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전후다. 당시 누군가 재미삼아 컴퓨터 등급을 가리키던 386에 빗대 만든 말이 언론을 타고, 일상어가 되고 말았다. 이들은 어느덧 우리 사회 주류를 형성하고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586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넥타이부대로 되 된 변혁의 상징은 이제 변혁의 대상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기는 모양새다. 불꽃같던 정열은 어느덧 희미해져가고 얼음처럼 차가웠던 이성은 세월의 온도를 이기지 못한다.
교육계의 586은 고단하다. 5.31 교육개혁이후 숱한 교육정책의 변화과 정년단축, 연금대란, 명퇴열품, 교권 추락, 학교붕괴 등 숨돌릴 틈 없이 보내왔다.
한국 현대 교육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하지만 어느덧 꼰대와 아재라는 소리에 익숙해져 가고 학생들은 물론 후배 교사들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나마 교장, 교감이나 장학관 등 관리직으로 진출한 경우는 사정이 좀 나은편. 조직의 리더로서 아직은 역할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겉으론 견고해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도전과 시련을 ‘짬밥’과 ‘눈치’로 버텨내기는 마찬가지다.
386에서 586으로 버전이 높아진 50대. 2019년 그들이 겪고 있는 교단의 현실은 어떨까. 이번 호에서는 90년대 교단에 들어와 격동의 한국교육을 온몸으로 받아낸 50대 교사들의 삶과 고민을 생각해본다. 민주화와 함께 교육개혁의 주체가 돼, 누구보다 뜨거웠던 586. 한국교육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나이주의’라는 벽을 넘어 끊임없이 도전하는 ‘586 교사들’을 조명해 본다. |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나는 2013년 3년간의 중앙공무원교육원장을 마치자 갑자기 출근할 곳이 없어졌다. 여기저기 오라는 곳이 있었지만, ‘고위공직자는 퇴임 후 3년 이내에 업무와 관련된 곳에 취업할 수 없다’는 법규 때문에 취직이 막힌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서재로 출근을 하는 것을 며칠 해보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아내는 더 했을 것이다. 나이 창창하고 건강한 남편이 집 안에만 있으니 오죽 했을까.
마침내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첫째, 취업이 안 되면 창직을 하겠다. 창업은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고, 창직은 이 세상에 없는 직업을 만들어서 창업하는 것이다. 둘째,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 두 가지가 있는 일을 찾겠다. 즉, 돈도 벌 수 있고 사회적 기여를 통해 보람도 있는 것을 찾겠다. 셋째, 앞으로 100일 안에 찾겠으니 나에게 당분간 자유를 달라.”
아내는 어쩔 수 없으니 동의했을 것이다. 그날부터 여기저기 여행을 하면서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지 구상을 하였다. 한라산도 가보고, 백두산도 다녀왔다. 그다음에는 국회도서관도 다니고, 정보도 검색하면서 직업탐색을 하였다. 평생 교육계에서 일했으니 교육한류를 펼쳐보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의 앞선 교육체계를 동남아·중남미·아프리카로 확산시키는 구상이었다. 방송통신대학 모델은 적은 비용으로 많은 사람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우리나라 평생교육제도도 장점이 많으니 이를 널리 확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교사의 퇴직금은 보는 사람이 임자?
또 한 가지는 국민행복 캠페인이었다. 국민소득은 늘었는데 행복지수는 오히려 떨어지고, 심지어는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 고순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국민행복지수를 높이는 다양한 사업을 하는 구상이었다. 이런저런 탐색을 하다가 마침내 ‘협업’이라는 화두를 찾아내었다. 30여 년의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을 거치며 발생한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대두된 ‘분노사회’를 반성하고 보완하려는 움직임에서 나온 것이 협업이다. ‘협업’은 두 개 이상의 개체가 서로 도와서 거대한 시너지를 내거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협력을 통한 상생이 기본개념이다. 사회적으로 협업경제·협업행정·협업경영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협업문화를 진흥시키는 일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제는 정부 부처에 협업을 지원하는 부서가 생기고 많은 기업이 협업을 경영의 핵심과제로 삼고 있다. 문화예술계에도 아트콜라보가 대세다. 그동안 열심히 강의하고 자문하면서 우리나라에 협업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보며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시중에 나도는 우스개가 있다. 고위공직자 직업군인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한 사람의 퇴직금은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사람들의 명단을 사고판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다. 그러나 퇴직자들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주변을 보면 온갖 감언이설에 속아서 퇴직금을 날리거나 어설픈 창업으로 실패를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부담을 줄이려면 미리미리 은퇴 후 준비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 명강사양성과정이 있다. 나도 이 과정에 출강하고 있는데 수강자들은 보면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공직자로 퇴임한 분도 있고 예비역 장성도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아직 현직에 있는 분들이 미래를 대비해서 이 과정을 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강의를 잘하는 기법을 전수받는 게 아니라 강사로 입문할 수 있는 정보와 인맥을 공유하며 미래를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몇 년간 출강하며 지켜보니 퇴직 후 강사로 재탄생한 멋진 사례를 여러 건 볼 수 있었다.
