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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인천교대 학창시절의 추억

인천교대 명칭이 지금은 경인교대로 바뀌었다. 1975년에 입학했으니 37년, 38년 전 숭의동 캠퍼스 시절 이야기다.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아직도 그 시절 모습이 생생하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추억은 아름답다.

공부밖에 모르던 1학년 바보였다. 수도권 전철로 통학하면서 친구 사귈 줄도 모르고 동아리 활동도 모르고. 대학생활 어떻게 하는 것이 인생을 풍부히 살찌우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수도권 전철을 오가고 전동차 내에서도 공부하고. 그 결과였을까? 1학년 1학기 성적이 반에서 1등이었다. 여자 30명, 남자 10명 총 40명 중에서 1등. 성적 우수장학금 명단에 올랐으나 받지 못하였다. 나중 알고 보니 성적이 기준에 미달한 학도호국단 간부들과 함께 올라가 반려되었다고 들었다.

1학년 2학기. 대학생활이 이건 아니다 싶었다. 방송실에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방송실은 아지트였고 듣고싶던 클래식 음악은 실컷 듣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여학생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방송제를 준비하면서 ‘단체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방송실 활동은 사회성을 일깨워주고 넓혀준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내가 연극의 주인공이 되다니? 미추홀 축제에서 연극공연이 있었다. 실제로는 방송실장 이○○가 출연해야 하는데 사정이 생겨 보도부장인 나더러 하란다. 연극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다. 연출자가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기에 무대에 섰다. 작품은 유진오닐 원작 몽아(夢兒. 꿈꾸는 아이). 연습은 한 달 여 하였지만 초연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른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잊었을 때 대비해 조용히 읽어주는 음성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RNTC 육군의 자랑'. 학군단 군사교육을 받았다. 주당 8시간이다. 방학 때는 3주간 병영훈련을 받는다. 이렇게 수료를 하면 졸업과 동시에 하사 계급장을 받고 동시에 예비역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남자 초등교사에 국가의 배려인 것이다. 1년차엔 소사 33사단에서, 2년차엔 증평 37사단에서 훈련을 받았다. 2년차엔 수료식에서 제3관구 사령관으로부터 우등상을 수여 받는 영광을 안았다.

과외의 추억도 새롭다. 수원 도청 앞 우리집에서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분 아들 두 명을 가르친 것이다. 아마도 중·고등학생이었는데 몇 달 하고 그치고 말았다. 첫 번째 아르바이트였는데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체험하였다. 그 당시 다른 친구들은 교수님이 소개로 교대부국(인천교대부속국민학교) 어린이들을 과외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쌍쌍파티란 것이 있었다. 대학축제 때 티켓을 구입한 남녀학생이 각자 입장하여 무용과 교수님으로부터 포크댄스를 배우는 것이다. 춤을 배우다 보면 파트너가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내성적인 나. 여학생과 손을 잡으면 몸이 굳어지는 것이었다. 여학생은 태연한데 혼자서 얼굴이 붉어지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배운 세계의 민속무용이 초등학교에 발령 받아 중간놀이, 체육대회 때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수줍음 잘 타는 내가 교직원 연수에서 동료 선생님들을 가르치고 운동장 사열대 위에서 시범을 보인 것이다.

나의 반항적 성격 중 하나. 학군단 용의검사에서 교관으로부터 머리가 조금 길다고 걸린 적이 있었다. 이발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걸린 것이다. 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이발소에 가서 스님처럼 삭발을 한 것이다. 그 당시 대학생은 머리 기르는 것이 유행인데 삭발을 하다니…. 일종의 항의요 반항이었다. 당시 학교에 삭발한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1년 선배인 불교학생회장. 교양 국어시간 교수님 말씀, “학생은 불교학생회인가?”

교내 합창대회의 추억이 새롭다. 1학년 10개반이 지정곡과 자유곡을 불렀는데 우리반이 3등을 한 것. 지휘자는 바로 나. 방과후 모여서 연습한 것이 성과를 거둔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지정곡 베버의 ‘사냥꾼의 합창’. 우리반 합창 실력보다도 피아노 반주를 해준 2학년 음악과 선배의 실력이 우리 합창을 살려 주었다. 다만 한 가지 미안한 것은 클래식 기타 연주 실력이 뛰어난 반친구 김○○가 지휘를 맡았었는데 내가 양해를 구하지 않고 빼앗다시피하여 지휘를 한 것. 그 이후 그 친구와는 좀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 당시 무례했던 나의 행동을 지금쯤 잊었는지…. 이제 사과를 보낸다. “친구야, 미안하다. 나의 부족함을 용서하게!”

졸업을 앞 둔 어느 날, 국사과 교수님이 말씀하신다. “혹시 학생들 중에서 인하대학교 3학년에 편입할 사람 있으면 알려주세요!” 아마도 편입 자리가 몇 자리 생겼나보다. 2년제 대학에 자존심이 상해 있던 나는 어머니께 여쭈었다. “엄마, 인하대에서 3학년으로 받아 준다는데….”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 우리집 형편상 발령 받아 돈 버는 것이 우선이었다.

졸업을 하고 발령을 기다리는 2월. 성적이 앞 순위라 내심 수원시 발령을 기대했다. 400명 졸업생 중 순위가 두 자리수이면 분명 시(市) 발령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만날 어린이들을 상상하며 교직의 첫출발을 기대했다. 그런데 용인군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 동안 발령 대기 중인 2년 선배들도 동시에 발령이 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성적과는 관계없이 출신고교에 따라 서울로 발령난 친구도 있었다. 수원 출신인 나는 한편 배가 아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였다. 좀더 좋은 지역에 발령 받으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2007년 3월 용인 대지초교가 초임지다. 이 곳에서 교직의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한 위대한 출발이 시작되는 줄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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