첨단 교육기자재 확보 등등, 엄청나게 좋아지는 줄 알고 있는 학부형들이 대부분이야."
"감언이설로 사기 친 거지 뭐, 완전 사기야."
성 선생이 혀을 차듯이 내뱉은 말이다.
99년 올해부터 1.5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행정적으로 통합되어 교장은 중등에서, 교감은 초등에서 맡고 있다. 지금은
따로 떨어져 행정적으로만 통합되어 있지만, 구월이면 중고등 학교에 교실을 새로 짓고 초등학교는 이사를 가야한다. 초등학교에서는 행정적인 통합은
수긍하면서도 물리적인 통합은 못마땅해한다. 굳이 이사를 가야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관리비를 줄이고 교장, 교감이 한 명씩 줄인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공감을 했다. 그러나 약간의 관리비를 줄이기 위해 멀쩡한 초등학교를 없애고 교실을 새로 짓고 비좁은 데로 합쳐야 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계산으로도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초등학교 교사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학교 오른쪽을 지나 북리 어항으로 뚫린 언덕같은 시멘트로 포장된 이차선 신도로이다. 이 신도로는 아직은 포장이 안된 서포리로 통하는 좁은 길과
연결되어 있다. 북리와 서포리를 연결하는 신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학교 왼쪽으로 나있는 가파른 산길이 서포리와 진리의 유일한 통로였단다. 그러니까
지금은 지름길인 언덕길을 이용하지 않고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는 북리 우회도로를 이용하고 있다. 덕적도에서 그래도 제법 논밭이 많고, 넓은
백사장이 펼쳐 저 있는 해수욕장이 있는 곳은 서포리다. 외지 사람들에게는 덕적도보다 서포리 해수욕장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서포리
해수욕장이 덕적도에 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학교 왼쪽으로 나있는 서포리로 통하는 가파른 산길은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다. 가끔 산나물을 뜯는 몇몇 할머니들이 옛 추억을 더듬듯이 나물
보따리를 짊어지고 지팡이를 끌며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길이 나의 산책로 겸 운동코스가 되었다. 왕복 40여분정도 걸리는
산길을 먼저 부임한 황 선생과 성 선생의 뒤를 따라 올라 갔다. 이 산길의 처음 삼분의 일은 밋밋하다가 점점 경사도가 심해져 마지막 산꼭대기까지
300여 미터는 직선코스로 가파르게 올라야하는 급경사였다. 숨이 턱밑까지 차 오르고 땀이 온몸에 배이면 곧 서포리가 눈에 들어온다. 산꼭대기에서
급하게 내려하다가 집이 있는 논밭이 있고 길이 있고, 길 건너 소나무 숲이 있고 백사장, 그리고 바다 가 있다.
바다는 한없이 펼쳐진 망망 대해가 아니다. 그 건너편에 섬들이 있다. 덕적도는 모두 40여 개의 군소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이다. 가까이는
소야도, 지도, 울도, 핵폐기물 설립 문제로 알려진 굴업도. 사람이 살고 있는 일곱 개의 섬 외에도 무인도로, 한낱 바위섬으로 존재하는 40여
개의 섬으로 덕적 군도를 이루고 있다.
서포리와 진리를 나누는 산꼭대기에 서면 서포리가 내려다보인다. 아침이면 장난감 같은 배 두어 척이 하얀 물살을 가르며 어디론지 떠난다. 고요하고
한적한 아침바다를 가는 배를 보면 바다 가 잠을 깨는 것처럼 보인다. 안개에 둘러싸인 섬들은 제 모습을 감추고 신비스런 자태로 그림처럼 그 곳에
있다. 그냥 그곳에. 바다는 배가 떠나고, 섬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신선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산골 출신인 나는 입체적으로 가로막힌 첩첩산중 육지에서 보지 못했던 평면적인 바다의 무한한 넓음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모른다. 바다는 나에게
해방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바다는 프로이드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드의 세계처럼 쾌락과 본능의 출렁임이 용암처럼 들끓는 곳. 그 곳에서
해방과 자유을 찾고자 했던 내 바램은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것에 대한 헛된 꿈인지도 모른다.
