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광복절, 김유정의 해학을 찾아 학생들과 함께 춘천으로 문학 기행을 떠났다. 김유정역에 당도했는데 역으로 남춘천발 청량리행 열차가 들어온다. 상추며 고추 등 채소가 자라고 있는 소박한 역사(驛舍)가 참 정겹다. 그런데 이제 경춘복선 전철이 들어서면서 김유정역이 없어진다고 하니 아쉽다. ㅣ조갑룡 부산경남여고 교장
역에서 5분쯤 걸어 들어가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옴팍한 떡시루(실레) 같은 실레마을이 나타난다. 김유정의 소설 31편 중 12편의 무대가 이 마을이란다. 김유정이 늘 코다리찌개를 안주로 술을 즐겼던 마을 주막과 소설 <동백꽃>의 노란 개동백 피는 금병산 기슭의 이야기 등은 마을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김유정의 숨결과 문학의 향기를 누리게 해준다.
소작인의 아들이라 마름의 딸과는 어울릴 수 없다는 조금은 소극적인 ‘나’와 이성에 일찍 눈을 떠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점순이’의 이야기를 그린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은 ‘나’와 ‘점순이’를 대비적으로 설정해 해학적인 싸움을 벌이게 하는데, 소년의 비성숙성과 소녀의 역설적 애정표현이 갈등 구조를 이뤄 작품에 흥미와 긴장을 더한다. 결국 닭싸움을 매개로 이들 간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어 가다가 점순이의 닭이 죽음으로써 절정을 맞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대립적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된다.
‘갈등’은 ‘해결’을 위한 첫걸음 인간에게는, 의식주를 비롯한 동물적 생존에 필요한 것 외에 사회적 존재로서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데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 갈등 해결학자들에 따르면 그 기본 욕구는 안전, 정체성, 자기결정권, 인정(認定)이며 이러한 욕구가 억압되거나 침해되면 반드시 갈등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동전(中東戰)의 경우, 팔레스타인과 아랍은 그들의 종교적 ·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자기결정권을 회복함과 동시에 독립국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이스라엘과 싸웠고,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한 이유는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가족, 민족, 종교, 직업, 신념 등의 정체성과 관련된 갈등은 가장 심각한 양상을 띠며, 또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다.
아무튼 조직사회 속에서 인간은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자아성취를 위해 노력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어느 조직을 막론하고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방법과 절차, 그리고 이해관계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葛藤 · Conflict)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조직 내 갈등이 클수록, 구성원들에게 스트레스를 초래하고 건강한 조직문화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영향만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구성원들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조성해 생산성이나 창의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갈등은 조직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크게 소모적 갈등과 생산적 갈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차이는 갈등 자체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하고 관리하는가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다.
따라서 갈등은 근본적으로 사전에 억누르고 방지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다. 갈등 거의 없는 조직은 오히려 변화와 발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리하여 갈등의 발생은 문제의 시작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첫걸음이며 조직의 파워는 갈등을 인정하고 이를 해결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경영에서의 갈등 관리 학교경영에 있어서 학교는 학생, 교직원, 학부모라는 교육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특성과 역량을 학교의 교육목표와 잘 융합되도록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의 교육목표를 달성하려는 과정에서 공동체 간의 견해차이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갈등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는데 주로 ‘인사 및 업무분장’, ‘의사결정구조’, ‘학교 구성원들 간의 인간관계’, ‘교육철학의 차이’ 등이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인사 및 업무분장과 관련한 갈등은 승진과 연관되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담당업무 희망서를 받고 인사자문위원회의 협의 등 교사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교장의 고유권한임을 강조하다 보니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인사 및 업무 분장과 관련한 갈등이 많은 것은 좋은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실천이 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가 그 자리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가’에 인사와 업무분장의 원칙을 세우고 연공서열과 능력을 조화롭게 반영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업무 처리의 편리함만을 생각하고 학교장의 개인적인 취향이 인사업무에 많이 개입된다면 학교 내에서 억측과 소문이 나돌게 마련이며, 이런 것들은 갈등의 불씨가 된다. 본교의 경우, 부장 임용은 강의평가 결과에 기초를 두고 본인의 희망부서와 부서 운영계획서를 받은 후 인사자문위원회의 검토와 협의를 거쳐 그 결과를 반영한다. 일종의 ‘부장 공모제’인 셈이다. 동료들이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구조는 학교 내에서 학교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과 관련해 매우 중요하다. 일사불란하게 앞만 보고 나아가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처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면서 교직원들을 정신무장 시킨다고 되는 시대도 아니다.
학교 내에서의 갈등은 의사소통 여하에 따라서 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갈등이 많은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의 차이점은 합리적 의사 결정 구조의 존재 여부 및 운영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교직원의 자문과 교직원 전체의 협력체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가 필요하다. 매주 실시하는 10분〜0분 정도의 직원회의 말고도 본질적인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
본교에서는 소통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목요일 7교시를 교직원 난상토론의 시간으로 활용하다가 이제는 월요일 7교시를 전체 교직원회의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매주 교장 · 교감이 참석하는 전체 부장회의, 3부 부장회의, 학년부장 회의를 각각 1시간씩 가지고 있다.
