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순입니다. 아직 초겨울이지만 날씨가 며칠째 완전히 한 겨울이 된 듯 매서운 추위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아직 첫 눈도 내리지 않았건만 시베리아의 찬바람이 몰아쳐 어깨를 움추러들게 합니다.
빛나는 무거운 책가방을 둘러 맨 채 허우적허우적 아파트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빛나는 4층 계단을 올라오느라 몹시도 힘이 들었던지 문 앞에 멈춰 서서 ‘휴우―’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빛나는 ‘얼른 들어가서 씻어야지’ 생각하면서 속주머니를 뒤져서 카드 열쇠를 찾았습니다.
‘이런, 어디 갔지? 큰일났네. 카드가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데…’
빛나는 안달이 났습니다. 분명히 안쪽 호주머니에 있어야할 카드열쇠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빠뜨렸는지, 굴다리 밑에서 장난을 하다가 빠뜨렸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서 빠뜨렸을까 ?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정말 어디서 빠뜨렸을까 ?’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 보았지만 도무지 어디서 카드열쇠를 빠뜨렸는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가방 속을 뒤집어 놓고 차근차근 찾아보기도 하였으나 역시 열쇠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저씨 안녕 하세요? C동 402호에 사는 빛나예요. 그런데 카드열쇠를 잃어 버렸어요. 아빠나 엄마께 전화를 해야겠는데 동전까지 몽땅 빠뜨렸나 봐요. 전화 좀 하게 해주세요.” “ 음 그랬구나 . 어쩐지 힘이 빠져 보이더라. 자 여기 있다. 어서 해봐라.”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빛나는 아빠 회사의 전화번호를 눌러갔습니다. “여보세요, 상원전자 주식회사죠? 검사부 좀 바꿔주세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낭랑한 교환누나의 말을 들으며 빛나는 차분히 전화가 바꾸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여보세요. 상원전자 검사분대요.” “미안 하지만 한 영수 씨를 좀 바꿔주세요.” “아 한영수씨는 지금 출장 중이신대요.” “네에? 아침에 출근하시면서 그런 얘기 없었는데요?” “네, 창원 공장에 갑작스런 일이 생겨서 내려가셨는데 아마 내일 늦게나 모레쯤 돌아 오실 것 같은데요.” “네에, 잘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빛나는 맥이 쭉 풀렸습니다. 아무런 얘기도 없으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출장이시라니 자신의 일이 더욱 큰일입니다. ‘이젠 엄마에게로 전화를 할 수밖에 없지…’ “아저씨 아빠가 출장이시래요. 죄송하지만 한 통화만 더 쓰게 해주세요.” “그래 어서 하려므나.”
빛나는 시외 전화를 걸어야 하겠으므로 미안해서 아저씨께 감사의 뜻을 머리 숙여 표시하고 다시 전화를 눌렀습니다. “여보세요. 강동실업이지요? 여기 안양인데요. 경리부에 강영숙씨 좀 바꿔주세요.” “네에, 지금 강영숙씨는 외출 중이신대요.” “네에? 여기 집인데요. 제가 카드열쇠를 빠뜨려서 방에 들어 갈 수가 없어서 급히 연락을 해야겠는데요.”
빛나는 다급해져서 저도 모르게 말소리가 높아 졌습니다. “어쩌죠? 물품구입회사하고 문제가 좀 생겨서 오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아마 밤늦게 돌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연락도 안 되구요.” “혹시 연락이 오시면 집에서 전화가 왔더라고 급히 좀 와 주시라고 전해 주세요.”
빛나는 갈수록 답답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자리에 안 계시고 더구나 늦으실 거라니 기다려 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빛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관리실을 나섰습니다.
‘어떻게 할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빛나는 발길이 닿는 대로 길거리로 나서 봅니다. 씽씽 불어오는 찬바람이 볼을 때리고 지나갑니다. “아이 추워 !”
혼잣말을 하면서 학교 길을 되짚어 걸어 봅니다. 혹시 빠뜨렸을 카드열쇠가 어디에 떨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유심히 살피면서 학교 앞까지 왔습니다. ‘아까 저 굴다리 밑에서 춘식이와 장난을 쳤었지. 그래 혹시 거기에 빠뜨렸을지도 몰라.’
빛나는 굴다리 밑을 살피면서 지나 봅니다. 벌써 날이 저물어 굴다리 밑은 어두워서 무얼 찾는다는 게 어려울 만큼 캄캄했습니다. 관악산 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찬바람이 사정없이 두 귀를 쓸고 지나갑니다. ‘아무래도 찾을 수가 없겠는데 어쩐다지?’
빛나는 걱정으로 한층 더 가슴이 움츠러들고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져왔습니다. 오후반이라서 오전 11시에 벌써 점심을 먹고 집에서 나섰으니 뱃속에서는 배고파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이거 큰일이로구나. 친구네 집에라도 가볼까?’
그러나 집 가까이에 사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아니 누구네 집에 가 볼만한 친구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전화만 해두면 방안에 불도 켜놓고 보일러도 가동이 되어서 방안이 훈훈해질 것이고,밥통에 앉혀둔 밥도 해두고 할텐데, 이게 뭐람 ! 방에만 틀어 가면 지금이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더운물로 몸을 씻을 수도 있고, 얼마나 고마운 우리 집인데.’
