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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뭐든 아낌없이 ‘주라’네

 

몇 해 전 조지아 여행에서 맛 좋기로 소문난 ‘조지아 와인투어’를 간 적이 있다. 지나던 길에 보았던 성당을 다음 날 다시 찾았는데 그 앞에서 ‘주라’를 만나게 됐다. 그는 내게 담배가 있냐고 물었고 마침 조지아 사람들을 위해 가방에 갖고 다니는 담배를 건넸다. 그는 내게 손에 든 물고기 세 마리를 주려고 했다. 집에서 저녁으로 요리를 하려고 했을 생선을 덥석 받을 수 없어서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해주면 맛을 보겠다고 했다. 그는 집에 전화를 걸어 보더니 바로 초대를 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조지아에 가면 꼭 찾아가는 주라네. 올해도 주라 가족이 있는 그레미에 가게 됐다. 매번 주라의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주셨는데 이번에는 좀 특별하게 만나고 싶었다. 한국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챙겨왔고 트빌리시 마트에서 현지 조달이 가능한 것들을 구매했다.

 

차에는 내 짐이 든 캐리어 말고도 주라네 가족들에게 전할 선물이 들어 있었다. 곰보리 언덕에서 잠시 가을을 만끽하고 그레미에 도착했다. 1년 만에 만나는 자리, 강아지 ‘보또’가 이웃집 남자가 쏜 총에 발 하나를 잃은 것 말고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조지아 시골 마을에서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캐리어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옷가지들과 주방 용품들이 가득했다. 값비싼 물건들이 아니라 실망하면 어쩔까 싶어 손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동안 주라네서 담았던 사진들을 앨범으로 만들어 선물했다. 식구들이 선물을 보는 동안 주라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테이블에 음식을 하나둘 내오셨다.

 

“오늘은 제가 요리사입니다. 어머니는 그냥 앉아 계세요.”

잠시 주방을 둘러보니 변변한 주방용품이 하나 없었다. 도마는 울퉁불퉁하고, 칼은 무디고, 그릇은 손잡이가 없고, 수도꼭지는 덜렁거렸다. 편리한 우리집 부엌에서도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데 한숨부터 나왔다.

 

시장에 채소를 사러 갔다 오면서 주방용품 가게도 들렀다. 나 편하자고 산 것도 있지만 주라 어머니가 좀 나은 환경에서 음식을 하는 바람이 더 컸다. 오늘 저녁요리는 제육볶음과 불고기로 정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소스와 시장에서 산 조지아 고기는 준비가 되었는데, 채소를 다듬어야 하는 과정에서 버퍼링이 걸렸다. 주라네 주방에는 전기제품이 하나도 없었다. 마늘은 절구통에 빻았고, 채소들은 채칼을 이용해 얇게 썰었다. 오래전 김장 담그시는 엄마를 돕겠다며 곁에서 마늘을 빻고 당근을 채 썰었던 기억이 났다.

 

팬에 소스에 버무린 고기부터 볶았다. 채소는 나중에 넣어야 하는 건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동안 만들어본 요리(라면, 계란프라이)를 넘어서는 시도였다. 맛이 없으면 서로 어색해질 것을 알기에 정성을 다해 고기를 볶았다. 접시에 내 놓고 나니 손가락이 얼얼해졌다.

 

식사가 시작됐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자마자 입을 맞춘 것처럼 엄지를 동시에 올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시각적으로 시뻘건 제육볶음 보다는 불고기에 손이 더 자주 모였다. 불고기 접시는 금새 바닥을 드러냈고 제육볶음은 식사가 끝나도록 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남긴 것에 미안해하는 표정이 보였다. 예전에 주라네서 대접을 받을 때 나는 과연 맛있게 먹은 손님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여행을 하다가 현지인 집에 초대를 받아 가면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종종 있다. 입에 맞는 음식이라면 아무 일 없겠지만 혹여 입에 맞지 않게 되면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었다. 음식을 만들어보니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을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음식을 만드는 시간과 그리고 따스한 밥상을 마주한 시간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따스한 음식을 해준 사람들 얼굴이 접시에 하나둘 그려졌다. 음식만 만드는 일 외에 많은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주라네를 나오면서 내일은 맵지 않은 스파게티를 만들어 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 맛있는 스파게티 레시피를 찾았다. 한국이라면 다양한 소스와 면을 살 수 있겠지만, 여기는 조지아 시골이고, 슈퍼마켓은 차로 10㎞를 나가야 했다. 그나마 스파게티 면은 다양하게 있었는데 한국처럼 양념된 스파게티 소스가 없었다. 대신 케첩과 처음 보는 토마토 페이스트라는 게 있었는데 요리에 문외한인 나는 두 양념 사이에서 고심을 해야 했다. 점원에게 물었는데 시큰둥한 반응이었고 인터넷에 검색하니 토마토 페이스트에 양파, 파프리카 등을 넣으면 맛 좋은 스파게티가 완성된다는 정보를 얻었다. 시장에는 양파, 파프리카, 마늘 등 구할 수 있는 야채가 많았는데 하필이면 스파게티 맛에 화룡정점을 찍어주는 바질이 없었다. 엉뚱했지만 맛이 정말 이상하면 라면 스프라도 넣을 생각이었다.

 

라면 스프를 넣어야 했을 정도로 맛이 없지는 않았다. 어제 같은 실수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식구들 접시가 깨끗해진 걸 보고 나는 배가 불러왔다. 어릴 적 우리 엄마도 이 심정이셨을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안 먹어도 엄마는 배불러”라고 했던 그 말…. 나는 잠시 그런 포만감이 느껴졌지만 금새 배가 고파왔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건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은 더 많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만큼 음식도 자주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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