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는 '무늬만 1등급'과 '진짜 1등급'을 차별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고교등급제 포기는 더 많은 수의 '진짜 2등급'과 '진짜 3등급'에게 역차별을 강요하는 인권차별이다. 아울러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학력차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대학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서울대의 통합교과형 논술과 관련한 논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대통령의 ‘나쁜 뉴스’라는 평가에 정부․여당 그리고 일부시민단체들은 ‘막말’까지 동원해가며 서울대 때리기에 나섰다. 이에 대해 서울대 교수협의회, 전국국공립대학교수협의회 등은 "서울대 입시안 파동은 대학의 순수한 교육적 개혁조치를 정치적으로 해석해 호도한 것이고 헌법이 보장한 대학의 자율성 침해로 규정한다"며 "이와 유사한 정부 간섭에 강력 대처해 나가겠다"는 말로 서울대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모 경제단체가 주최한 모임에서 통합교과형 논술을 강행할 뜻을 피력했고 나아가 “고교평준화 제도도 재고(再考)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단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논술고사 논란뿐만 아니라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고교등급제 논란 등 대학의 학생선발 방법의 변경은 어김없이 사회적 저항이라는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신뢰할 수 없는 내신, 변별력 없는 수능제도’ 하에서, 대학으로서는 ‘최소한도’의 자율성을 발휘한 고심(苦心)과 타협의 산물이다.
사실 대학의 자유는 우리나라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의 하나다. 물론 우리 헌법은 공익을 위한 기본권 제한을 허용한다. 그러나 통합교과형 논술고사나 고교등급제를 금지하는 것이 과연 공익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이에 대한 명확한 논증이 없이 서울대의 입시안을 규제할 경우, 정부는 ‘대학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신입생 선발과 관련한 대학의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규제의 잣대를 들이대 왔다. “논술고사는 사실상 본고사 부활이다” “고교등급제는 차별이다” 등 규제의 논리도 다양했다. 그렇다면 정부의 이러한 규제논리는 합리적이고 타당한가? 안타깝게도 정부의 그 어떤 규제논리도 비합리적이고, 타당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반헌법적이기까지 하다. 지금까지 교육과 관련한 많은 실증연구결과는 정부의 규제논리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먼저 “평준화는 과연 평준화에 기여했는가?”라는 질문에 정부는 결코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 유독 교육부만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다양한 교육자료들은 학력격차가 현재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며 나아가 확대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몇 가지 증거를 들어보자.
PISA 2000년도의 읽기성적을 전국의 고등학교별 평균점수로 살펴보았을 때 전체 150개 학교 중에서 최상위권 학교와 최하위권 학교간의 평균점수차가 무려 200점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다시 인문계 학교만을 비교해 볼 경우에도 150점의 격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자료는 전국의 고등학교별로 실로 엄청난 학력격차가 있음을 보여준다. 2001년도 치러진 전국규모의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도 동일한 결과를 나타내었다. 조사대상 175개 고등학교 중 최상위 10%에 속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는 학교가 전체 대상학교 중에서 무려 39.4%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고려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입시자료를 분석한 결과도 학교별 학력격차 현상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전국 1847개 고등학교 중에서 수능성적 상위 10%에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학교가 823개나 되며, 재학생 전원이 수능성적 상위 10% 이내에 들어 있는 학교가 3개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능점수를 통한 분석 역시 우리나라 고등학교간의 학력격차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증명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일부 시민사회단체들은 ‘고교등급제는 인권침해(人權侵害)’라고 주장하면서 학력격차를 입시사정에 반영한 일부 대학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거꾸로 뒤집어보면 그들의 공격논리와 정확히 같은 논리로 공격당할 수밖에 없다. 앞서 소개한 고려대 입시자료 분석에 따르면 823개 학교의 ‘전교 1등’들은 나머지 학교의 전교 50등에도 미치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재학생 전원이 수능성적 상위 10%에 속하는 3개 학교에 간다면 이들의 성적은 최하위를 기록할 것이다. 다소 과장하면 ‘무늬만 1등급’인 것이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무늬만 1등급과 진짜 1등급을 차별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고교등급제 포기는 더 많은 수의 ‘진짜 2등급’과 ‘진짜 3등급’에게 역차별을 강요하는 인권차별이다. 아울러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학력차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대학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필자는 고교등급제 반대론자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다. 고교등급제 반대론자들의 인권차별 주장도 옳다. 그러나 똑같은 논리로 그 대척점(對蹠點)인 고교등급제를 포기하는 것 역시 인권차별이다. ‘어떤 것이 옳고, 정확히 그 반대도 옳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그렇다. 고교등급제에 대한 찬반논쟁은 어쩌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다른 한 편으로 고교등급제 반대론자들은 현재와 같은 학벌주의, 대학서열화 체제 내에서 고교등급제는 서열화를 더욱 강화하고 때마침 맞물린 대학의 선발권 강화는 등급제를 구조화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일부 강경론자들은 이러한 폐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대학마저 평준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우리 사회에 학벌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학벌주의가 심각하다는 주장은 어쩌면 피해자(?)들의 과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컨대 작년 국정홍보처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학벌주의에 대한 설문조사는 이런 가능성을 증명한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7.7%가 “우리사회에 출신학교에 따른 차별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반면, “실제 사회생활에서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31.9%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이는 우리사회에서 학벌주의가 실재보다 과장되어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동안 민간부문의 빠른 성장은 최근 대부분의 사회영역에서 민간부문이 정부부문을 압도하게끔 만들었다. 능력에 근거하지 않은 학벌주의는 결국 기업 및 단체의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고도지식산업사회에서는 개인의 창의력과 능력이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학력주의는 논리적 근거를 잃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최근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내 모그룹의 신입사원 특강시리즈에 참여하고 있다. 수강생 프로필을 통해본 신입사원들의 출신대학 분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소위 ‘스카이 대학’ 출신은 전체의 20%에 채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공계 신입사원의 경우 사회적으로 명문취급을 받지 못하는 어느 지방대학 출신이 가장 많았다.