아침저녁으로 오르다 보니 주의의 풍경이 익숙해지고 정이 들었다. 20여 년의 도시생활에서 이제는 돌아와 고향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어느 시
구절처럼 좋았다. 그러나 섬은 물과는 다르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는, 바다 가 보이지 않는 섬 어느 구석에서도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 가
보인다. 내가 속해 있는 섬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섬은 먼 육지와 떨어져 홀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느낌은 섬사람들 모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원초적인 외로움이다. 섬이 고향이 아닌 잠시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다 떠날 사람들에게 그 외로움은
더하다. 하현달 어스름할 때 소쩍새는 울고, 개구리 울음소리 먼 빗소리처럼 아득히 들려오는 밤이나 혼자서 바닷가에 앉아 낮게 찰싹대는 파도소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있노라면 낭만보다는 외로움이 앞선다. 섬을 떠나는 배를 보면 문득 그리움에 젖는다.
"내일 집에 가기는 틀렸네."
구씨 아저씨가 싱그레 웃으며 한숨쉬듯 말한다. 어제 초저녁부터 질금거리던 비가 한밤중이 되면서 굵어지더니 이른 아침에야 개었다. 이곳 섬에서
비가 내린 후면 바람이 분다. 학교 옆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면 바다가 칼끝처럼 일어서고 폭풍주의보가 내린다. 빗물에
씻긴 연둣빛 감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바람에 떤다. 물기가 남아 반들반들 해진 이파리는 싱싱하다 못해 찬란하다. 아침식사를 하고 교회가 있는
언덕에서 바다 쪽을 보니 멀리 태안 반도가 보인다. 비에 씻긴 후 날이 개면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충청도 땅 건물이 하얗게 보인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휘둘리고, 갓 심은 어린 모들이 물에 잠길 듯 머리를 내밀고 흔들리고 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황새 몇 마리가 낮게 날다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포리쪽 산너머로 사라진다. 머리가 시리도록 깨끗한 아침이었다.
"날씨 한 번 끝내 주는 구만"
"날씨는 끝내 줘도 바람불어 배가 안 뜨니 어쩌나 이잉"
홍 선생과 구기사가 나란히 걸으면서 노랫가락처럼 주고받는다. 그 뒤를 나, 최 선생, 김 선생이 따라 걷는다.
"이번 토요일에는 친구 결혼이라 꼭 나가야 하는 데"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지난 주말에도 일직이라 못나갔잖아. 이번에는 꼭 나가야 하는데 날씨가 왜 이 모양이야."
김 선생과 최 선생이 똑같은 억양으로 투덜거린다. 한 달에 두 세 번, 주말이면 집에 가는 낙이 사라져 이제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
금요일이면 다음 날 일기에 대해 모두들 예민해진다. 배가 뜨는 토요일 오후 4시. 부둣가는 모처럼 사람 사는 곳처럼 법석댄다. 주차장과 길옆에는
섬을 가로지르는 두 대의 마을 버스와 손님을 맞으려고 나와 있는 민박 집 봉고차들, 물건을 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소형트럭들,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내고 맞기 위해 나와 있는 승용차들이 늘어서 있다.
배를 타기 위해 나와있는 사람들 외에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배웅하거나 맞기위해 나온 사람들, 그냥 구경나온 사람들, 부둣가 옆에 생선이나 게를
파는 아줌마들, 아이들이 붐 빈다.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는 것은 열차나 버스의 출발과는 다른 가슴 벅차고 설레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소야도를 스치듯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섬에는 어울리지 않는 크고 늘씬한 여객선이 나타나면 부두에도 사람들의 가슴에도 조용하지만 묵직한
술렁임이 인다. 섬에서는 누군가가 오고 가는 것이 비록 길지 않은 하루 이틀의 기간이라도 예사롭지 않은 거동인 것이다. 늘 기다리는 마음이
이곳엔 있다. 그리고 늘 떠나고 싶은 충동이 있다. 그래서 섬은 외로운 것일까.
