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오래된 일이다. 회식 자리에 부하 직원들과 술잔을 나누던 나의 부장님은 약간 취기가 오르는 듯했다. 더러는 진지한 톤으로, 더러는 유머러스한 어조로 말을 했다. “다들 알잖아. 우리 부서는 단결이 잘 되는 부서야. 오늘 기분이 좋다. 나, 여러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야, 박 선생, 너 내 마음 알지? 말 안 해도 알지 응? 좀 잘해 봐. 잘해 보자고!” 평소의 쫀쫀함을 버리고 부장님은 대화의 분위기를 끌어 올린다.
회식 자리의 대화처럼 대화의 현재성 즉, ‘지금 여기’의 현재성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대화 장면이 있을까. 현재성? 그게 무슨 말인가.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 내가 무언가 진행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에, 지금이 더더욱 중요해지는 느낌, 그것이 바로 현재성의 실체이다. 현재이므로 느낄 수밖에 없는 각별함이야말로 현재성의 요체이다.
부장님은 부원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계속했다. 우리는 대화 분위기가 살아나면서 불만 담긴 건의를 하기도 했다. 부장님은 해명성 답변 속에 자신의 불만도 피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부장님은 미안하지만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했다. 누군가 부장님을 택시 태워서 보내 드리고 들어왔다. 해방의 분위기가 되었다. 업무에 대한 불만도 이야기하고, 부장님의 지도력(leadership)을 비판도 했다. 회식 뒷자리가 원래 그런 자리 아닌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부장님이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먼저 일어섰던 그가 30분쯤 뒤 다시 부하들의 회식 자리로 돌아왔다. 왜 다시 오셨냐고 묻자, 그는 씩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자네들 말이야, 나 없으면 내 욕하려고 그랬지? 그럴 거 같아서 다시 왔지. 하하 농담이야.” 우리는 박장대소했지만, 속을 들킨 거 같아서 찜찜했다. 나는 여기서 부장님의 성격이 어떻다는 둥, 그의 본심은 무엇이라는 등, 그런 걸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대화의 현재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현재 대화 중인 대화’가 발휘하는 힘을 말하려는 것이다.
‘현재 대화 중인 대화’는 기묘한 힘을 가진다. 이 힘은 합리적 추론도 무너트린다. 친목회 회장 뽑을 때, 참석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뽑자고 제안하여, 그대로 결정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현재 대화 중인 사람들만이 결정한 그 나름의 불합리한 합리성이다. 더러는 도덕적 판단도 잠시 밀어내는 힘을 발휘한다. ‘대화의 현재성’이 만드는 사랑의 언약이야말로 허술함을 타고난다. 그 맹세가 훗날 배신이 되는 것은 현재성이 지닌 취약함 탓이다.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당도 할 수 없는 약속 즉,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겠다고 한 것도 ‘대화의 현재성’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대화의 현재성은 ‘참여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을 강화하기도 한다. 부장님이 회식 자리로 되돌아온 것도 ‘대화의 현재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부장님은 회식 자리 대화를 벗어나는 순간 미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의 마음은 ‘현재의 대화(조금 전까지 행했던 대화)’에 아직 머물러 있는데, 몸이 그 현재를 떠난다. 순간, 그는 자기 존재의 단절이라고나 할까, 정서의 허전함을 느낀다. 대화의 현재성이 가지는 강한 구심력에 끌려 이내 다시 회식 장소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02
그날 회식을 마치고 나는 합승 택시(가는 방향이 같은 승객을 여럿 태우던 택시)를 탔다. 차 안에는 세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다들 나처럼 모임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는 듯했다. 승객 중 누군가 내게 행선지를 물었다. 내가 가장 멀리 가는 승객인 줄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로가 행선지를 묻고, 말문을 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택시 기사의 나이를 묻자, 금방 나이들이 오간다. 형뻘이 된다는 둥, 동생뻘이라는 둥 하면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직업에 불만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하는 일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사는 일의 고단함을 말하면, 공감의 맞장구가 이어진다. 한때 잘 나가다가 망한 이야기, 새로운 시도를 희망 섞어 말하는 이야기도 나눈다. 마치 오래된 친구들끼리 만나 우정이 살아나는 듯한 분위기이다. ‘대화의 현재성’ 때문일까. 나도 대화에 잘 끼어든다. 아주 짧지만, 역동적인 대화 공동체가 만들어진 셈이다.
