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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수

01

생생하고 역동감 있는 대화(Dynamic Speech)를 하려면, 신체 언어(Body Language)가 꼭 필요하다. 신체 언어를 사용할수록, 상대와 내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느낌으로 대화 분위기가 잡힌다. 편지나 SNS로는 얻을 수 없는 효력이 발생한다. 돈 빌리는 일을 포함하여, 내 쪽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화일수록, 상대를 만나 신체 언어의 현장감을 살려서 말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신체 가운데, 소통의 실행을 돕는 가장 두드러진 곳은 어디인가. 나는 손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입도 그런 기능을 하지만, 손이 입보다 신체 사용이 더 직접적이고 역동적이다. 특히 박수와 악수는 신체 언어의 대표선수이다.

 

박수와 악수는 묘한 차이가 있다. 악수는 ‘개인 간(Person to Person) 소통’의 장면에 잘 어울리고, 박수는 ‘사회적 소통’의 장면에 더 적합한 듯하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악수를 통해서 공동체적 교감을 넓혀가는 사람도 있고, 박수를 통해서 개인 간 호감을 만들어 가는 사람도 있으니, 소통의 센스를 발휘하기 나름이다.

 

박수는 찬동과 공감을 나타내는 세계 공통의 신체적 기표(記標)이다. 악수도 그러하지만, 박수는 악수보다 더 세계성이 강한 신체 언어이다.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오지 원주민들에게도 악수는 안 통하지만, 박수는 통한다. 인간발달 면에서도 박수는 악수에 선행한다. 생후 1년만 지나도 아기는 박수를 자연스럽게 터득하지만, 악수는 대개 18세 이후 성년의 시기에 도달하여 체득한다. 박수에 비해 악수는 사회 문화적 학습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회 문화적 기능으로서 박수와 악수 둘 중, 어느 편이 더 강할까. 판단이 쉽지 않다. 정치 집회나 팬덤 행사에서 요구되고 유도되는 박수는 옴짝 없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다. 여기서는 박수 치지 않는 자에 대한 경계와 의심이 번뜩인다. 히틀러나 스탈린 등 일당 독재 전체주의 권력의 잔혹함은 집단 박수의 섬뜩함을 먹고 자란 것이다. 인물을 우상화하는 데에도, 공적을 절대화하는 데에도, 수많은 박수의 연출이 있었다.

 

박수에는 미학도 있다. 몰입의 극한으로 이끌었던 공연이 끝났을 때, 홀을 메운 사람들의 기립 박수는 공연의 감동을 증폭시킨다. 모진 운명과 대결하며 그것을 딛고 일어선 사람, 가혹한 병마와 오래 투병하면서도 생에 대한 의지를 다짐하는 사람, 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환자들을 감당한 의료진 등에 보내는 박수는 울림이 큰 감동의 부호이다. 박수 장면 자체가 아름답다. 미학이란 결국 감동의 또 다른 이름 아니겠는가. 이런 박수는 내가 나의 영혼을 두드려 일깨우는 소리이기도 하다.

 

02

박수와 반대되는 자리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만 생각하면 ‘야유’를 떠올릴 수 있겠다. 박수가 위로 받드는 찬양이라면 야유는 아래로 밟아 버리는 모멸이니까. 그러니까 ‘야유’가 반대말이다. 그런데 반대어 찾기의 기준을 달리 잡으면, 박수의 반대가 꼭 ‘야유’만은 아니리라. 예컨대 ‘전쟁’의 반대어는 ‘평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 간의 갈등 사태에서 외교적인 협상이 실패하면 평화는 깨어지고 전쟁으로 치닫는다. 이런 일에 매달려 본 외교관이라면 ‘전쟁’의 반대어를 ‘외교’라고 말할 것이다. 미국의 노련한 외교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도 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참혹한 전쟁을, 갈 데까지 다 가도록 놔두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중단하도록 하는 것도 외교가 감당한다. 외교가 기세를 올리는 데서는 전쟁이 설 자리가 없다. 전쟁이 기세를 올리는 사태에서는 외교가 끼어들 자리를 얻기 어렵다. ‘전쟁의 반대는 외교이다’, 말이 된다.

