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5000년 동안 피 흘리며 거꾸러지며 싸워 온 목표는 오직 하나, ‘사람은 소중하다’였다. 모든 사람은 전무후무한 특이한 존재다. 아무리 못생긴 바보 천치라도 그의 어머니에게는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있고서야 정치가도 될 수 있고, 교사도 될 수 있다. 교사라는 직업이 소중하다는 것도 인간을 기르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기르는 어린이 하나하나를 다 우주보다도 더 소중하게 대접하지를 못한다면 스스로 교사의 특권을 매장해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1960년 5월 1일에 발간된 <새교육> 권두언 ‘우주보다도 더한 것’은 이렇게 어린이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었다. 15번째 어린이날(1946년 기념일 지정), 5번째 어머니날(1956년 기념일 지정)을 되새기는 뜻 깊은 5월호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세계의 어린이 헌장에 대한 해설이 실렸고, 어린이에 관한 몇 편의 글이 실렸을 뿐 이전 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시론과 특집, 연재물 ‘나의 잊지 못할 스승’과 ‘현상 교육논문 당선작’ 발표도 변함없이 지면을 차지했다. 연재물 ‘바둑강의’는 ‘변두리 두는 법’을 소개하고 있었다. <새교육>은 어제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 호에 실린 글들이 작성되고 편집되고 있던 한 달 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뒤집히고 있었다. 4·19혁명이었다.
<새교육> 1960년 5월호는 역사 그 자체 어머니에게는 ‘우주보다도 더’ 소중했던 무려 185명의 학생과 시민의 생명이 권력의 폭력 앞에 사라져 갔다. 1960년 4·19혁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발간된 것이 바로 <새교육> 1960년 5월호였다(제12권 제5호). 학원탄압, 데모, 부정선거, 그리고 혁명으로 이어진 혼란과 변화 속에서도 <새교육>은 중단되지 않았다. 1960년 5월호는 역사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4·19혁명 성공 이전 사회적 혼란 속에 작성된 권두언과 혁명에 성공하던 바로 그 날, 감격 속에 작성된 편집후기가 함께 실렸다는 점이다. 편집후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4월 26일, 누구는 이날을 민권 승리의 날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시민혁명의 날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이날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 온 날이다. 그냥 얻은 것이 아니고 고귀한 학도들이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한국의 지성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구출한 것이다. 학원은 죽지 않았다. 이 후기를 쓰는 순간은 4월 27일 하오 1시다. 아, 교육의 중대함이여! 학원의 존귀함이여!
195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은 교육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실천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탐욕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가로막았다. 수차례 개헌으로 12년째 대통령직을 유지하던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위해 제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등교를 강요했다. 그러자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경북고등학교를 비롯한 중·고등학교 학생 1,200여 명이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어 서울·대전·수원·충주·부산·인천 등 전국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3월 15일 강행된 정의롭지 못한 선거에서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에,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학생들은 저물어가는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일어섰다. 전쟁을 겪고, 새교육을 경험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웠던 학생들의 눈에는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현실이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마산에서 시작된 항거는 서울·광주·진주·포항 등으로 번져나갔고, 한 달 동안 지속되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저항을 진압하고자 했던 권력은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저항이 거세질수록 권력의 폭력 또한 격해졌다. 4월 11일, 경찰 최루탄에 눈을 맞고 사망한 마산상고 1학년, 17살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학생들의 저항은 다시 타올랐고, 이승만은 이를 ‘난동’이라고 표현했다.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4월 19일 학생들의 총궐기에 시민들이 참여했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피의 화요일, 이날 21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4월 25일 258명의 교수가 학생들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고 다음 날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왔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이 권력을 바꾸는 정치혁명을 성취하였고, 세계는 이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민주교육의 힘, 4·19를 부르다 <새교육> 1960년 5월호에 수록된 대부분의 원고는 이렇듯 숨 막히게 전개되었던 3·15선거와 4·19혁명을 전후로 집필되고, 편집되었다. 발간된 날짜는 5월 1일이다. 편집인 ‘L’이 편집후기를 쓴 일시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 다음 날인 4월 27일 오후 1시였던 것을 보면 실제 인쇄는 4월 28일부터 30일 사이였을 것이다. 권두언과 시론, 특집을 비롯한 대부분의 원고는 4월 혁명의 성공 이전에 이미 작성된 상태였다.
<새교육> 5월호 시론 주제는 이전 호에서 예고된 대로 ‘학원의 자유’였다. 중앙대학교 김종철 교수는 ‘3·15정부통령선거를 계기로 교육공무원의 선거운동, 학생들의 데모사건, 교육행정의 내무행정 예속화 경향’ 등으로 학원의 자유가 크게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교육자들의 각성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택한 것이라고 밝혔다(김종철, <새교육>, 제12권 제5호). 연세대학교 신동욱 법정대학장은 당시 횡행하고 있던 교육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나 정치적 이용을 학원의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신동욱, <새교육>, 제12권 제5호). 고려대학교 이항녕 법정대학장 또한 당시 학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정치라고 단정하였다.
<새교육> 5월호는 기존에 청탁되고 투고된 원고 이외에 긴급 원고 몇 편을 실었다. 청탁과 집필이 하루이틀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중 하나는 동양통신 편집국장이었던 교사 출신의 문인 김광섭의 글이다. 김광섭은 하룻밤 사이에 시급히 작성한 ‘학생혁명과 제2공화국의 전망’이라는 글에서 3·15선거를 ‘몇몇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전 국민의 권리를 유린하고 박탈한 하나의 불법·부정·폭행’으로, 4·19혁명은 ‘조국을 사랑하는 젊은 청소년들의 고귀한 피와 사심 없는 거룩한 애국 운동의 결정’으로 규정하였다.
서울대학교 이희승 교수는 4·19혁명의 의의를 ‘우리 민족의 권위와 명예를 온 세계에 선양한 점’에서 찾았고, 성균관대학교 조윤제 교수는 전국의 교육자들에게 ‘위정자에게 아부하는 태도를 버리자’고 호소하였다. 부산사범학교장 강재호는 ‘악의 파멸이 의의 확립과 동일하지는 않다’는 격언을 예로 들며 교원인사의 적정화야말로 교육 부문에서의 ‘의’를 확립하는 출발점이라고 주장하였다(이상 <새교육>, 제12권 제5호).
<새교육> 5월호는 또한 ‘혁명대열에 나선 지성의 기치’라는 제목으로 4·25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 전문을 게재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14개 조항으로 된 이 선언문은 학생들의 평화적 데모에 대한 지지와 3·15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자 처벌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선언문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이비 학자와 문화와 예술을 정치 도구화하는 문인 및 예술인의 배격, 그리고 3·8선 너머 공산세력에 대한 경계의 내용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