자주 오가는 뱃길이지만 내게는 항상 새롭다. 나는 항상 창가에 앉는다. 덕적도에서 연안부두까지의 뱃길을 즐긴다. 이 시간을 위해 섬에서의
불편함이나 외로움을 견딘다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이 뱃길은 아기자기 하다. 소약도를 옆에 두고 배는 달린다. 시속 70 킬로미터의
속도로, 조금 가다보면 또 섬이 있다. 이작도. 배는 달린다. 제법 망망 대해, 바다 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등대가 있는 작은
섬이 보이고 자월도, 영흥도, 영종도가 보이고 10여분 후면 정박해 있거나 어디론지 떠나는 큰배들이 보인다. 인천 연안부두가 보이고 멀리 고층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연안부두에 내려 개찰구를 빠져 나오면 섬과는 다른 풍경 앞에 아,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섬이나 바다와는 다른 풍경들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도 금새, 시끄럽고 혼잡한 도시의 모습이 정답게 느껴진다. 이 혼잡한 도시 저만큼 어딘가에 내
집과 가정이 있기에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온 것이다. 고향이 농촌이고, 섬과 바다의 자연을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어느새 도시인이 되고 말았구나
하는 느낌이 새롭다.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면 문 앞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듯 막내딸이 문을 열고 내게 안겨 매달린다. 매달린
내 딸의 무게만큼 가족과 만난 행복에 젖는다.
일요일 오후 3시에 덕적도 행 여객선은 연안부두를 출항한다. 점심 먹고 곧 가방 싸고 2시에 집을 나선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혹여 배 시간에
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잠자는 시간은 빼고 열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70 킬로미터의 뱃길을 오가야
하니 한편으로는 번잡스럽기도 하고, 오고가는 시간과 만만치 않은 배 삯 만 허비하는 기분도 들지만, 그래도 주말에 배를 타고 집에 다녀오는
여행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섬에 도착하여 다시 썰렁한 관사의 작은방에 들어서면, 갓 떠나온 내 집의 아늑함이 떠나올 때 흔들어 주던 딸애의
작은 손만큼 아쉬워 진다.
서포리 쪽 하늘에 구름이 몰리고 그 구름의 바람과 함께 산마루를 스치듯 움직이자 바람이 불기시작 한다. 바다가 칼끝처럼 일어섰다. 바람은
이튿날까지 그치지 앓고 불어댔다.
"오늘 또 소야리 애기들 못 나오겠구만"
공문을 분류하던 교감 선생이 창 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올해 1월에 중간 발령을 받고 부임한 교감선생은 아이들을 애기들이라고 부르며
아끼는 자상하면서도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가 지칭한 소야리 애기들은, 역시 올해 폐교된 소야 분교 아이들 네 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야리 아이들도 한 달에 삼십 만원씩 보조를 받고
배를 타고 이곳 덕적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이들 걸음으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배를 타고 다시 학교버스를 타고 와야한다. 오늘처럼
바람이 거세고 폭풍주위 보가 내리면 그나마 학교에 오지 못한다.
유치원 한 명, 그 누나인 삼학년 여자아이, 내가 담임한 이학년 남녀 각 한 명씩. 모두 네명이 통학을 한다. 이들이 학교에 오고가는 어려움을
자세히 알려 된 것은 이곳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방송을 통해서였다. 통폐합이 한창 추진되고 통폐합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던 초여름에
어느 방송국에서 소야리 아이들에 대한 기획 취재가 있었다.