빛나는 따뜻한 음식을 생각하고, 더운물이 콸콸 쏟아지는 목욕탕을 생각하자 더욱더 추워지는 느낌입니다. 지난번 국어 시간에 ‘고마운 우리 집’ 이야기를 할 때 빛나네 반 50명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서 눈들이 동그레 가지고 빛나의 얘기에 정신이 팔렸었습니다.
“우리 집은 요즘 새로 선보이는 홈오토메이션 (가사자동관리시설)이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도 직장에 나가시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모든 전기기구를 컴퓨터에 연결시켜 직장에서 바쁜 일이 있으시면 전화를 걸어서 밥짓기도 시키고, 세탁기도 돌리고, 보일러의 스위치도 작동하게 합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녹화시킬 수도 있고, 방안의 불도 켜라, 꺼라하고 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공상영화에 나오는 것같이 모두 밖에서 조정할 수 있는 편리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열쇠도 이 카드를 넣고 비밀 번호를 눌러 주어야 열리기 때문에 도둑을 맞을 염려도 없습니다. 나는 과학이 발달되어 모든 것을 컴퓨터로 조절 할 수 있게 되어 편리하게 만들어진 우리 집이 제일 자랑스럽습니다.” 하고 신바람이 나서 자랑을 늘어놓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카드열쇠를 잃어버리고 엄마 아빠도 갑작스런 일이 생겨서 집에 돌아오시지 않으시니 꼼짝도 할 수가 없는 우리 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터덭터덜 집으로 돌아온 빛나는 시무룩해져서 현관문 앞에 가방을 팽개친 채 우두커니 섰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어떻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눈앞에 자꾸만 먹을 것이 어른거리고 날씨는 추워서 뼈마디를 깎는 듯 매서웠습니다.
‘엄마, 아빠가 빨리 돌아와야 할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너무 피곤하고 다리가 아파서 책가방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고개를 푹 숙여서 양 팔 사이에 쳐 박고 추이에 오돌오돌 떨면서 점점 어두워져 가는 새까만 밤하늘을 원망합니다.
‘아이 추워 !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춥담.’ 빛나는 이빨이 마주치는 소리를 내면서 더욱 동그랗게 몸을 움츠립니다.
“에구머니나 ! 빛나야 ! 이게 무슨 일이니 ? 이런 동태가 다 됐구나. 얘 빛나야! 정신 차려, 응!” 엄마가 울부짖듯 외치는 소리에 빛나는 눈을 부스스 떴습니다. “엄마 !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응, 으으응.”
빛나는 정신을 잃은 듯 가물가물 거리며 가느다랗게 입가에 흘리는 소리를 하며 축 늘어져갑니다. “얘, 빛나야, 빛나야!”
어머니는 어쩔 줄을 모르고 빛나를 흔들어 대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방문을 열고 싸늘해져 버린 방안의 공기를 덥히기 위해 보일러를 작동시켜 두었습니다. 빛나를 이불 속에 파묻어 두고서 집안을 둘러보며 각종기구를 작동시키고 나서 빛나를 흔들어 깨우며 옷을 벗기고 팔다리를 만져 봅니다.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같은 빛나의 몸뚱이를 부등켜 안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서 빛나를 연거푸 부릅니다.
“빛나야, 이게 웬일이냐? 만져 봅니다. 이 엄마가 나빴어. 직장이 뭐라고, 너를 이렇게 버려 두고 거기에만 매달려 있었으니 얼마나 추웠겠니? 배는 얼마나 고프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
엄마의 두 볼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얘, 빛나야! 정신 좀 차려 봐. 정신이 드니?” 엄마가 빛나의 두 볼을 두들기며 몇 번을 부르자 빛나는 눈을 부스스 뜨면서 “엄마, 무서워, 엄마 춥고 배고파.....”
하고 또다시 눈을 스르르 감아버립니다. ‘그래, 그래 빛나야. 보일러를 가동 시켰으니 따뜻해 질 거야. 조금만 기다려라. 빛나야, 내 얼른 밥을 해올 테니까 조금만 누워 있어. 응?“ “싫어, 싫어 무서워 !”
빛나의 앙탈에 엄마의 가슴은 더욱 찢어 질 듯이 아팠습니다. “빛나야, 내가 잘못했다. 이 엄마가 나쁜 사람이야. 네가 이 모양이 되도록 모르고 있었으니… 미안하다. 빛나야.” 엄마는 끝도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넋두리를 계속합니다.
이불 속의 빛나는 조금씩 몸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끼며 끝없는 잠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아스라한 먼 곳에서 도마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싫어, 싫어 ! 나는 자동장치가 싫어 !”
빛나는 자꾸만 잠꼬대를 하며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얘 빛나야 ! 이게 뭐냐? 왜 카드 열쇠를 실내화 주머니 속에 감추었지?” 엄마가 소리칩니다. ‘아차 ! 축구하다가 빠뜨릴까 봐 거기 넣었었지.“ 빛나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부끄러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덮어쓰고 들어가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