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동아시아 질서를 바꾸다!
中 조선 내정간섭, 중화제국주의적 행태 언급 없어
日 침략전쟁 성격 모호하게 처리하는 서술방식 채택‘청일전쟁’은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한・중・일 세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이다. 명칭만 보면 ‘청일전쟁’은 청과 일본 사이의 전쟁 같지만, 이 전쟁의 이면에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혹은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 사이에 치열한 각축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조선은 전쟁터가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청일전쟁은 청・조선・일본이 뒤엉킨 가운데 발발한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자 청과 조선의 몰락을 예고한 전쟁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동아시아의 종주국을 자처한 중국은 종래에 누려왔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고 심지어 일본에게 영토를 빼앗기거나 침략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구미와 대등한 위상을 확보하면서 동아시아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종주국으로 군림했던 청과, 한때 중국왕조에게 조공을 받치면서 섬나라 오랑캐로 멸시받아왔던 일본 사이의 위상은 역전되고 말았다. 청・일 양국 사이에 끼어있던 조선은 자주적인 부국강병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일본의 내정간섭에 시달리다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이처럼 청일전쟁은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각국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근대 동아시아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 가운데 하나다.
청일전쟁의 발생배경과 원인
한국의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청일전쟁보다는 동학농민운동에 초점을 두고 있다. 청일전쟁과 관련해서는 그저 조선정부가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내용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청일전쟁의 발생배경이나 원인,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서의 성격이나 의미, 그 전쟁이 향후 동아시아 3국의 위상변화 및 운명결정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청일전쟁과 한국의 근대화운동 실패 사이의 상관성 등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동학농민운동은 청일전쟁을 촉발한 직접적 계기로서 청일전쟁의 추이와 맞물려 있었다.
중국의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청일전쟁(중국에서는 ‘甲午中日戰爭’으로 부름)의 발생배경과 원인으로, 명치유신 후 국력이 강대해진 일본은 국내시장이 협소해서 인민의 봉기가 끊이지 않자 대외침략 속에서 출로를 모색했다는 점, 당시 미국은 일본을 중국과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조수(助手)로 삼기를 바랐고, 영국은 일본을 이용해 극동에서의 러시아 세력의 확대를 견제하려고 했으며, 독일은 일본의 중국침략 기회를 이용해 새로운 권익을 차지하려고 했다는 점, 러시아는 중국동북 및 조선에 대한 야심이 있었지만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일본에 대해 불간섭정책을 취했다는 점, 청일전쟁의 직접적 계기가 조선의 ‘東學黨起義’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전쟁원인으로 영국이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갑신정변을 통해 조선에서 청 세력을 몰아내는데 실패한 일본이 이전부터 청과의 전쟁을 준비해왔고, 조선에 대한 지도권을 취하려고 했다는 점, 조선을 屬國으로 취급하는 청과 대립했다는 점을 열거하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서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 쟁탈과정에서 청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줄 뿐 그 침략성은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다.
청일전쟁의 경과 및 결과
한국의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청일전쟁의 구체적인 경과과정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학생들에게 청일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것이 조선의 근대화개혁에 어떤 장애를 초래했는지, 왜 일본군이 출동해서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진압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이 우리나라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자, 정부와 화약을 맺고 있던 동학농민군이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봉기해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는 점, 이러한 저항이 항일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항일투쟁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고교 교과서에서는 동학당의 봉기로 조선정부의 파병요청에 응해 청군이 조선에 파병하였고, 곧이어 조선정부와 동학군 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져 청정부가 일본에게 동시철병을 요구했음에도 일본이 군대를 증원하여 전쟁을 일으켰다하여 일본의 부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상황에서 왜 청이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조선에 대한 청의 종래의 간섭이나 종주권 주장 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시 최고 책임자인 서태후(慈禧太后)나 이홍장(李鴻章)이 열강의 조정을 통해 일본과의 전쟁?회피하려고 했고 전쟁 발발 후에도 소극적으로 저항했다는 점을 들어 청일전쟁에서의 내적인 패배원인을 부각시키고 있다.