얼마 후 그 내용이 방영되었다. 카메라는 주로 유치원에 다니는 광태 남매에서 맞춰져 있었다. 특히 광태 남매는 부모 없이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고 있다. 광태 남매말고도 이곳 초등학교에는 부모의 이혼이나 부모 중 어느 한쪽이 가출을 했거나, 아니면 부모 또는 부부 중 한쪽이 인천에
나가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늙은 조부모나 편부, 편모 슬하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많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에 일어나는 모습,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배 터까지 가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 작은 학교를 없애고 본교로 통합되어
겪게되는 아이들의 힘든 하루 일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학교공부가 끝나면 진리 부두에서 소야리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 오후
4시경에 배를 타고 간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때가 된다. 그 어린것들이 이른 새벽 집을 나서서 저녁때서야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터인 선착장은 이들에게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아이들이야 노는데 정신이 팔려 시간가는 줄 모르겠지만 어린아이들을 기다리는 어른들
조바심이야 오죽하겠는가. 언젠가 오후에 들어오는 배로 오는 학교 화물을 가지러 나갔다가 유치원생인 광태가 물이 빠져나간 선착장 아래로 떨어진
사고를 우연히 목격했다. 5 미터가 넘는 선착장 아래는 크고 작은 바위투성이였다. 다행히 돌이 없는 곳에 떨어져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학교공부가 끝나고 광태는 소야리 2학년 어이들과 놀면서 배를 기다린다. 간식으로 빵을 먹으며 선착장 난간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입안에 들어있는 빵을 우물거리며, 놀라고 서러워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광태의 볼이 눈물과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오후 6시가 되면 언덕의 교회아래 하숙집으로 간다. 하숙집이라고 하기보다는 아침저녁 하루 두끼의 식사만 하는 우리들 전용 식당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교감선생과 성 선생은 자취를 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이곳은 초등학교 쪽에서 중고등 학교로 넘어가는 언덕 위,
교회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방 세 개, 주방하나. 그 중에서 가장 큰 안방이래야 4인용 밥상 두개 붙여 펴놓으면 겨우 대여섯 명이 붙어
앉아 식사 할 수 있을 정도로 좁다. 이 집에는 우리뿐 만 아니라 중고등 학교 교사 5명, 지서 순경 3명, 보건소 의사 3명이 식사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 학부형이기도 한 수신이 엄마와 아빠는 덕적도의 착하고 똑똑한 부부의 모델이라고 표현해도 그르지 않을 만큼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유머와
센스가 있는 수신이 엄마와 성실하고 순박한 수신이 아빠는 모두 덕적도 고향이고 같은 덕적고등학교 출신이다. 수신이 아빠는 면사무소 소속의 행정선
기관장이다. 방이 비좁아 3, 4 교대로 식사를 해야 하는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는 아내를 도와 상을 처리고 음식을 준비한다. 지서 순경들, 군
복무로 와있는 보건소 의사들, 중고교 교사들과 함께 어울려 하는 식사시간은 객지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는 서로 우의를 다질 수 있는 안락한
장소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모두들 교무실로 모인다. 밀린 일도 하고, 잡담도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바둑도 둔다. 초등학교 관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용
거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만큼,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항상 이곳으로 모인다.
구씨 아저씨가 주말에 울도에 다녀오면 으레 생선이나 소라 등 해산물을 들고 온다. 그런 말이면 조촐한 술자리가 벌어진다. 이런 술자리엔 우리들이
부러워하는 유치원 김 선생 부부도 참여한다. 남편인 고 선생은 중학교 국어 선생이다. 초등학교 3, 4학년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장 관사에서 살림을 하고 있다. 통합된 초중고교 교장은 중고교 교장 관사를 사용하고, 이곳 교장관사는 그들 네 식구가 살림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안주 준비는 늘 그 집에서 한다.
고 선생은 고향이 제주도로 같은 남자라도 반할 만한 선량한 인상과 산뜻한 매너를 지닌 매력적인 40초반의 남자이다. 오늘도 아내인 김 선생과
함께 술안주와 술잔 등을 챙겨 가지고 왔다. 나는 이곳을 `덕적싸롱'이라고 이름 붙였다. 신변접기로부터 교육이나 정치토론까지 다양한 대화가
오간다. 우리들에게는 이곳이 밤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아늑하고 유쾌한 유일한 휴식처였다.
소주잔이 두 어순 배 돌고 취기가 거나해질 즈음 마침 텔레비전에서 도서벽지 학교 통폐합에 대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연평도의 어느 분교가
폐교되어 그곳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육지에 있는 학교로 가야하는 상황을 집중 취재한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어머니의 인터뷰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망막한 표정의 섬 아낙네의 얼굴이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구씨 아저씨가
삿대질을 하듯이 손가락을 흔들어 가며 흥분한다.
"저것 봐, 저거 이. 어띠키 조처럼 똑같은가 이. 나리네 판 났구먼,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예사롭지가 않다.
"지난주에 집에 갔더니, 나리 애비 난리더라구. 오랜만에 인천에 나가 새끼들 보구 왔는디, 애들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구 술처먹구 난리를 치는디,
거참 뭐랄 수도 없구. 둘 다 인천이 싫다구, 울도로 도루 오것다구 떼를 써서 그것들 달래놓구 혼자 배타고 오면서 깡 쇠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구
하더만."