나이 오십은 여름... 가을 준비 늦지 않아
지금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사회적 부담도 있지만, 개인의 건강 수명이 늘어난 것은 축복이기도 하다. 백세를 살며 지금도 열심히 강의하고 책 쓰시는 연세대학교 김형석 교수님을 보면 건강백세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여든이 된 김동건 아나운서와 방송인 송해 선생도 젊은이 못지않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김동건 아나운서는 ‘장수회’라는 모임 회원인데 선배들이 많아서 모임에 나가면 막내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회원입회 자격이 80세 이상인데 백세 넘으신 분들도 나오신다니 아직 젊은 회원인 것이다.
건강백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직장을 은퇴했다고 인생을 은퇴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김형석 교수·송해 선생·김동건 아나운서는 고령에도 건강해서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지만 뒤집어 보면 사회활동을 하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김형석 교수님은 백세를 살아보니 인생에 제일 좋았던 시기가 65세에서 75세까지라고 말한다. 이때쯤 되어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마음도 담담해지고, 철도 난다고 한다. 인생을 사계절로 비유하면 이때가 아름다운 가을철이다. 50대 교사들은 아직 여름철이라고 할 수 있다. 퇴직 후 아름답고 알찬 가을을 맞이하려면 지금부터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무엇일까.
첫째는 건강관리다. 요즘 여기저기 헬스장이 성업 중이다. 나이 드신 분들도 많다. 건강백세를 대비하려면 미리미리 건강부터 챙겨야 한다. 자녀 다 키우고 안정된 노후를 맞아 재미있게 살려고 하는데 건강이 무너져서 꿈이 사라지는 분들이 너무 많다. 본인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배우자의 건강도 함께 챙겨야 한다.
둘째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 돈벌이 없이 연금이나 있는 돈만 쓰는 것과 돈을 벌면서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또한 노후에는 사회적 보람없이 돈벌이에만 몰두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돈과 보람 양 날개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셋째는 과도한 욕심을 피해야 한다. 전 재산을 투자해서 하는 사업이나 전문성이 없이 뛰어드는 사업은 십중팔구 망하게 마련이다. 특별한 이익이나 과도한 혜택에 솔깃하더라도 사고를 당하기 쉽다. 이 나이에 실패하고 무너지면 재기가 불가능하다. 풍선은 80~90%만 불어야지 계속 불면 결국 터지고 만다.
넷째는 노후대비는 반드시 부부가 상의해서 해야 한다. 퇴임 후, 귀농·귀촌하겠다고 아내와 상의 없이 고집하다가 결국 남편은 농촌으로, 아내는 대도시에 남아 따로 사는 경우도 보았다. 아내가 하지 말라는 사업을 시작했다가 망해서 가정파탄이 나는 경우도 많다. 노후생활은 가급적 배우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지내야 모든 게 잘 풀린다.
다섯째는 버킷리스트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청소년기부터 꼭 하고 싶었던 일도 있고 업무가 바빠서 미루어 온 일도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열거해 보고 간추린 후 미리 준비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꿈, 친구들과 세계일주를 하는 꿈, 악기연주회를 여는 꿈, 부부 사진전을 여는 꿈, 소설책을 쓰는 꿈. 이런 꿈들이 있어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고 만다.
젊은 시절을 화려하게 보냈다고 멋진 인생이 아니다. 노후가 아름다워야 멋진 삶이다. 선진국일수록 매력적 시니어가 많은 게 공통점이다. 젊은이들이 저런 스승처럼, 저런 선배처럼 살고 싶다는 노후를 살아야 한다. 알찬 노후 대비는 50대에 하는 게 제일 좋다. 인생은 짧지도 길지도 않다. 그러나 퇴직도 노년도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