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세계 여행은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갔다. 옐로우나이프, 누구나 죽기 전 한 번은 마주하고 싶은 오로라가 존재하는 곳이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오로라를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여행 시작 후 1년을 넘게 줄곧 따뜻한 나라로만 전전하던 우리는 기꺼이 영하 40도의 얼음 나라에 뛰어들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오로라 찬양에 앞서 캘거리에서 옐로우나이프로 가는 1,800km, 왕복 3,600km에 대한 웃음기 싹 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당시 우리에게는 돈보다 시간이 많았다. 캘거리에서 옐로우나이프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단 2시간이면 도착하는 비행기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렌터카를 선택했다. 캘거리 공항에서 차량을 렌트한 후 에드먼튼까지 반나절, 도로 옆 하얀 눈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역시 차로 이동하길 잘했다고 우쭐대는 남편과 함께 희희낙락 거리며 도시를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그날 따라 유독 자주 눈에 띄던 자동차 사고. 두 세 대씩 추돌한 사고는 예사 4중, 6중, 8중 추돌은 물론이고 거꾸로 뒤집힌 자동차도 여럿이었다. ‘아니, 캐나다가 이렇게 사고가 많은 나라였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남편이 소리쳤다.
“도로가 이상해! 차가 이상한가? 아니 도로가 이상해!”
블랙 아이스(Black Ice). 눈과 습기가 도로 표면의 틈새로 스며들었다가 기온이 갑자기 떨어질 경우 생기는 얇은 얼음막을 가리키는 용어다. 두껍게 얼면 흔히 볼 수 있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빙판길이 되겠지 만 표면만 살짝 언 블랙 아이스는 육안으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다. 즉, 속도를 줄일 새도 없이 빙판길을 주행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당황해서 브레이크를 살짝이라도 밟게 되면 자동차는 이미 통제할 수 없이 휘돌아버린다. 문제는 방금 전까지 멀쩡했던 도로가 단시간에 이런 현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일인 양 스쳐 지난 그 사고들이 지금 당장 내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렌터카는 스노타이어 차량도 아니었고, 미처 스노체인도 빌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우리는 옐로우나이프로 가는 도중 렌터카 회사 찾아 스노체인을 빌릴 생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시라 부를 수 있을 크기의 마을은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캘거리에서 옐로우나이프를 잇는 1,800km의 거리를 3박 4일간 시속 40km로 기어서 이동했다. 그리고 그중 두 밤을 차에서 보냈다. 잠을 잘 수 있는 숙소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뛰어가는 게 차라리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천히, 안전을 먼저 생각하여 이동했다. 뭐라도 사 먹을 데가 보이면 시간에 상관없이 끼니를 때웠고, 해가 진 후엔 최대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쉼터에 차를 세우고 잠을 청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뒀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렇지만 언제 어느 순간 나타날지 모를 블랙 아이스 때문 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이동 첫날밤, 숙소를 찾지 못한 우리는 차에서 밤을 지새웠다. 설상가상으로 기름도 넉넉지 않았다. 이러다 얼어 죽겠다 싶을 시점에 딱 한 번 히터를 틀었을 뿐이었다. 극한 체험이란 게 이런 걸까? 이틀째 되는 밤, 운 좋게 이 한겨울에 운영중인 모텔을 발견했고 그 밤은 따뜻했다. 하지만 다음날 우리는 경악했다. 자동차 트렁크에 있던 1.5리터짜리 물 10병이 모두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 하 40도의 위엄이었다. 결국 세 번째 밤도 차에서 잠을 잤다.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여행이 늘 옳지만은 않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사를 위협하는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후 도착한 옐로우나이프. 도시 내 전광판에 적힌 숫자는 영하 26도를 가리켰지만 눈에 보이는 숫자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도시의 불빛들이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넘겨다 본 창문 너머 세상이 이랬을까 생각하며 인포메이션 센터 앞에 차를 멈추었다. 다시 돌아갈 길을 생각하면 옐로우나이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3일 정도.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3일 밤낮의 계획을 세웠다.
