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같아 보이지만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는 다르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다르고, 부자와 빈자의 삶은 디킨스의 표현처럼 믿을 수 없이 다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윤리적 정초에도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COVID-19 시대를 맞아 21세기 경제의 패러다임으로 간주되었던 아웃소싱, 공유경제, 경제블록 등의 사회체제 대신 각자도생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처럼 보인다.
온라인 시대를 맞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고, 서로를 이해하기에 물리적 공간 자체가 부족해지는 인상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의 교육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서로를 헤아리고 이해하는 능력 없이 과연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온라인 수업이 정보전달 수준을 넘어서 진정한 교육이 되려면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사랑’을 표현한 여류시인, 사포
공감(sympathein)은 같은 것을 겪고 느낀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서로가 온전히 같은 것을 겪을 수는 없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이라는 종의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상이하다. 그런 면에서 남자는 온전히 여자를 이해할 수 없고, 여자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여자가 남자보다 더 사내다움을 헤아릴 수 있다.
사포(Sappho)는 여류 시인이다.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제한되어 있던 시대에 여성의 작품이 남아있는 것은 당대부터 대단한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사포는 사랑을 주제로 많은 시를 남겼다. 사랑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다. 언제 어느 때나 그의 시를 읽더라도 어색하지 않다.
산속 떡갈나무를 휘몰아치는 / 폭풍처럼
사랑은 / 내 마음을 흔들어 놓네.
- 사포, <사랑의 폭풍>
사포의 감정에 가슴이 울리는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어색하다. 남자라고 해서 여자의 시를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여자라 해서 남자의 노래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감정은 남자의 내면에는 여성성이 있고 여자의 내면에는 남성성이 있다.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남자가 적극적이고 여자가 소극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생물학적 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때 나는 아름다운 처녀를 보며 말했지.
네가 늙으면 / 우리 젊어 함께 지낸
그 화려했던 많은 날들을 / 기억할 수 있을까? (중략)
- 사포, <이별>
사포는 레스보스(Lesbos)섬에서 살았고, 동성 여인들을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이 성에 따라 달라질 것처럼 느껴지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음을 사포는 보여준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겪어봐야만 아는 것은 아니다. 대단한 통찰력과 지혜가 드러나기도 하고, 아이들의 무심함이 어른들의 복잡한 생각을 넘어서기도 한다.
(중략) 키프리스여, / 고통의 늪에 빠진 저를 보시고
구해줄 수 있다면 / 제게 말하십시오. 망설이지 말고.
제가 사랑을 위해 인내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 사포, <아프로디테의 송가>
사포는 서정의 방식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를 보여준다. 그것은 철학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칼카스나 테이레시아스와 같은 예언자의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사포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의 힘으로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전한다. 사포의 시는 단순히 동성 간의 사랑을 그린 것으로 치부될 것은 아니다. 시인의 재주는 읽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감정을 끄집어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데 있다. 플라톤이 사포를 10번째 뮤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촌철살인의 한방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낸 아르킬로코스
사포가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다면, 아르킬로코스는 촌철살인의 한방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낸다. 평범한 군인이자 시인이었던 아르킬로코스는 귀족들의 세계관을 조롱하고, 자신에게 파혼의 모욕을 줬던 귀족 리캄베스를 시를 써서 복수한다. 아르킬로코스에게는 호메로스 헤시오도스가 보여줬던 영웅 중심의 세계관도 보이지 않는다.
(중략) 잘 가져가라 해. / 다시 더 좋은 것을 구하면 되지 뭐.
- 아르킬로코스, <방패>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전투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이 전투를 떠나는 아들들에게 ‘차라리 방패에 누워서 돌아오라’고 말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르킬로코스는 고대인들 역시 자신들의 목숨을 소중히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고대인들의 모습이 근대인들과 의외로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죽고 나면, 어떤 사람도 /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얻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동안 /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과 호의를 주고받을 뿐이다. 죽은 자는 가장 나쁜 것을 받을 뿐이다.
- 아르킬로코스, <죽음 이후>
명예는 기본적으로 평판(doxa)이다. 그 평판은 평판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대로 전승해서 내려주어야 하는 것이니, 실제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 이 평판은 사람들이 공통의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전승해야 유지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늘 그렇듯이 평판은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와는 별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의 삶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내 마음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일 뿐이다.
오, 가슴이여, 나의 가슴이여, 감당할 수 없는 불행으로 심하게 상처 입었구나.
어서 일어나 너의 적들을 똑바로 보고 싸워라.
꿋꿋하게 서서 너를 둘러싼 그들을 맹렬하게 쫓아 보내라.
승리한다 해도 너무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말고
패배한다 해도 집안에 틀어박혀 비탄에 빠지지 마라.
행운에서 얻는 기쁨, 고통에서 얻는 슬픔에 중용을 지켜라.
- 아르킬로코스, <중용>
인간의 삶에서 과연 중요하다고 여길 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지 않다. 부와 명예는 대표적인 기준이 되지만, 그것 또한 삶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아르킬로코스는 생존을 제일 중요한 것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를 봐서는 또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는가.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을 가장 훌륭한 교육으로 삼아야 하는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지.
- 아르킬로코스, <시선>
금이 넘치는 기게스 왕의 인생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네.
신이 가진 능력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 왕이 가진 위대함을 열망하지도 않네.
그 모든 것들은 나의 시야 바깥 멀리 있네.
- 아르킬로코스, <나의 관심>
부와 명예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부와 명예에 연연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 외적조건이 내 삶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다. 외적조건은 분명 내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외적조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또 다른 불행을 낳는다. 아르킬로코스의 호기로움은 돈이나 명예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의 삶에 대해 최소한의 기준과 원칙, 그리고 애정과 자존감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서 온라인에 의존하는 교육환경의 변화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대면수업으로의 복귀를 원하는 교사들과는 달리 학생들은 훨씬 더 빠르게 온라인에 의존하고, 오프라인의 변화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모습도 감지된다. 여러 이유 때문에 교사와 학생의 접점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정적 감성을 통해 우리는 심리적 거리두기를 극복하고 같은 길을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온라인 매체가 교육공간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데 기여한다면, 서정시는 교육공간의 심리적 거리를 회복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