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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결국은 다산과 풍요였어!


선돌이 여근을 만났을 때
선돌은 대체적으로 청동기시대 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선돌이 청동기 유물로 대표적인 고인돌과 결합한다면 어떨까요? 경북 영주로 떠나 봅시다. 시내 휴천동에서 고인돌 2기와 선돌 1기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선돌의 높이는 약 1.5m로 그리 크지는 않으며 고인돌에 사용된 덮개돌 두 점이 제 자리를 잃은 채 바닥에 엎어져 있습니다. 덮개돌엔 성혈(性穴)이 몇 점 보입니다. 성혈은 여근을 상징하며 선돌은 남근을 상징하니 음양의 조화가 완벽합니다. 이렇듯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지석묘가 선돌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 하겠는데, 순흥 땅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선돌은 5m 간격을 두고 2기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마을 입구 소나무 숲에 위치해 있는데 오른쪽에 서 있는 선돌 앞에도 덮개돌이 보이고 그 표면에 역시 성혈이 보입니다. 마침 인근에 여근동(女根洞)이라는 마을이 있어 그 여근에 대해 남근을 상징하는 선돌을 세운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근과 관련해서 선돌이 세워진 것으로 해석하는 이러한 사례로 부산 기장군 철마면 선돌을 들 수 있습니다. 선돌 관리를 맡고 있는 이중희씨에 따르면 맞은편에 내다뵈는 계곡의 형태가 여자의 음부를 닮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 마을 사내들이 그 기운에 억눌려 제 명에 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이곳을 지나다 그 사연을 듣고는 음기를 차단할 수 있도록 선돌을 세우게 하였고 그 이후로 화가 물러 갔다네요. 이 선돌이 선사시대에 세워졌건 후대에 세워졌건 분명하진 않습니다.

선돌이 이러한 풍수지리개념으로 들어섰다면 그 선돌은 역사시대의 산물일 테고, 가만히 서 있던 선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갖다 붙였다면 청동시시대의 산물일 테지요. 여기서 ‘청동기시대 = 선돌’이란 등식이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접근이 가능하겠습니다. 이 철마 선돌 바로 앞에는 동래 정씨 문중의 산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망주석을 앞에 내세우고 뾰족한 철마산을 배경으로 4m 가까운 거대한 선돌이 땅을 우뚝 밟고 있어 그 날카로움에 이내 기세가 꺾이고 맙니다.

성기숭배신앙의 흔적을 찾아
이러한 남근숭배신앙은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되었던 부근당(府根堂) 당집에는 남자 성기를 상징하는 목각물을 곳곳에 걸어두었었고 삼척 해신당에도 역시 남근을 바치는 풍속이 이어지고 있지요. 경주 안압지에서 남근을 조각한 목제품이 출토되었고,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지철로왕의 거시기 이야기와 선덕여왕 지기삼사 중 여근곡과 관련한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특히, 유교문화가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조선시대의 경우는 아들을 낳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부여받은 여인네들에 의해 이 남근숭배신앙이 확산되기에 이르렀지요. 인도의 경우, 시바신을 모신 사당에서 생명의 원천이요, 풍요의 상징인 링가와 여근을 상징하는 요니가 결합되어진 것을 볼 수 있지요.

우리나라 곳곳에서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다듬은 성기숭배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남근과 여근신앙은 쉬쉬하는 차원을 벗어나 당당히 문화재로서 대접받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몇 군데를 둘러볼까요?

전북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마을 입구에는 300여 년 전 선비 박잉걸이 세웠다는 남근석이 있습니다. 그는 마을 뒷산에 있는 여근곡과 여근암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장승과 함께 남근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자손이 귀한 사람이나 불임증이 있는 여자가 네 번 절하고 이 돌을 안아주면 아이를 갖는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선무도 도량으로 유명한 경주 골굴사에도 남근바위가 있습니다. 이 남근바위를 마주보는 곳에 산신당이 조성되어 있는데 산신당 앞 평상 한 곳에 네모난 구역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그것을 들면 둥그스름한 천연바위에 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여근바위 위에 앉아 남근바위에 절하고 산신령님께 절하고 정상의 부처님께 절하니 그 정성이 더하여 좋은 소식이 있을 법합니다.

전북 순창 팔덕면 산동리와 창덕리에 각각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된 남근석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약 500여 년 전에 한 여장부가 2기의 남근석을 조각하여 치마에 싸 가지고 오다가 무거워서 1기는 창덕리에 버리고 1기는 산동리에 세웠다고 합니다.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조각하였고, 하단부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띕니다.

임실 사곡리 남근석은 옛날 이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민심이 흉흉해지자 마을 어른들은 마을 형상이 여자의 옥문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마을 입구에 이 남근석을 세워 그 기운을 누르고자 하여 세운 것이라 합니다. 이처럼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대상으로뿐만 아니라 마을전체의 안녕과 번영을 소원하던 공동신앙물이기도 했습니다.