중국의 고교 교과서에서는 청일전쟁이 서구 열강의 지지 하에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임을 명시함과 아울러, 청일전쟁의 결과 체결된 마관조약(馬關條約, 일본명 시모노세키조약)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즉 ㉠ 대만 등 영토를 빼앗기고 주권이 파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열강의 중국 분할 야심을 자극해서 중국이 열강의 세력 범위로 나눠져 중국민족의 위기가 가중되었다는 점, ㉡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되어 중국인민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지불능력이 없는 청정부가 외채로 배상금을 충당함으로써 중국경제의 명맥이 열강에게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점, ㉢ 새로운 항구가 개항되어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 내륙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조선의 독립, 요동반도・대만・팽호제도(澎湖諸島)의 양도, 배상금 2억 량(약 3억 1000만 엔)의 지불 등을 인정케 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이나 중국에 세력을 뻗치는 것을 경계한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청에게 반환하도록 일본에 요구했고, 일본은 추가의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국민 사이에 러시아와 대결의식이 높아졌고 일본정부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말하면서 대규모로 군비를 확장해나갔다는 점, 대만을 영유한 일본은 대만총독부를 설치하고 주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식민지 지배를 했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청일전쟁의 의의
한국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와, “청일전쟁의 결과 한반도에서 청 세력을 몰아낸 일본이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는 단 두 마디만을 거론하고 있다. 따라서 청일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의 위상과 역학관계가 어떻게 달라졌고, 그것이 조선의 위상과 운명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왜 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데 조선이 전쟁터로 되었는지 등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의 국제적 연관성 혹은 청일전쟁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위상 등을 폭넓게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근대 동아시아 국제 전쟁인 청일전쟁과 근대 민중 개혁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의 큰 그림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고교 교과서에서는 청일전쟁에서 청이 참패한 원인, 청일전쟁이 침략전쟁이고 마관조약이 불평등조약이라는 점,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이권쟁탈로 중국 민족 자본주의의 발전이 장애를 받았고 중국사회는 반(半)식민지 단계로 전락되었다는 점 등 청일전쟁이 중국에 초래한 폐해를 명확하게 부각시켜 학생들의 각오를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서구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과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구미열강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서 구미와 대등한 나라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 ‘잠자는 사자’로 불리던 청에 대해 열강은 한층 세력권을 확대했고 다양한 이권을 획득했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다. 청일전쟁이 일본에 미친 영향과 관련하여, 청일전쟁의 승리로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위상이 제고되었고,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중국 동북지방(만주)으로 세력을 뻗칠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아시아의 대국이 된 일본에는 중국이나 조선 등으로부터 유학생이 오게 되었지만, 일본인 사이에는 중국인 및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이나 차별의식이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을 서술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과서에서는 일국사(一國史)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청일전쟁이나 동학농민운동의 국제적 연관성 혹은 청일전쟁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위상, 조선의 국권이 유린된 근본적인 원인 등을 학생들에게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 교과서에서는 일본 침략세력에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친 청군 지휘관의 행태와,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희생된 지휘관들의 행태를 극명하게 대조하거나 대만인(臺灣人)의 격렬한 대만 할양 반대투쟁을 상세하게 소개함으로써, 중국학생들에게 “중국인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역사적 사례를 통해 예시해주고 있다.
특히 청일전쟁으로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게 된 상황에서 대만인들이 전개한 대만 할양 반대투쟁을, 조국의 영토를 보호하려는 강렬한 의지라거나 고도의 애국주의 정신을 드러낸 것 혹은 대만인민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투쟁 등으로 해석(‘中國近代現代史’((全日制普通高級中學敎科書) 上冊, 人民敎育出版社, 2002, 48-52쪽)해, 중국정부의 국가통치 이데올로기의 특징인 ‘애국주의 역사교육’과 중대한 국가대사인 ‘조국통일’ 슬로건과 연계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 교과서에서는 청이 조선에 대해 저질렀던 내정간섭이나 중화제국주의적 행태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서는 자국의 근대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반면 침략전쟁의 성격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 행태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서술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진=청일전쟁이 끝난 후 서구열강이 중국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나누어 분할하려한 내용을 풍자한 그림. ‘중국근대사’ 신승하 대명출판사, 1994
/ 윤휘탁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