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과학을 영위하는 데 있어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는 두 측면은 이론과 실험이다. 그런데 다른 대부분의 학문이 그랬듯 자연과학도 처음에는 뜬구름 잡기 식의 순수한 사변으로부터 출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의 모든 학문이 그에게 흘러 들어가고 이후의 모든 학문 또한 그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하여 이른바 '서양 학문의 저수지'라고 불린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순수한 사변 철학의 대가였으며 자연과학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서양 학문에서 그의 지배력은 참으로 엄청났으며 2천년이 넘도록 그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는 여러 가지 도전을 받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갈릴레이의 낙하 실험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낙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고 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 차이가 크게 나는 두 개의 공을 던졌지만 거의 동시에 땅에 도착함을 보임으로써 실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공리공론의 허황함을 깨끗이 증명해 보였다.
이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갈릴레이는 관성의 법칙도 제시했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하는 물체는 결국 정지한다"는 가설을 타파한 것이었다(갈릴레이의 이 발견은 데카르트를 거쳐 뉴턴에 이르렀고 오늘날에는 뉴턴의 운동 제1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진공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이 또한 갈릴레이의 제자인 토리첼리가 길다란 유리관에 수은을 채운 후 거꾸로 세워 이른바 '토리첼리의 진공'이라 불리는 상태를 만들어 보임으로써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이러한 사변 과학의 전통에 결정적 타격을 준 것은 영국의 경험주의자 프란시스 베이컨이었다. 베이컨은 당시 사람들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면서 관찰이나 실험 결과보다는 철학, 신학, 종교, 미신 등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종족, 동굴, 시장, 극장의 우상이라는 '4대 우상론'을 내세워 헛된 편견을 걷고 자연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라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이래 과학 역사상 가장 큰 혁명을 이룬
'귀납법'을 창시함으로써 실험과학의 근본 바탕을 확립했다.
근래 우리 나라의 과학 교육에서 실험의 중요성이 꾸준히 강조되고 있다. 물론 이는 역사적 과정이나 지난 날 우리 나라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의 폐해를 생각해볼 때 매우 당연한 노력이다. 그러나 모든 실험은 이론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너무 실험을 강조한 나머지 이론의 안내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실험에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시간적,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실제로 위에 든 갈릴레이의 실험은 먼저 머리 속의 사고 실험을 거친 후에 행해졌다.
토리첼리의 진공 실험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에 들어서도 순수한 사고 실험이 강조된 경우가 많았고 불확정성 원리나 마흐의 원리가 이에 해당한다. 서두에 말했듯 이론과 실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인간 행동의 근본 출발점은 사고에 있다. 베이컨의 귀납법도 편견을 비판했을 뿐 올바른 전제까지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실험의 근본은 사고 실험이란 점을 되새길 때 실제의 실험도 가장 알차게 이뤄질 것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