첫날은 오로라 빌리지 투어를 다녀왔다. 호텔 앞으로 찾아온 픽업 버스가 어둠의 통로를 지나 동화같이 아름다운 오로라 빌리지 내부에 사람들을 풀어놓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 람들의 뒷모습이 마치 작은 눈의 요정들처럼 나풀거렸다. 오로라 관측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이 빌리지 내부에는 원주민들의 원뿔형 전통 천막인 ‘티피’가 여러 개 있 었다. 티피 내부에는 난로, 테이블과 의자, 다과와 차 등이 마련되어 있어 오로라의 출현을 기다리며 이겨내야 하는 극지방의 추위를 비교적 쉽게 맞설 수 있었다. 티피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데,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오로라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오로라 빌리지는 그야말로 생에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멋진 곳으로 손꼽을 수 있지만 일일 경비가 1인 10만 원을 호가하기 때문에 두 번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둘째 날, 우리는 직접 렌터카를 타고 오로라가 출현하는 지역을 찾아 나섰다. 옐로우나이프의 지리를 잘 모르거나 오로라 관측 지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도 실패할 확률이 높아 추천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자리 잡은 곳 옆에 마침 오로라 헌팅 차량이 있어서 자신 있었다.
오늘 밤, 오로라를 볼 수 있겠구나! 다행히도 사서 고생하며 도착한 옐로우 나이프 곳곳에서 3일 내내 오로라를 마주 할 수 있었다. 밤하늘의 신과 같은 오로라 너무도 자유분방했고, 한없이 경이로웠다. 언제, 어느 순간, 어디에서 나타날지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예정된 것도,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저 신의 마음가는 대로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기다림이 아주 짧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조금 길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오로라를 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는 사실이다. 꽁꽁 언 손과 발도, 기다림에 지친 마음도 눈 녹듯 사라진다. 희미하게 시작된 오로라가 차디차고 쓸쓸한 거대한 밤하늘을 순식간에 뒤덮는다. 녹색, 보라색, 핑크색 등이 혼합된 거대한 커튼이 되어 찬란하게 휘날린다. 어느 순간 휙 사라지는가 싶더니 반대편 하늘에서 다시 소생한다. 신의 영혼, 마법같은 대자연을 마주하며 그 위대함 앞에서 나는 그저 너무도 어린, 작은 생명임을 깨달았다.
인생에서 ‘만약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생각해봐야 할 조건이 있다. 현재의 기억을 갖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하는 조건이다. 다시 옐로우나이프로 향하는 출발점에 서게 됐을 때, 전자라면 당연히 비행기를 택할 테지만 후자라면 우리는 지난 여행과 똑같은 길을 걸어갈 것 같다. 그래서 그 끝이 더 찬란하게 빛이 났음을 나는 안다.
세 단어로 알아보는 캐나다 1. 옐로우나이프 오로라는 북극과 남극에서 모두 볼 수 있지만, 북위 60~80도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일년 내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60~70도 지 역을 오발(oval)이라고 하는데, 옐로우나이프가 딱 북위 62도에 해당한다. 옐로우나이프는 오발 지역에 속하는 지역 중 정기 항공을 운행하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옐로우나이프에서는 오로라 관측 외에 개썰매, 설피, 스노모빌 등도 체험할 수 있다. 2. 오로라 오로라는 ‘새벽’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1621년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 가센디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명의 신 아우로라(Aurora, 그리스 신화의 에오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옐로우나이프에서 겨울 오로라를 보기에 적합한 시기는 11월에서 4월까지다. 이때 옐로우나이프에 사흘을 머물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은 95%에 이른다. 3. 가는 길 인천에서 옐로우나이프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밴쿠버에서 캐나다 국내선을 이용하여 캘거리 또는 에드먼튼을 경유하여 옐로우나이프로 이동해야 한다. 에어캐나다는 인천에서 밴쿠버 구간을 매일 직항으로 연결(9시간 50분 소요)하며, 한국에서 출발해 최종 목적지인 옐로우나이프까지는 대기 시간을 표함해 1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