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는 코로나로 확진환자가 만 명을 넘길 거라는 기사가 연일 쏟아져 나오던 2월 초, 졸업식을 했다. 인근 학교 대부분이 졸업식을 비대면으로 치른다고 했지만, 강당 졸업식은 못해도 아이들 보내는 마당에 교실에서 마지막으로 담임이 종례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3학년 담임들 의견이 모여 ‘교실 졸업식’으로 진행되었다.
어쩌다 보니 13년 연속, 고3 담임을 하고 있다. 22년 교직생활에서 절반이 넘는 세월이다. 정든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다시 새로운 아이들로 채워지고, 다시 그 아이들을 떠나보내면서 흘러간 세월. 그 세월을 걸어오면서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생각이 미쳤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첫 발령받았던 학교, 그때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서울에서도 가장 외진 곳, 산자락 아래 자리한 전형적인 서민 동네, 학급 아이들 중 절반 가까이 교육비든 급식비든 지원을 받아야 했던 학교.
지금도 기억나는 날이 있다. 울고 있었다. 20년 정도 선배였던 부서 부장선생님을 붙들고 서운하다고 울었다. 아니 사실 억울했다. 담임하던 녀석 하나가 가출을 했는데, 처음이 아니었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여러 번이었는데, 녀석의 이번 가출은 이전보다 훨씬 더 안 좋았다. 가출하고 나서 어찌어찌 연락이 닿은 녀석이 내 가슴에 대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통속적인 3류 드라마처럼 녀석에게는 하루걸러 한 번씩 술을 마시고 엄마와 자신을 두들겨 패는 아버지와 가사도우미로 집안 생계를 몽땅 책임지면서도 무기력하게 어떤 탈출구도 찾으려 하지 않는 엄마가 있었다. 그래서 녀석의 잦은 가출은 이해가 되었다. 짠한 마음과 책임감에 평소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을 돌면서 녀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경제적인 지원도 해주던 참이었다. 덕분에 녀석이 가출하면 바로 연락하고 찾아내, 하루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연락이 닿은 녀석은 전화기 안에서 악을 썼다.
“솔직히 샘이 제일 재수 없어요. 나한테 해주는 게 뭐가 있어요?”
그날 울면서 말했다. 다를 게 뭐냐고. 열심히 담임을 하고, 아이들 상담을 하고, 수업 준비를 하는 선생이나 적당히 대충대충 하는 선생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오히려 아이들은 적당히 무관심하게 대충 넘어가 주는 선생을 더 편하게 여긴다고. 그분은 콧등으로 내려간 안경을 고쳐 쓰며 천천히, 작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가 가져가요.”
흘러내리는 콧물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샘이 그 아이에게 주었던 관심·사랑·정성, 이것들은
오롯이 그 아이가 가져갈 거잖아요. 그럼 된 거예요.”
순간 뒤통수에 벼락을 맞은 듯 번쩍하고 정신이 났다. 그때까지 인정을 구걸하던 어린아이가 교사가 되어서도 자라지 않은 채 내 안에 오도카니 웅크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그때부터 일 거다. 무언가 선생으로서 새로운 자각이 들었던 건. 그 자각은 동시에 내 안의 웅크리고 있던 어린아이도 함께 성장시켰다.
세월은 흘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울던 신규교사는 어느덧 중견교사가 되었다. 그때의 깨달음을 얻어내던 열정만으로 이후에도 선생 노릇을 계속 훌륭하게 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고 정신없고 어지럽게 돌아간다. 요 며칠 펼쳐 든 신문과 방송은 개학하기 전 한숨부터 나오게 만든다.
교육부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새 학기 등교와 관련해 ‘학교자체 조사기준’을 발표했다. 지난달 7일 발표한 ‘오미크론 대응 2022학년도 1학기 방역 및 학사운영 방안’에 따라 수정된 지침이라고 한다. 그 복잡한 내용은 아무리 읽어봐도 뭔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단지 ‘방역? 학교가 알아서 하면 되는 거지?’라고 읽히는 건 순전히 나만의 오해일까?
또 다른 한 신문에 나온 기사는 불편한 심기에 잠깐 눈을 감게 했다. ‘욕이 일상이 된 초등 고학년, 교실에서 자기 시작하는 중학교, 대놓고 자는 고교생, 이들을 어떻게 케어할지 쉽지 않은 교사. 교사양성을 어떻게 바꾸면 해결이 될까요?’라는 제목이었다. 교사양성과정만 바꾸면 지금 교실에서 겪고 있는 상황들이 해결된다는 말일까? 그 모든 교육적 난제들을 모두 교사가 떠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안일함이 답답했다.
사실 교실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일 수밖에 없다. 적당히 교사 개개인의 노력과 헌신만 갈아 넣으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언 발에 오줌 누기’ 같은 결과만 나온다. 특히나 교실은 단순히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공간만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교실 안에는 학부모도 들어와 있고, 학교 안 교사와 교사의 관계도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이익단체들의 압력도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국가의 교육시책은 버젓이 교실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형편이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합하기란 쉽지 않다. 다 다른 배경과 서로 어긋나기 쉬운 시선과 각자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사고와 가치관이, 교실이라는 한 공간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교사의 리더십을 시험한다. 게다가 요즘처럼 교육정책이 조변석개(朝變夕改) 하고 교권이 어디 있는지 가끔 헷갈리는 시절에는 어디다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 일개 교사는 그저 막막해질 뿐이다.
완벽하지 않을 용기를 갖자
학교와 교사가 모든 교육적 난제들을 풀어내 확실한 결과를 도출해 줄 것이라는 안이하고 성급한 압력에 맞서 어쩌면 지금 우리는 ‘곧바로 답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를 견뎌내는 힘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치다 타츠루의 책 제목처럼 <완벽하지 않을 용기> 말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학교에서는 ‘확실하게 결과가 나오는 곳’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정된 자원을 경사(傾斜) 배분해야 한다는 선택과 집중 이론을 마치 과학적 진리인 양 떠받드는 듯합니다.
- <완벽하지 않을 용기>, 우치다 타츠루
오래전 신규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난 한 녀석을 변화시키는데 실패했다. 거꾸로 욕을 먹었고, 원망을 들었다. 나의 노력과 열정이 녀석의 앞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는지 확인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관계 역학으로 복잡하게 뒤엉킨 교실이 역설적으로는 그래서 교사와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공간이 된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다시 완벽하지 않아도 노력하고자 하던 ‘그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동료교사 분들을 돌아본다. 교실에서 실망하고, 때로는 민원전화 한 통에 하루 종일 우울해하며, 현장을 알려고 하지 않는 교육정책 앞에서 자주 좌절하는 모든 선생님들을 돌아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교육현장에서 ‘여전히 노력하는 교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모든 동료교사들을 ‘완벽하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함께 가자고 응원한다.
3월, 이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