학벌주의는 실재보다 과장되어 있거나, 사회변화에 따라 빠르게 완화․소멸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와 논거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벌주의에 따른 폐해를 부단히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공포를 유발․조장하고, 이를 고교등급제 반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전형적인 ‘저급(低級) 정치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독일, 프랑스 등 우리보다 앞선 나라에서도 문제점이 많아 포기하려하는 대학평준화까지 주장하는 것은 그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케 한다. 혹시 이들은 “계급(階級)이 국가나 국민보다 우선되는 가치다”라는 사회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현 교육시스템은 ‘국가에 의한 교육독점’과 ‘평준화’가 잉태한 저주받은 기형아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원인을 그대로 두고 어떠한 교육정책에 관한 논의도 결국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교통시스템 자체가 잘못돼 있는데 신호등 한두 개를 고친다고 교통흐름이 나아지겠는가. 오히려 고치려고 나서면 신호체계는 점점 꼬여만 가고 운전자들에게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킴으로써 전체 교통흐름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고치고 또 고쳐도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교통체계와 비유하자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통합교과형 논술고사나 고교등급제 금지는 녹색신호가 교통사고를 부른다고 섣불리 예단하고 모든 신호등을 적색으로 바꾼 격이다.
일견(一見) 좋은 취지의 정책이 ‘항상’ 왜곡된 결과를 초래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스템적 결함’ 때문이다. 현 교육시스템의 가장 큰 결함은 ‘좋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본성’을 억압하는데 있다.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좋은 학교를 원하고, 학교가 좋은 학생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모두가 좋은 것만을 추구해서 문제가 생기니 차라리 좋은 것을 없애자’는 식과 다름이 없다. 그 구체적인 증거의 하나가 고교평준화가 초래한 ‘하향불평준화(下向不平準化)’다.
그 어떠한 사회시스템도 유인(誘引)구조가 허약할 경우 생산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사회주의 경제가 왜 망했는가? 사회주의가 내거는 평등, 공평 등의 구호들은 절절(節節)이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호소력을 가졌지만 사람의 행동을 유발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유인구조는 사회적 자원을 낭비시킨다. 사교육의 기승, 공교육의 피폐는 바로 이러한 잘못된 유인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 현재의 교육시스템 하에서는 학생도, 교사도 학교교육에 충실할 이유가 없다. 학교가 학생들의 놀이터거나 낮잠장소가 된 것도, 교사들이 관료화되고 학교가 관청화된 것도 바로 이런 잘못된 유인구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 교육이 지속적으로 황폐화되고 있는 또 다른 주요요인은 교육의 국가독점이다. 우리 교육시스템은 공급주체인 국가가 교육의 유인구조를 결정하는 실로 편향적인 시스템이다. 일반 시장에서라면 유인구조는 거의 절대적으로 소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에서 교육소비자인 학부모와 학생은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그동안 수많은 교육개혁실험이 있었지만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식정보산업사회에서 개인의 능력과 창의성 개발은 필수적이다. 때문에 현대의 교육소비자들은 보다 다양한 소비자욕구에 부합되는 교육을 원한다. 그러나 최종교육공급자인 일선학교는 이러한 소비자의 욕구에 맞추어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의욕도 없다. 예컨대 학생들이 중국어, 일본어, 서반아어를 제2외국어로 수요하더라도 기존교사의 수에 맞추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그런 시스템이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공급이라도 수요를 창출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학교 현장에서는 교육 공급과 수요가 각자 따로 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우리의 교육 게임은 모든 교육주체가 피해자가 되는 ‘잃는 게임(loser's game)’을 피할 수 없다.
현재 비난받고 있는 대학도 역시 피해자의 하나다. 사회에서는 불량품을 양산한다고 아우성이고, 불량원료(?)를 최소화해 품질관리를 하겠다고 하면 차별이니, 정부정책에 따르지 않는다느니 온갖 비난을 쏟아 붓고 간섭한다. 대학인들 국․영․수 문제풀이 기술자를 선발하고 싶겠나. 문제는 획일화된 교육과정과 정부간섭에 있다. 세상이 어떻게 또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 지에는 눈과 귀를 닫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고집스레 강요하는 시민사회단체들도 결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양하고 독특한 가치와 커리큘럼이 서로 경쟁하고, 대학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까지 자율성이 신장되고 그에 걸 맞는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우리 교육 시스템에서 엇박자는 계속될 것이고 사회적 혼란과 국론 분열은 가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