구씨 아저씨는 두어 진술에 취한 건지 아니면 열을 받아서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들 한마디씩 한다. 술잔이 돌수록 도도해진
기분으로 실컷 욕을 해댔다.
일본에서는 학생이 한 명인 곳에도 학교가 있다는 내용이 방영되고 있었다. `한명의 학생이라도 있으며 어디에도 학교는 존재합니다'라고 말하는
일본인 교장의 멘트를 끝으로 방송은 끝났다. 덕적싸롱에 모인 사람들은 그 일본인 교장의 마지막 말을 묘한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기분으로
되씹으며 술자리를 끝내고 관사로 흩어져 갔다. 짙은 어둠 속에서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어느덧 여름방학이 지나고 개학이 되었다. 2학기부터 초등학교는 폐교되고 중고등학교로 통합되어 이사를 가야한다. 거의 일주일 동안 이사준비를
했다. 작은 학교지만 짐은 의외로 많다. 소야도, 울도, 지도, 도갑, 서포리, 면신 등 이미 폐교된 분교에서 보내진 학습자료와 사무용 기기들이
강당과 작은 창고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것들을 넣어 둘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그 많은 자료와 기기들을 창고나 빈 교실에
쌓아 두고 당장 필요한 것만 추려서 이삿짐을 쌌다.
도서벽지 학교 책보내기 운동으로 보내온 많은 아동용 도서와 교육 관련서적들, 풍금, 선풍기, 난로 학습자료, 체육시설 등 많은 것들을 두고
갔다. 그렇다고 팔아치울 만한 것도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들은 폐교된 학교의 잔해로 유령처럼 그곳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교사들은
연실 투덜대며 짐을 싸고 날랐다.
"원 여기 버려 둔 물건만 가지고도 웬만한 학교 하나 운영하고 남겠네"
"아니, 왜 이런 별장 같은 학교 없애고 더부살이를 가야하나, 그것도 조잡하게 지은 조립식 건물로"
"한심한 일이지. 이런 아늑한 곳이 이 섬 어디에 있어. 왜 멀쩡한 학교 없애고 황량한 바닷가에 돈 처들이며 궁색하게 교실 짓고 옮겨야
되느냐고."
"나도 그게 이해가 안돼. 통폐합이야 결정된 거니까 우리가 뭐라고 말해야 소용없지. 그렇더라도 행정적으로만 통합하고 학교는 그대로 두고도
얼마든지 운영할 수 있잖아. 교장 교감은 한 명씩 두고, 기능직도 한 명이면 충분하고 행정실은 어차피 중고교에 있었으니 그대로 운영하면
충분한데, 돈 들여 교실 짓고 우리보고 들어가라니 이게 무슨 짓이냐 말야."
평소에 말이 적고 과묵한 홍 선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길게 말한다.
"맞아, 통폐합의 당위성 어쩌구 하지만 실은 순전히 경제 논리만 있는 거야. 교실 새로 짓고 우리가 거기 들어가면 얼마나 돈이 남는다고."
학습자료를 꾸리고있던 최 선생이 땀을 씻으며 성 선생에게 묻는다.
"거기에 교실 짓는 돈보다 폐교된 이곳 대여하거나 팔면 돈이 남나보죠?"
"흥, 이까짓 섬 땅값, 얼마나 가겠나. 그리고 누가 이걸 사나. 새로 교실 짓는 게 문제가 아닌기라. 선생 수 하나라도 줄이고, 기능직 한
사람 줄이고, 이런저런 관리비 좀 줄이자는 거지. 순 행정부 예산 수판 놀음 이제."
"말하자면 인건비 줄이기네요."
"그렇지, 이제 바로 교육개혁의 핵심인 거라. 언제는 낙도 분교에서 아이들을 위해 희생, 봉사 어쩌구 하더니 IMF다 하니까 무언가 가시적으로
보여주려고 정년 단축이네 봉급 반납이네 하고 수판 질만 하고 있는 거지. 땜빵이지 뭐, 땜빵. 큰 구멍 막을 생각은 안 허고 임시 방편으로 작은
구멍만 땜질하는 거야."