 

그렇다면, 박수와 반대되는 것은 무엇일까. 각자의 경험에 따라 의미 있는 반대어들이 나올 수 있다. 아이들에게 물으면 대게는 ‘꾸중’을 든다. 맞는 말이다. 이해(利害) 속이 밝은 아이는 ‘용돈이 따라오는 칭찬’을 말한다. 박수는 실속이 없는 칭찬이라는 것이다. 박수만 받았지, 생기는 것이 없다는 뜻이리라. 박수의 순기능을 염두에 둔 어떤 분은 ‘악플’을 반대어로 제시한다. 언어 윤리가 반듯하신 분이다. 언어 세태를 비판하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박수의 반대로 ‘공개적인 자기비판’을 말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를 비판해야 하니 박수의 반대 장면이 됨직하다. 박수의 반대어만 살펴보아도 박수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에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선생이 생각난다. 선생은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고해성사가 불편하다고 고백한다. 창의와 자유의 정신을 구가하는 작가로서의 면모가 엿보이는 장면이라고나 할까. 다음은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말이다.

 

저도 가톨릭이 좋은데 고해성사(告解聖事 : 신자가 신부를 통하여 하느님에게 지은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뉘우쳐 용서받는 일)는 싫어요. 아무리 하기 싫어도 일 년에 두 차례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해야 하잖아요? 한번은 동화 쓰시는 정채봉 씨에게 말했어요. 나는 고해성사 때문에 가톨릭에 대해 냉담해지고 말거라구요. 그게 왜 의무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억지로 만들어 가지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말해야 하나요?

정채봉 씨에게 그런 말을 막 했더니, 웃으시며 피천득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피천득 선생님께서는 성당에서 나누어 준 성사표(고해성사를 하고 나서 확인받는 표)를 그냥 통 속에 집어넣어 버린다면서요? 한번은 그러시다가 신부님께 들키기까지 하셨다면서요. (웃음)

<박완서의 말>(2018), 180쪽

 

박완서 선생의 말을 듣노라면, ‘박수’의 반대 자리에 ‘고해성사’가 있을 법하다. 박수는 나의 외면적 ‘겉 사람’을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찬양받는 장면이고, 고해성사는 나의 ‘속 사람’ 내면을 신부님에게 비밀스럽게 부끄럽게 털어놓는 것이다. 박수받는 자리와 고해성사하는 자리, 완전 대칭으로 놓이는 구도가 아닌가.

 

그러면 박완서 선생은 박수받는 일은 좋아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오’이다.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환호의 박수를 받으며 웃음 가득한 박완서 선생의 모습이라니! 선생을 아는 문인들은 그런 장면은 상상이 안 된다고 말한다. 선생은 아마도 고해성사만큼이나 박수받는 일을 불편해했을 것이란다. 박수도 ‘자유나 창의’와 썩 잘 어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대중적 집회나 행사에서의 박수는 마냥 자연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박수가 형식주의나 전체주의에 동원되면 오히려 사람들의 입을 막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03

소백산 등정을 했다. 그 전날 희방사 부근 여관에서 묵었다. 밤이 깊어 문득 잠결에 박수 소리를 듣고서 깨었다. 여기가 어디기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분간이 잘 안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들으니 그것은 계곡의 물소리였다. 옛날 사람들이 관용구처럼 하던 말이 실감 나게 다가왔다. ‘물 흐르는 소리처럼 박수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그 표현 말이다. 박수 소리가 계곡에 물 내려가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은 ‘인간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합일하여 만나는 지점 아닐까. 박수칠 때 사람들 마음도 흐르는 물의 성정을 닮기를 기대해 본다.

 

시대의 순정함이 묻어나던 박수가 있었다. 어릴 적 영화관에서 터져 나오던 박수가 바로 그러했다. 선한 주인공이 악인을 물리칠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던 박수, 조금도 연출되지 않은 박수, 한 세대 전 시골 영화관에서 흔히 있던 풍경이었다. 이제 이런 박수는 없다. 통속의 감정에 이끌려 치는, 순진한 박수는 촌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세태가 되었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의 감수성이 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일말의 향수가 있다. 그 권선징악의 결정적 장면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터져 나오던 박수, 이제는 더 볼 수 없는 사라진 감정의 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박수는 좀 나쁜 쪽으로 진화하는 것 같다. 이미지 정치가 넘치는 곳에 박수가 기획되고, 그 박수의 힘으로 이견을 잠재운다. 모든 종류의 쇼에서는 박수가 필요악이다. 박수를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쇼이다. 연예 쇼이든 정치쇼이든 마찬가지이다. 쇼는 ‘박수 만들기’ 이벤트이다. 박수가 필요 없는 쇼는 쇼가 아니다. 박수를 기획하지 않는데도 박수가 자연스레 나오는 것, 그것은 매우 리얼한, 그리고 진정성 넘치는 현실일 뿐이다. 그것은 물론 쇼가 아니다. 박수를 좀 제자리에 두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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