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운주사에 들렀습니다. 밤새 폭설이 쏟아져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눈길을 하염없이 달렸습니다. 그렇게 만난 운주사는 사위가 고요했고, 눈으로 하얗게 옷을 입은 와불(臥佛)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운주사 와불이 벌떡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지요. 어쩌면 그 꿈이 이루어질 수는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만난 것은 산 전체가 무너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와불은 절대 일어설 수 없다는 진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와불은 일어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일어설 거라는 믿음, 그 자체가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힘들지만, 한숨 쉬고 있지만, 슬픔에 울고 아파하며 절망하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그런 믿음이 현재를 걸어가게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임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하고 돌아왔습니다.
교육은 참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교육과 관계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키는 교육제도도 사실 없습니다. 이쪽을 보면 저쪽이 봐 달라고 하고, 저쪽을 보면 이쪽에서 손짓을 합니다. 여기를 말하면 저기가 불안해합니다. 저기로 달려가면 여기가 슬퍼합니다. 문제는 자꾸 드러나는데 그것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학교도, 선생님도, 아이들도 점점 힘들어합니다. 어떻게 하면 학교를 위한, 선생님들을 위한, 아이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수 있을까?
고민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닌 깜냥으로는 도저히 그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사람을 만나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러 갔지만 알고 보면 내 안의 나를 만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통해 내 안의 나를 만날 때 무척 힘들기도 했습니다. 내 지난날의 부끄러운 모습들과 지금의 힘든 풍경들과 앞으로의 고단한 삶이 거기에 숨 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목소리 말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대답보다는 질문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질문이 A4용지 10쪽이 훌쩍 넘었습니다. 자신이 위치한 좌표 속에서 질문의 내용은 다양했습니다.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도 달랐습니다. 세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풍경도 달랐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도 있었지만 내가 대답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질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쩌면 크게, 또는 조금씩 달랐지만 대부분 그들은 묻고 있었습니다. ‘와아? 와? 와 그라는데?’라구요. 그 질문은 사실 본질적인 것입니다. 왜 그러는지에 대한 질문의 대상은 자신일 수도 있고 타인일 수도 있고 사회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고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무언가가 잘못된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분명 괜찮을 텐데 그렇게 하는 곤혹스러움? 바라는 것은 사소한 행복인데 왜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을까 하는 원망스러움? 천천히 걸어가도 되는데 자꾸만 달려 나가기를 요구하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 충분히 견디고 있는데 더 견디라고 요구하는 시대에 대한 억울함? 몰라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텐데 앎을 강요하거나 알고 싶은데 모르고 사는 것이 옳다고 우기는 억지스러움? 타인들은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다는 슬픔? 그런 마음들이 ‘와 그라는데?’라는 표현에 담겨 있었습니다. 어쩌면 ‘와 그라는데?’라는 물음에는 의문을 넘어 두려움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감정은 ‘불안’일지도 모릅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직장을 얻지 못하면 어떡하나, 직장에서 쫓겨나면 어떡하나, 자식을 돌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늙었을 때 버림받으면 어떡하나. 그렇습니다. 작게는 ‘아침에 지각하면 어떡하나’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위에서는 ‘너도 하면 된다’고 격려하지만 그 격려는 승자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해도 되지 않으면 다시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은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안은 개별적인 인간의 내면에 학습되었고, 사회 전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거기에서 행복을 말하는 것 자체가 오류입니다. 개인, 나아가 사회 전반에 팽배한 바로 이 불안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의 풍경이 되어야 합니다.
10명 정도의 선생님들에게 현재 학교의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단어를 10개씩 보내달라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다양한 단어들이 등장했습니다. 상징화된 단어(밀림, 게임, 변종, 원형극장)로부터 시작하여 현실적인 단어(스카이, 지잡대, 줄 세우기, 재수, 입시, 수업, 배움), 사자성어(과유불급, 조삼모사, 청출어람)도 있었습니다. ‘개같이 공부해서 개처럼 사는 것’이라는 자조적인 표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선생님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경쟁’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현실적인 진단을 넘어 이제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마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와 그라는데?’라고 묻는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은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로 아이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을 키우는 바로 그 지점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내일의 교육이 시작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