안양 삼막사에도 남근석과 여근석이 함께 있는데 특히 여근석의 적나라함이 눈에 띕니다. 전북 김제 귀신사에는 사자를 닮은 짐승이 웅크려 있고 그 위에 남근을 닮은 마디진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돌기둥을 얹어 두었습니다. 충북 제천 무도리 용암은 여인네들이 건너편에서 돌을 던져 바위에 들어가면 득남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시 제천 동산(東山)에 있는 천연 남근석은 그 적나라함이 삼막사의 그것과 쌍을 이룰 수 있을 듯합니다. 소위 공알바위라 해서 바위를 돌로 갈아 구멍을 내는 행위는 울산 어물리 마애불이나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두 자식을 바라던 민초들의 소리 없는 반항이자 항변이었습니다.

다랭이 마을에서 암수바위를 만나다
남해 바다에 있는 남해군은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남해군이 가진 매력은 창선대교에서 내려다보는 죽방렴, 파도와 해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 ‘어서 오시다’ 혹은 ‘안녕히 가시다’와 같은 남해 섬 특유의 사투리, ‘물건’이니 ‘도마’니 해서 생각만 해도 잔웃음을 자아내는 재미있는 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다가 김만중이 유배를 와서 그의 생을 마무리했던 노도, 이순신이 운명한 이락포, 이성계가 명명한 금산 등 역사적인 이야기까지 덧붙이고 산과 바다에서 나는 풍부한 자원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보물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해에서 찾아낸 보물 중 보물은 뭐니 뭐니 해도 바다로 곧 떨어질 듯한 논배미라 하겠습니다. 섬을 일주하다 바다에 바로 접하기까지 논배미가 첩첩히 조성되어진 것을 흔히 볼 수 있지요. 특히, 남면 가천마을에 이르면 다랭이논이라 해서 지난 2005년 1월 명승 제15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랭이는 ‘다랑이’, ‘다락’, ‘달갱이’의 사투리로 좁고 작은 논배미를 일컫는데 코딱지만한 크기부터 보통 20-30평 남짓한 크기의 다양한 계단식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마늘과 같은 밭작물이 제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다랭이마을 아래에 암수바위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숫바위를 숫미륵, 암바위를 암미륵이라 일컫습니다. 남근석처럼 우뚝 솟은 숫바위 바로 뒤에는 둥그스럼한 바위가 반으로 갈라진 채 여근의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고 그 뒤에는 만삭이 된 여성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듯한 암미륵이 보입니다. 1751년 10월 23일에 남해 현령 조광진이 꿈을 꾸고 난 후 이 바위를 땅에서 꺼내 미륵불로 봉안하고 논 다섯 마지기를 바쳤다고 합니다. 크고 생김새가 독특한 선돌이 대개 미륵신앙의 대상이 되었듯이 이 바위 또한 남근석을 닮은 선돌이 미륵불로까지 승격된 사례라 하겠습니다.

암수바위를 보고 마을로 몇 걸음 올라오다보면 이번에는 돌탑으로 쌓은 밥무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현지인들이 ‘밥구디기’라고 부르는데요,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보름 저녁 8시경에 동제(洞祭)를 지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밥무덤 옆에 당산나무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동제를 두 번 모시는데 10월 15일에는 밥무덤에서, 암수바위가 발견된 10월 23일에는 암수바위에서 제의를 갖는 것이죠.

밥무덤은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한 혼령에게 밥을 주어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을내 세 군데 밥무덤이 있는데 마을 가운데 자리한 돌탑형식의 밥무덤에서만 동제를 지내고 나머지 두 군데에는 밥만 모시고 있답니다. 마을 뒷산 깨끗한 곳에서 채취한 황토를 기존 밥무덤의 황토와 바꾸어 넣고 햇곡식과 과일, 생선 등으로 상을 차려 풍농과 마을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린 뒤 황토를 파서 그곳에 밥을 모시고 덮개돌로 덮어둡니다.

초등교원 신규임용시험을 치르는 날, 대폭 줄어든 채용인원으로 인해 시험장 분위기가 여간 어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4년을 공부했던 어제의 동기가 오늘엔 서로가 서로를 떨어뜨리고 경계해야하는 경쟁자여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채용인원이 줄어든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는 현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제 저출산 문제는 우려할만한 수준을 훌쩍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 멀리 선사시대 암각화에서부터 선돌과 남근석, 성혈, 장승, 풍수지리사상에서 남아선호사상까지 긴 흐름을 겪으면서 민초들이 바랬던 것은 결국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였던 것 같습니다. 그 염원에는 가정사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전체의 번영을 위한 염원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 바램은 한 가정의 문제, 한 마을의 문제를 벗어나 국가적 과제로까지 다뤄져야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래저래 낮아지는 출산율을 보며 한동안 왁자지껄했던 그 시절에 대한 미련을 가슴속에만 묻어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울산 옥현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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