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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파리에 간 조선의 궁중 무희, 리진


부산 영도대교가 보이는 산비탈을 한참 걸어 올라간 곳에 작은 집을 마련한 지인의 초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수 있는 골목을 따라 작은 하수구가 길게 나있었고, 부산이라는 따뜻한 기온에 힘입어 죽지 않은 몇 개의 잡풀이 보였습니다. 개똥이 군데군데 흩어져 마치 사십년 전 어린 시절 그 골목 같았습니다. 

그 시절 한 방에 오롯이 온 식구가 모여서 자면 발을 제대로 뻗어보지도 못하였고 어쩌다 시골에서 큰집 할머니라도 오시면 누군가는 마루에 나가서 자야 했습니다. 칼잠을 모로 세워 자도 그저 사람이 오면 함께 자던 그 시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꼭 그런 제 어린 시절 같은 오밀조밀한 구조의 작은 집에 오랜 벗들과 지인들이 모여 앉았습니다. 얼굴만 봐도 좋은 사람들이 그저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겨우 몇 십년 전 그 삶의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제 아들들은 이런 어릴 제 삶을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칼잠을 자던 제 어린 시절을 사실이라 믿을까요?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팩션(Faction)은 사실(fact)과 허구(fiction)의 합성어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가상의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한 장르를 말합니다. 실제 있는 이야기에 소설의 극적 구성과 반전이 합쳐져 박진감과 흥미로움을 더해 주는 것이 ‘팩션’의 특징입니다. 

소설 '리진'이 바로 ‘팩션’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신경숙은 19세기 말 2대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이폴리트 프랑댕이 클레르 보티에와 함께 쓴 책 '한국에서(En Coree)'에서 언급한 ‘파리로 간 조선 궁녀’를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를 보면,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젊은 ‘대리공사’가 왕궁 소속의 어느 무희를 사랑하게 돼 고종으로부터 그 여인을 하사받아 프랑스로 데려가 결혼까지 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대리공사가 다시 서울로 부임하게 된 뒤 전 주인에게 그 여인을 다시 뺏겼고 여인은 금 조각을 삼키고 자살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신경숙 특유의 유려하고 매력적인 문체로 조선 말을 배경으로 ‘리진’이란 아름답고 총명한 조선의 무희와 그녀에게 매혹된 프랑스 공사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사랑과 명성황후의 삶, 조선의 현실을 잘 표현하여 두 권의 책을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파리로 간 그녀는 아름답고 슬프고 향기로운 여인, 리진이었습니다.
 
궁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콜랭은 서 있는 그 자리에 붙박이는 듯했다. 궁녀의 깊고 검은 눈에 한껏 다정함이 붙어 있어서였다. 장난기 없이, 놀라움 없이 구경하는 마음 없이 이미 자신을 알고 있는 듯이 다정하게 바라보는 조선인의 눈을 콜랭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콜랭은 오로지 그 다정함 때문에 그 자리에 붙박이는 듯했던 것은 아니다. 궁녀의 검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콜랭은 예상치 않았던 옛 추억의 한 단락과 마주쳤다. 이니 잊혀졌다고 여겼던 얼굴 하나가, 궁녀의 반짝이는 검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되살아났다. 급물살에 떠밀리는 느낌이었다.
-봉주르
콜랭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검은 눈의 궁녀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프랑스어로 인사를 했다.
-봉주르
콜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선 왕궁의 궁녀 복장을 한 검은 눈의 여인에게서 프랑스어가 흘러나왔다. /p107~108
 
겨울밤은 깊어갑니다. 그리고 저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생각합니다. 지금 나의 말과 생가가을 과연 사실이라고 나는 며칠 뒤 말할 수 있을까요. 생각이 헝클어진 제 마음에 된바람이 스쳐갑니다. 내일부터 많이 춥다고 합니다. 따뜻한 옷차림하십시오.

『리진』, 신경숙. 문학동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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