성 선생도 무엇이 복받치는지 열변을 토한다.
사설은 끝이 없다. 이삿짐 싸고 나르는 틈틈이 성토는 이어진다.
"교육은 백년 지 대계 어쩌구 하면서 이것들은 몇 년 앞을 못 봐. 두고 보라지, 무더기 퇴임으로 언제처럼 교사가 모자라 교사 급조 현상이 오고
말 테니까."
"요즘은 언론도 쑥 들어갔어요. 언제는 신문 사설에다 텔레비전 방송이 소규모 학급 통폐합, 교육개혁에 대한 기사가 넘쳐나더니."
"언론? 한 때 뿐이야. 유행 같은 거라고, 잠깐 떴다가 사라지는 대중가요 같은거야."
"하긴 그래,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양발 걸치는 시키들. 몇 만원자리 촌지에 스승의 날 양말 몇 켤레 선물 받은 것 가지고 서방질 한 년
빤쓰 뒤집듯이 까 발라더니 이제는 또 슬슬 그 빤스 깔고 앉아 고스톱 치는 놈 마냥 고냐 스톱이냐 앞뒤만 재고있어."
언덕 위 교회지붕 아래로부터 학교 운동장으로 넘어오면 안개는 어느새 학교 뒤쪽 고개 넘어 북리 어항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새들이 낮게 나르며
빙빙 돈다. 언덕 위 교회 십자가가 안개 속에 떠 보인다. 아마 교회가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이곳 초등학교는 안개 속에 잠긴 별장처럼
보였으리라.
9월 1일자로 덕적초등학교은 사라지고 전국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덕적도의 유일한 덕적 유초중고교가 탄생했다. 조용하고 썰렁했던 중고교에서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으로 학교가 되살아난 분위기였다. 새로 식당이 생겨 단체급식을 하게되고, 학생수가 증가하여 학교예산도 전보다
풍족해진 중고교 교사들은 화기가 돌았지만 초등학교 교사들은 뭐 씹은 표정들이었다. 더부살이하러 들어온 기분이었다. 새로 지은 교실이 조립식
건물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곳에는 초등학교 교사들이 이주할 관사가 없어 폐교된 초등학교의 관사에서 출퇴근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교육과정이 다르고 학교 운영 방식이 다른 두 개의 이질적인 학교 집단이, 억지로 하나로 통합되어 한 지붕아래 공존해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이사를 끝내고 며칠동안은 내가 `덕적싸롱'이라고 명명했던 교무실로 초등학교 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텅 빈 교무실엔 몇 개의 낡은
의자와 책상이 남아 있고, 활용하지 못하거나 버려 둔 사무용 기기나 책들이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사람이 떠난 집은 금새 흉가로 변한다더니
정말이었다. 온기는 사라지고 싸늘한 냉기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폐교되어 텅 빈 교실처럼 흉하고 을씨년스런 곳도 없다. 며칠이 지나자 아무도 그 곳에 가지 않게 되었다. 항상 밤 12시 넘어 까지 환하게 켜져
있던 덕적싸롱의 불빛은 사라지고 대신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어둠이 축축한 바람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며칠 사리에 덕적싸롱은 우리들
기억에만 존재하는 추억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사간 학교는 바로 옆에 바다가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학교건물이 서있고, 오른쪽으로는 소나무 숲이 운동장과 바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다. 그곳을 내려서면 곧바로 바다다. 학교 터로는 최고인지도 모른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 달리기도 하고 모래놀이도 하면서
육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멋진 수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 부는 날이면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굉장하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먼지가
날릴 때는 눈을 뜰 수 없다.
운동장에는 유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길만한 놀이기구 하나 없다. 그네 시소 정글짐 철봉 미끄럼틀 농구골대 등 많은 체육시설을 폐교된 초등학교에 두고
왔다. 모두 옮기기도 힘들고 옮긴다 해도 그것들을 모두 설치하기에는 운동장이 좁았다. 거기다가 초등학교 운동장은 물 빠짐이 좋았는데 이곳은 물이
쉬이 빠지지 않아 비가 내리면 며칠동안 운동장에 물이 괴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학교 터보다는 휴양지나 해수욕장으로 개발하면 안성맞춤이라는 것이 교사들의 지적이었다. 이곳은 휴양지로 개발하고 먼저 초등학교 자리에
교실을 지어 중고등학교가 이사를 왔더라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더 좋았을 거라는 거였다. 그나저나 모두 물 건너간 얘기였다. 개혁이란 자주
결정권자의 필요에 따라 자기편리 위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니까 말이다.