첫 번째 승객이 내렸다. 주말에 복권 사보는 재미로 지낸다고 했던 사람이다. 남은 승객 중 누군가가 그를 가볍게 비난한다. 그런 요행수나 바라고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나. 뭐 그런 비판이다. 나머지 두 승객도 조심스레 그 비난에 동조한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저 사람 가족들 진짜 힘들겠다는 둥, 톤을 높여 그를 욕한다. 우리는 ‘대화의 현재성’에 깊숙이 참여한다. 대화의 주체임을 과시한다.
두 번째 승객이 내렸다. 누군가 그의 흉을 본다. “돈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너무 잘난 척한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잘난 줄만 아는 사람은 정말 밥맛없다.” 기사가 슬쩍 동조하며 끼어든다.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그냥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유식하다는 듯이 말한다. “과도하게 잘난 척하는 사람은 마음에 열등감이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대화의 현재성’ 안에서 의기투합(意氣投合)이다.
세 번째 승객이 내렸다. 택시 안은 기사와 나, 둘만 남았다. 기사가 나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듯 말한다. 잘난 척하기는 지금 내린 양반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하겠네요. ‘대화의 현재성’이 나를 대화에 가담하도록 부추긴다. 내가 말한다. “잘난 척하는 사람을 조금도 못 봐주는 마음, 그게 바로 더 잘난 척하는 마음인데, 참 고약한 거지요.” 이러는 나야말로 잘난 척하는 거 아닌가. 물론 이건 나중에 든 판단이다. ‘대화의 현재성’이 이런 판단을 밀려나게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내렸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총총했다. 무언지 설명할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쯤 택시 기사가 나를 흉보고 있을 것 같았다. ‘대화의 현재성’은 그 뒤에 오는 다른 대화의 현재성에 의해서 금방 대상화되어 밀려난다. 나는 택시 안 대화에서 무슨 말들을 지껄였던가. 무엇에 홀린 듯했다.
03
‘지금 진행되고 있는 대화’는 은연중에 사람을 빨려들게 한다. 마력이다. 그것은 물의 소용돌이와도 같다. 아예 참여를 안 하면 모르지만, 참여하게 되는 순간, 그 대화를 역동하게 하는 한 축으로서 구실을 아니 할 수 없다. 만나서 대화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동의해 주지 않았을 일인데, 어찌 이야기하다 보니, 반승낙을 해 주게 되는 경우를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헤어져 돌아오면서 후회하지만 이미 늦은 후회이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하다.
현재의 대화 상황에서는 ‘지금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방’이 가장 중요하다. 상대방보다 더 중요한 사람도, 지금의 대화 장면에서는 나와 상대방에 의해서 대상화된다. 예컨대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와 내 부모님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생각해 보라. 누군지도 잘 모르는 상대에게(그러나 왠지 마음이 끌리는 상대에게), 부모님이라는 존재를 약간은 흉보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부모님이 소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지금 대화 상황에서는 나와 상대방만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은 아무리 소중해도, ‘대화 주체인 우리’가 대화에서 다루는 대상에 불과하다.
현재는 언제나 절박하고,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래서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하고 옆에서 소곤거리면 귀가 그리로 쏠린다. 시공간적으로 가까우면 같은 편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래서 현재성으로만 매몰되는 것은 위험하다. 어떤 일을 함께 모의했다가, 다시 뒤에 누구를 만나, 그 모의를 번복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현재의 밖’을 보지 못한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
‘대화의 현재성’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교육적으로 유용한 시사를 주기도 한다. 아이들과 대화할 때, 친화력 있게 다가갈 수 있다. 선생님과 나, 둘이서 ‘우리’가 되는 경험을 갖는 것이다. 학부모와도 ‘대화의 현재성’을 최대한 살려 본다. 학부모와 교사가 함께 ‘우리’가 되어, 칭찬하거나 비판하고 싶은 대상을 공유하여, ‘대화의 현재성’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친밀과 신뢰를 미리 벌어두면, 이보다 더한 소통의 지혜도 없다. 협상에 능한 사람은, ‘대회의 현재성’이 주는 효과를 잘 살리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