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득 서재를 정리하다가 책갈피에 끼워진 빛바랜 나뭇잎 여러 장을 발견하였다. 그 옛날 선생님이 나에게 써 준 윤동주의 '서시'였다. 그 당시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윤동주의 '서시'를 나뭇잎 여러 장 위에 붓 펜으로 선생님께서 써 주신 것들이었다. 문득 그 나뭇잎 위로 선생님의 얼굴과 추억들이 아스라이 비추어졌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지지리도 못살았던 우리 집은 아버지의 박봉으로 하루 세끼를 간신히 해결할 정도였다. 더욱이 우리 집은 형제들이 많아 그 가난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 영원한 숙제로 남아있는 듯 했다. 새 옷 한 벌을 사면 닳을 때까지 입어야 했고, 특히 막내인 내가 형들이 입었던 옷을 물러 입어야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워낙 없는 살림인지라 내 투정은 부모님에게 있어 의미 없는 아우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부모님이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적지 않게 도움을 준 것도 있었다. 그건 바로 다름 아닌 교과서였다. 그때 그 당시에는 모든 교과서가 검정교과서였고 몇 년 동안 내용 또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연년생이 많은 자식을 둔 우리 부모님에게 톡톡한 효자노릇을 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항상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 불만은 막내인 나에게 있어서 극에 달했다. 매년마다 형들이 썼던 헌책들을 물러 받을 때마다 불만을 토로하면 언제나 부모님은 '내년에는 꼭…'이라는 말로 불만을 잠재우곤 하셨다. 사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약속이 지켜졌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12월이 접어들자, 고등학교 입시를 코앞에 두고 친구들은 제각기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부러워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기존에 출제되어진 문제집으로 마무리를 다져나가는 친구들이었다. 가끔은 친구들에게 다가가 그 문제집을 빌리려고 기웃거려 보기도 하였으나 빈번히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북받쳐 올라오는 눈물을 친구들 앞에 보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방과 후, 나의 이런 마음을 아셨는지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조용히 부르셨다. 사실 중학교 때의 나의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선생님 또한 나에게 거는 기대가 자못 컸다. 교무실 선생님의 책상 위에는 새로운 책들이 수북이 쌓여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우리가 배우고 있는 교과서였다.
사실 지금까지 형들로부터 물러 받은 책들은 어느 곳 하나 온전한 데가 없었다. 그리고 어떤 책은 활자(活字)가 지워져 무슨 글씨인지 못 알아 볼 정도였고 심지어 케케묵은 곰팡이 냄새까지 나는 책들도 있었다. 그래서 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새로운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헌 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친구들이 눈치라도 챌까봐 고민을 하다가 밤늦도록 책표지를 싼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교과서가 공장에서 출판되어 그 어느 누구의 손 때가 묻지 않은 상태로 내 앞에 있지 않은가? 그 때의 가슴 벅찬 순간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너무 놀라 나의 시선은 한참을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나의 이런 모습에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의 손을 덥석 잡으셨다.
"환희야, 그렇게도 좋으니?" 부지불식중에 나는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예, 선생님! 그런데…" "그래, 어느 날 우연히 너의 교과서를 볼 기회가 있었단다. 그런데 배우지도 않은 내용까지 모두 필기가 되어 있더구나. 미심쩍어 다른 교과서까지 훑어보니 모든 교과서가 다 그렇더구나. 그래서 늦은 감이 있지만 너에게 줄 책들을 구해 보았단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선생님은 우리 집 가정 형편과 내가 형들로부터 물러 받은 교과서로 공부를 하고 있는 사실 모두를 알고 계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고 해 주시기도 하였다.
"환희야, 가난은 죄가 아니란다. 다만 불편할 뿐이란다. 그리고 새 책으로 공부를 하면 처음에는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교과서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알고 느끼는 것이란다. 입학시험은 교과서 내에서 출제가 많이 되니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다시 한번 요점 정리하여 준비를 하면 큰 무리가 없을 거란다. 자, 이 새 교과서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알았지? 그리고 네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꼭 입학하기를 바란다."
나는 마치 큰상을 받은 것처럼 교과서를 가슴에 꼭 껴안고 종종걸음으로 교무실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운동장을 향해서 큰소리로 '야호!'를 외쳤다. 그때 그 순간의 환희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 한 구석에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나의 유년시절을 뒤돌아보면 그 날처럼 기분이 좋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교과서를 펼쳐 보았다. 그런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가을에 주워서 말린 나뭇잎 위에 붓 펜으로 용기와 격려의 글들을 적어 그것들을 교과서의 책갈피에 끼워두신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글은 평소에 내가 즐겨 암송했던 윤동주의 '서시'였다.
그날 밤, 나는 선생님께서 써 주신 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나이가 든 지금도 그 글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마음속의 벗이 되어 큰 위안과 힘이 되어주고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교사가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인생의 좌표를 그어준 선생님의 말씀과 그 교과서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나는 선생님께서 일러준 방법으로 새 교과서에 다시 한번 밑줄을 그어가며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으로 남은 기간동안 최선을 다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친구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사실이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거의 모든 문제들이 교과서 내에서 출제되었다. 결국 나는 원하는 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 교실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교과서를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아파 그 옛날 선생님과 교과서에 얽힌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해주곤 한다. 요즘 인터넷 문화에 젖어 생활하는 아이들이 교과서의 소중함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래서 그것을 일깨워주는 방법의 하나로 수업 시작 5분전에 교과서를 읽게 한다. 그리고 가끔, 학창시절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것처럼 가을에 주워서 말린 나뭇잎 위에 글을 적어 아이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