이사가 끝나자 곧이어 정년 퇴임식이 있었다. 부임한지 1년 반만에 퇴직하는 교장과 울도 분교가 폐교되자 이곳에 와 6개월을 근무한 구 기사가
퇴직하는 것이다. 정년 단축이라는 된서리를 맞고 그 첫 케이스로 학교를 떠나는 이들을 위해 조촐한 퇴임식 행사가 있었다.
교장 퇴임 식은 그래도 식장을 꾸며 교실 두 개를 터놓은 임시 강당에서 갖출 것 다 갖추고 거행되었다. 학부형들과 지역유지들과 기관장들이
초대되어 제법 성황리에 거행되었다. 정년 단축으로 교장이 된지 일년만에 떠나는 노 교장의 눈가엔 잔잔한 애수가 어렸다. `스승의 은혜'를
합창하는 통합된 초중고교생들의 노래를 들으며 서있는 그의 지그시 감은 눈까풀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구 기사의 퇴임식은 교장과 같이 거행되지 않았다. 일부 교사들이 교장 퇴임식과 함께 하기를 주장했지만, 그것도 관행인지 결국 구기사의 퇴임식은
이튿날 따로 식당에서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그것도 우리 초등교사들이 앞장서서 이것저것 준비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전 직원이 참가한 가운데
감사패와 약간의 위로금이 전달되고 회식이 있었다. 울도에서는 그의 아내와 나리 부모가 연락을 받고 나와 있었다.
"내야 뭐, 울도에 가서 마누라하고 남은 여생 보내면 되는 겨. 걱정없지 뭐."
구기사가 내게 술잔을 건네주며 예의 그 볼우물이 깊게 패는 그 큼지막한 웃음을 흘리며 한 말이었다.
"내가 마지맥으루 울도 분교는 완전히 웁써진겨. 이제 나리 애비하구 낚시나 하면서 살아야겄지. 나두 원래는 어부 아닌감."
내 손을 잡아주며 웃는 그 웃음 속에 반평생을 울도 분교와 함께 하고 이제 폐교되어 사라진 분교와 같이 학교를 떠나는 쓸쓸함이 진한 바다
빛깔처럼 어려 있었다. 구 기사는 예의 그 사람 좋은 넉넉한 웃음을 흘리며 이 사람 저 사람이 건네 주는 술잔을 받으며 괜히 황송해 했다.
술자리를 끝내며 교감 선생이 구 기사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부탁했다.
"고마워유. 내 울도에 가서두 잊지 않을 규. 선생님들 내내 건강하시구, 힘들 내세유. 쬐끄만 핵교 울도에만 있다가 그래두 여기 큰 핵교 와서
육개월 근무한거 너무 좋았슈. 고마워유."
하룻밤 더 묵으며 술 한잔 더하고 떠나라는 우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 기사는 착하고 순해 보이는 그의 아내, 나리 부모와 함께 학교를
나섰다. 내일부터 폭풍주의보가 내린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마중 나온 우리들에게 아는 체를 하며 꾸벅 인사를 하는 나리 아빠는 그사이에 더
초췌하고 구부정해 보였다. 구 기사를 태운 소형 쾌속선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석양빛을 옆으로 비껴 받으며 멀리 사라져 갔다. 울도 분교, 소야
분교가 사라지듯이.
그 날 저녁 늦게 비가 내렸다. 섬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바람은 산기슭 소나무 숲을 휘몰아치며 거세게 불었다. 산기슭 소나무의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금속성을 낸다. 비에 젖은 섬이 온몸으로 울고 있었다. 교회 언덕아래 혼자 사는 할머니의
작은 집 좁은 창으로 흐린 불빛이 떨리듯 간신히 새어 나오고 있었고, 덕적싸롱의 깨진 창안으로 세찬 빗발이 들이치고 있었다. 인천연일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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