혹자는 회의가 많은 것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학교를 혁신할 수 있는 권한이 관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더 가까이 있는 선생님들에게 있는, 그런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2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교직원은 다른 조직에 비해서 연령 스펙트럼은 비교적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대와 개인 간의 문화와 교육철학의 차이로 인한 상호 이해 부족으로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 더욱이 요즘 같이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욕구와 취향이 다양하게 분출되기 때문에 갈등 현상은 더욱 증가될 것이다. 따라서 학교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교장의 자리 또한 쉬운 자리가 아니다. 지난 연재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는 CEO로서 전문 경영 능력이 요구되며 교장을 지위보다는 역할로 인식하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에 입각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지위는 역할에서 연유되었고 일이란 역할 분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곧 현장 경영이고 헤드십(Headship)이 아닌 리더십(Leadship)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만드는 보잉사에는 와인을 만드는 클럽이 있다고 한다. 회사가 포도압착기를 사주고 와인보관소를 만들어 그들이 만든 와인을 보관해 준단다. 나도 이런 멋진 경영을 꿈꾸어 본다. 와인을 만들면서 낭만과 멋을 즐기는 선생님들이 우리 학교를 더 매력적인 학교로 만드는 꿈을. 그리고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즐기면서 다음 주에 있을 Co-teaching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같음’과 ‘다름’의 조화 조선의 철학 논쟁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서 조선 주자학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논변(四七論辨)1)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중요한 의미 하나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 논쟁의 핵심은 기대승이 “사단과 칠정이 그 근원에서는 원래 둘이 아니다”라고 한 데 대해 이황은 “이 둘은 그 근원에서부터 이(理) · 기(氣)의 구분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실의 옳고 그름을 놓고 싸운 것이 아니다. 관점의 차이에서 생겨난 논리 싸움이었으니 상대방의 주장을 아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관점의 치우침을 지적한 것이었다. 기대승은 이황이 본래 하나인 것을 둘로 나누는 것을 우려했고, 이황은 기대승이 개념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주자학 본래의 의미를 잃을까 걱정했다. 이들은 서로의 치우침을 경계함으로써 각자의 착오를 깨달아 치우침이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기대승은 이황이 사단과 칠정의 개념을 나눈 깊은 뜻을 자기가 이해하지 못했음을 시인했고, 이황은 기대승의 견해를 수용해 사단과 칠정의 근원이 하나임을 인정했다.
기대승과 이황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옳고 그름을 입증하고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설득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교환하고 함께 발전시켜 나간, 그리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중에서도 같은 점을 찾는, 존이구동(尊異求同)의 지혜가 참으로 돋보인다.
이타적 어울림 아비와 남매가 이웃마을에 소리를 팔고 뉘엿뉘엿 보리밭 돌담길 고개를 넘다가 아버지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니 딸이 화답하고 아들이 북채를 휘둘러 금세 그들의 걸음은 생기를 찾는다. 푸른 보리밭을 따라 누런 황톳길이 나직한 돌담과 함께 그들을 따라 길게 흐른다. 전남 완도군 청산도 당리마을에 있는 영화 <서편제>의 돌담길은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힌다.
우리네 돌담은 밭을 갈다 쟁기에 걸려 나온 돌로 바람을 막을 겸 쌓은 것이다. 그렇게 캐낸 갖가지 돌들이 생긴 대로 서로 받치고 틈을 메워 균형을 잡는다. 치수를 재고 다듬어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돌끼리 부딪치고 양보하고 비비며 서로 어울린다 해서 건축학자 임석재 교수는 이를 ‘이타적(利他的) 어울림’이라고 명명한다.
돌담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담 안팎의 옛집과 오래된 감나무, 이끼와 넝쿨, 꽃들과 함께 돌담은 정겨운 마을길을 지켜왔다. 돌담은 어머니처럼 수수하고 친구처럼 다정해 지나가는 이들을 편안한 상념에 빠지게 한다.
<서편제>의 OST인 김수철 작곡의 ‘소리길’을 듣는다. 대금과 소금의 깊고 깊은 소리가 포근한 스트링 소리를 배경으로 해서 더욱 맑게 다가온다. 그래, 돌담을 닮은 그런 교장의 흉내부터 내 봐야겠다.
--------------------- 1)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관한 논변, 사단이란 맹자가 말한,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 시비를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이란 <예기>에 실려 있는 기뻐하고(喜), 성내고(怒), 슬퍼하고(哀), 두려워하고(懼), 사랑하고(愛), 미워하고(惡), 욕심내는(欲)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사단은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발현된 것이고 칠정은 생각이나 헤아림에 의해 변질되어 발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