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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너무나 미웠던 당신, 처음으로 손을 잡아봤습니다

아버지!
어릴 때 그렇게 높아만 보였던 '아버지'의 산이 무척이나 작아 보이는 날입니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께 글을 올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자성(自省)의 시간을 한번 가져봅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했던 고향 나들이는 저에게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 준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십 년 전 어머니께서 중풍으로 쓰러져 거기에 따른 모든 죄 값을 달게 받겠다고 하시면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리시고 난 뒤 연락이 두절된 아버지를 저희는 지금까지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에 대한 원망(怨望)이 컸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큰아버지의 부고(訃告)를 받던 날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식인 저에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갈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을 때 선뜩 "예"라고 대답을 못했던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가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버지와 동행한 여행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고향인 대구까지 버스를 타고 가고 오고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싫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문득 어릴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요. 제 나이 오십이 넘은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보다 좋지 않은 기억이 더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가 봅니다. 당신의 잦은 외도(外道)로 어머니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모습에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를 이해시키려고 안간힘을 쓰시던 어머니가 오히려 미운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매일 반복되는 당신의 주사(酒邪)는 늘 어머니의 구타로 이어졌지요. 지금도 어머니께서 수족(手足)을 못쓰시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감히 해 봅니다. 다음날 아침 마치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출근하는 당신의 뒷모습에 우리 자식들은 침을 뱉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당신보다 우리를 더 꾸짖었습니다.

"너희는 아버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너희들의 아버지가 아니니?"

당신이 퇴근할 시간이 되면 우리 형제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구 밖 은행나무 뒤에 숨어 당신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습니다. '설마 오늘은 아무런 일이 없겠지'하면서 당신을 기다리는 자식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상상이나 해 보셨는지요. 아니나 다를까 당신은 자식들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향해 오시더군요. 그러면 우리들은 겁에 질러 줄달음질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에게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산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내린 결정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은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따라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어린 저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겨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우등상을 받아 아버지께 자랑을 하려고 하다가 실수로 컵에 있는 물을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께서는 제 손에 들고 있던 상장을 찢어버리시면서 저를 때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보다 당신의 옷 걱정을 먼저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아버지라는 존재는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이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아버지가 사망으로 적혀져 있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어떤 때에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워 한참이나 바라본 적도 있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오나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냥 형식적인 인물로 굳어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생존해 계시는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이신 큰아버지의 별세로 그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저는 아버지의 눈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에는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첫 날 큰아버지의 시신(屍身)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시던 당신이 삼 일째 장지로 떠나는 상여(喪輿) 뒤를 말없이 따라가면서 깊게 패인 두 눈에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장지(葬地)에 도착하여 하관(下官)을 하는 순간 당신은 지금까지 참았던 울분을 토했습니다.

"형님, 저를 버리고 먼저 가시면 어떡합니까?"

큰아버지를 영원히 보내면서 눈물을 훔치시는 당신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너무나 높아 쳐다보기 힘들었던 그 산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강릉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큰아버지의 장사(葬事)로 3일 꼬박 잠 못 이루시고 제 옆자리에서 그 피곤함을 잠으로 달래시는 당신의 모습 뒤로 그 어떤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당신이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든이 넘으신 당신의 머리에는 어느새 희끗희끗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고 얼굴 위에 핀 검붉은 저승꽃이 햇빛을 받아 더욱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세월 앞에서는 당신도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었던 좋지 않았던 감정들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모르시겠지만 당신이 잠든 사이에 태어나 처음으로 당신의 손을 잡아 보았습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더군요. 그 동안 이 따스한 손을 잡아 보기가 왜 이다지도 힘들었을까요. 어머니를 비롯하여 우리 가족 모두는 지금까지 당신의 이 따스한 손길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특히 장례가 끝난 뒤 당신이 저에게 한 말은 지금도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환희야, 함께 동행해 주어서 고맙구나."

자식이기에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인데 아버지는 마치 타인에게 하는 것처럼 저에게 인사치레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에 제 자신은 당신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문득 생각나더군요.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비롯한 저희 가족들에게 행한 일을 생각하면 그 어떤 것도 용서되어 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늘 그랬듯이 이제 혼자 지내시기를 고집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버지의 죄 값 아닌 죄 값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을 다녀온 뒤 집사람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를 모시는 일에 대해서 집사람도 쾌히 승낙을 하여 무어라 고마움을 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여생(餘生)을 제가 편안하게 모시고 싶습니다. 아니 그 높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산이 더 이상 낮아지지 않도록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해 봅니다.

                                                          2013. 5월 어느 날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는 아들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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